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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펼치는 문장, 날아다니는 글자
홍성란
책을 읽다
녹음 아래 생동하는 새들의 모습을 보고 연암 박지원은, 노니는 새들의 날갯짓과 노랫소리는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며 화답하는 글(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이라 했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했다(〈답경지(答京之)〉). 연암이이렇게 자연을 완상하면서 문장을 읽고 책을 읽었다고 했듯이, 나도 책 읽으러 집 가까운 산에 간다.
가끔 천지자연이 펼쳐놓은 문장을 읽으러 집 가까운 천변으로 한들한들 마음 함께 나간다. 신갈나무 큰 가지에서 때죽나무 꽃가지를 스치듯 나는 어치의 춤사위도 아름다운 문장이고, 개나리 덤불 사이 채송화 씨앗 같은 눈을 반짝이며 가벼이 떠드는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의 춤사위도 애틋한 문장이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글자로는 따라 적을 수 없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반갑다.
이 새들의 노랫소리 또한 신묘한 문장 아닌가. 그 문장을 따라 읽어가는 발치에는 봄이 갔다고 때죽나무 하얀 꽃이 수북이 떨어져 누웠다.
비루한 삶이여, 나의 허물이여!
1.
책상 위의 유리판을
수시로 닦아내도
지문 자국 선명한
내 사유는 오류이고
햇살로 만든 기둥엔
가득하다,
먼지여!
2.
이 빈약한 독법으론
피할 수 없는 투망
구렁이 담장 넘듯
순간순간 모면해도
그분이 쓰는 명부에
촘촘하다,
허물이여!
3.
새로 맞춘 안경의
도수를 높여가도
세상 보는 안목은
적록 구분할 수 없어
그분이 보시는 눈엔
비루하다,
삶이여!
— 김삼환 〈독경〉(《유심》 6월호)
이 시를 읽노라면 시인의 정신이 보이는 것 같다. ‘정신의 향기’가 보이는 것 같다. 4연 7행(전체 12연 21행)의 가지런한 시적 형식 또한 가지런한 시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시에서는 각 수의 종장 뒷구에 보이는 쉼표와 느낌표 문장부호마저 동일하게 쓰였다. 그리고 각 수의 종장은 앞구와 뒷구를 분리 기사했는데 뒷구를 1연 2행으로 하여 가득한 먼지 같고 촘촘한 허물 같아 비루한 나의 삶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책상 유리판에 선명하게 찍힌 지문에서 시인은 오류와 먼지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읽어낸다. 사선으로 들이치는 햇살의 빛기둥에 가득히 부유하는 먼지는 소소한 나의 잘못 부스러기들 아닌가. 완전범죄는 없다 하듯이 구렁이 담장 넘듯 순간순간을 모면하며 지나온 행적은 마치 책상 유리판에 스치는 손길마다 지문이 찍혀버리고 만 자신의 허물 같다고 느낀다. 오, 소소한 나의 잘못이여, 나의 허물이여!
이 허물은 “그분”이라고 지칭한 절대자가 쓰는 명부에 촘촘히 적혀 있다. 셋째 수의 정지(情志)를 펼치기 위해 시인은 첫째 수와 둘째 수의 비유를 들었다. 안경을 새로 맞출 때마다 도수를 높이지만 세상 보는 안목은 영 신통치 않아 빨강인지 파랑인지 분별을 못하는 삶이니 그분이 보시기에 나의 삶은, 나의 행적은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오,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삶이여!
이 시의 제목은 독경이다. 독경(讀經)이어도 좋고 독경(篤慶)이어도 좋다. 책상 유리판에 드러난 나의 지문에서 나의 행적을 돌아보며 반성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읽는 시라 해도 좋다. 책상 유리판에 드러난 나의 지문에서 비루한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시인의 도탑고 공손한 시라 해도 좋다. 이 〈독경〉의 시인에게서 글자로는 적을 재간이 없는 정신의 향기가 난다 해도 좋겠다.
