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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시리즈 (2)
내려놓음으로의 부르심
요 11:45~50
I. 서론
만약 하나님께서 이번 사순절 기간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소원도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소원을 말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는 것일 겁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한 번 나타나서 만나주신다면,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실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기간을 맞아,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할 기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뽑은 세 사람은 가야바, 빌라도, 베드로입니다. 이 세 사람은 각 계층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야바는 당시 유대인의 대제사장이었고,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이었고,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아십니까? 가야바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체포해서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동거 동락한 예수님을 마지막 순간에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믿음이 강화될 것이고, 우리의 삶이 이전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천년 전, 유대 지역에서 가장 중요했던 세 사람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그분과 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체포했거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거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세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첫째, 대제사장 가야바
가야바는 자신이 누리고 있던 편안한 삶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가야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교수님의 설명입니다. “유월절은 언제나 유대인 기득권자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사람들 사이에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주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이스라엘이 선물로 받게 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과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이 기간 동안, 로마군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대다수 유대인의 심기를 평소 때보다 훨씬 더 자극했다. 예루살렘 거리의 분위기는 희망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대화에는 마침내 하나님이 언제 메시아를 보내 주실지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불만 붙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마찬가지였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어떤 극렬분자가 나타나 기회를 틈타 군중을 자극해 로마에 저항하는 폭동을 일으켜 결국 가혹한 탄압과 끔찍한 유혈사태로 끝맺는 악순환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가야바나 산헤드린 공회에 있는 그의 동료들에게 로마 지배하에서의 삶은 근심걱정 하나 없는 안락한 삶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영원한 과제였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야바가 성전 경비대를 동원해서 예수님을 붙잡은 때가 유월절 하루 전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야바는 일어날지 모를 폭동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야바는 종려주일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부르는 군중들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야바가 우려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유대의 왕으로 추대한다면, 로마 군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잔인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형할 것이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던 가야바는 더 이상 그러한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요 11:49~50,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고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가야바를 위시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내린 결론은 예수님을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어 폭동을 일으키면, 로마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그렇게 되면,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편안한 생활을 빼앗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가야바가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50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즉,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밖으로는 유대 민족을 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가야바를 위시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편안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겼던 것입니다.
2. 둘째, 총독 빌라도
빌라도는 자신이 누리고 있던 지위를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군중의 이 한 마디 때문에 예수님을 놓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요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라는 말입니다. 가이사는 당시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를 말합니다. 당시, 빌라도는 유대에서는 제 일인자였지만, 어디까지나 로마 황제가 유대에 임명한 총독일 뿐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계속해서 로마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이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이 말은 일종의 협박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빌라도는 갈릴리에서 유대로 물을 끌어오는 수로시설을 만든다고 성전세를 몰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공사의 수혜자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성전세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돈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자기 마음대로 몰수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자신이 앞으로 유대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무장하지 않는 일반인들을 죽인 것이 명예롭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빌라도의 권위가 많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소문은 로마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2) 둘째, 빌라도는 손상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황제 티베리우스의 형상이 새겨진 방패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떨어진 황제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방패가 성전 관할 구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 형상이 없는 방패를 사용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로마 군대 장비를 왜 유대인들의 요구에 따라 바꾸어야 하느냐고 생각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지난 번 일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빌라도에게 강하게 항의하지 않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직접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로마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티베리우스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티베리우스는 빌라도보다 훨씬 더 나은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의 감정을 건드린 방패 문제를 백지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빌라도의 입지는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빌라도가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른다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협박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빌라도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정의와 양심의 판단에 따라서, 죄가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누리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중의 요구에 따라,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가?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리스도인들은 2천년이 지나는 동안,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빌라도의 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3. 셋째, 수제자 베드로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아는 고난 받고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마 16장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마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말했습니다. 여기서 “항변하다”는 말은 영어로, “Rebuke”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심하게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영어로는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Never, Lord. This shall never happen to you.” “Never”가 두 번 사용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예수님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N. T. 라이트 교수님의 설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고 자신의 좋은 소식이 성경에 부합하다고 믿었기에, 가장 좋은 출발점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의 메시지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푸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고? 그것은 한마디로 미친 이야기였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물리쳐 줄 사람이어야 했다. 십자가 처형은 수치였다. 그것은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그런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베드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낸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로부터 구출해주실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 명의 인물을 살펴 보았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의 편안한 생활이 침해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이런 부정적인 사람들만 있었을까요? 혹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자신이 누리던 편안을 내려놓고, 자신이 누리던 지위를 내려놓고,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생각을 내려놓은 사람도 있었을까요? 네,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였습니다.
4. 넷째, 예수님의 제자 니고데모
1) 산헤드린 공회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거나 모두 숨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였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대로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자신이 속해 있던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드린 것은 자신의 지위가 박탈당할 위험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2) 로마 정부
그리고, 로마 정부는 예수님을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시행된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인은 제외되었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나, 끔찍한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만 행해진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십자가 위에 그 사람이 저지른 죄명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죄명을 기록했던 이유는 이 사람과 똑 같은 죄를 지으면, 여기 십자가에 못박힌 이 사람처럼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요 19:19~2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예수님의 죄명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의 왕이 곧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런 팻말을 붙인 이유는 로마 황제 외에는 유대에 왕이 없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나약한 자가 너희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 죄목이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로 기록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 드렸다는 것은 로마 정부로부터 주목을 받아야만 했던 상황이 된 것입니다.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킨 것이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까지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위와 안전을 잃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렇게 나선 것일까요? 이 부분만 말씀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3) 니고데모의 신앙고백
성경 두 군데를 함께 보겠습니다. 요 19:15~16,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 19:39~40,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하나님을 섬겨야 할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반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료를 백 리트라를 가져지고 왔습니다. 이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과 대화했던 인물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 3:14~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때, 니고데모의 생각에 지진이 생긴 것이 분명했습니다. 단순히 랍비로 알고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 사람을 구원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높이 들려 인류를 구원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왕일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리처드 보컴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조롱하는 투로 묻는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이에 대제사장들이 대답한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면서 대제사장들은 로마의 절대 권력을 인정한다. 유대교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니고데모 같은 양심적인 랍비들에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와 같은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배교 행위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고 로마의 통치가 유일한 신적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제사장들의 정치적 타협이 마침내 다다른 결말이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거기에 동참할 수 없었다. 니고데모는 배수진을 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었다. 니고데모는 매우 값비싼 향료를 백 리트라나 가져왔다. 값으로 보나 양으로 보나 엄청난 것이었다. 니고데모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그곳에 간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 향료를 운반하는 데만도 많은 하인들이 줄을 지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의 행동은 로마 지배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에 대해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화적 관습에 따르면, 장사 지내는 데 백 리트나나 되는 향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분명 최소한 왕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고데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설립때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리고, 역대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시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부인하고 있고, 로마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니고데모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있던 상황에서, 니고데모는 결코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의 장례를 왕의 장례로 치러 드렸던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니고데모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니고데모의 행동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의 편안과 지위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이 땅에서도 가장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게셋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생각도 내려 놓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편안과 지위를 내려놓고, 예수님에 대한 이전 생각도 내려놓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편안과 지위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안전과 명성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내 양심보다 더 소중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그분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후, 우리의 생각이 변했습니까? 아니면, 예전 그대로입니까?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서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큰 영광 받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