갈대숲에서 읽다
그림자를 흔든다 바람도 때론 외로운가
무작정 나선 길 하늘은 쪽빛에 젖어
발밑이 푹푹 빠진다 어떤 사연 묻혔을까
허공에 마음 준 새 전할 말씀 무엇일까
눈물고름 얼룽얼룽 적셔가던 이야기도
그 품속 꼭 안아주면 정 아니면 그리움일까
등이 굽은 갈대 그림자를 데리고
이렇게 사는 거라 흔들리며 사는 거라
할애비 만평 울음에 우수수 언 볼 비빈다.
— 양점숙 〈솟대가 있는 갈대밭〉(《시조21》 봄호)
서울에서 갈대밭 하면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가까운 난지천변 하늘공원이 먼저 떠오른다. 하늘공원이라는 이름은 하늘만큼 높다란 언덕 위에 있어서 붙은 이름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꼭대기까지 숨차게 올라가야 갈대숲을 만날 수 있다. 왼쪽 발 골절이 낫지 않은 채 운동 삼아 올라가 본 하늘공원에서 만난 갈대꽃 무리와 탁 트인 시야 아래 펼쳐진 쪽빛 강물은 하얀 요트들과 어우러진 이국적 풍광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여기 <솟대가 있는 갈대밭>은 금강하구의 갈대밭이다. 금강을 따라 폭 200m, 길이 1.5㎞로 펼쳐진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 명소로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SBS의 월화드라마도 촬영했다는 소문이다.
어쩌자고 익산의 시인이 군산과 서천이 만나는 금강하구 신성리 갈대밭까지 “무작정 나”선 걸까. 갈대 그림자를 흔드는 바람처럼 “외로”웠던 걸까. “발밑이 푹푹 빠”지는 갈대밭 허공에 나는 새는 무어라 울먹이며 가는 걸까. 치마 말기에 달아 둔 하얀 “눈물고름”을 “적”시며 “가던” 그 눈물은 정 때문이었을까,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유독 그날은 바람 많아 갈대도 등이 굽어 자꾸 흔들리는 것이었다. 흔들리며 사는 우리네 인생을 위로하듯 갈대도 자꾸 흔들리는 것이었다. 만평 흐드러진 갈대꽃 언 볼 비비는 소리!
솟대가 있는 갈대밭에 들어 시인이 읽고 전하는 문장은 셋째 수에 있다. 첫째 수와 둘째 수 종장은 모두 “∼묻혔을까”와 “∼그리움일까”라는 의문사로 어떤 불확실한 정황과 그로인해 부유하는 심경을 드러낸다. 허공의 새처럼 마음 줄 곳 없어 시인은 허공을 보는 걸까. 눈물고름 적셔가던 정 또는 그리움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시인의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은 아닐까.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무작정 길을 나선 건 아닐까.
시적 대상은 시인의 심안에 의해 굴절되고 표상되기 마련이다. 시인 앞에 펼쳐진 세계상은 시인의 감성코드가 선택한 세계상으로 굴절되고 변용되는 것이다.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무작정 나선 길에서 산다는 건 결국 너와 내가 다르지 않아 갈대처럼 “이렇게” “흔들리며 사는 거라” 다시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 여정(旅程)이 정감의 토로이고 발산이고 위무와 치유의 과정이다. <솟대가 있는 갈대밭>은 아름다운 치유의 결과물이다.
호리, 점 하나의 차이
가는 털 호, 다스릴 리 호리(毫釐)는 아주 작은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호리의 차이를 변별해낸다고 할 때 시로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시어를 선택하여 변용하고 변주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이 되기도 하듯이 예술품을 감상하고 변별하는 예리한 감식안을 말하기도 한다.
이 예리한 감식안에 대한 일화로 《어우야담》에는 세종대왕의 그림을 보는 안목을 전하고 있다. 노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밥을 떠먹이는 당대의 명화였는데 대왕은 그 그림을 보고 크게 실격이라 했다.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입을 벌려 받아먹으라는 시늉을 하면서 밥숟가락을 주는데, 그 그림 속의 노인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실격이라 한 것이다. 아! 정말 그렇다. 엄마가 아기에게 밥을 떠먹일 때는 아~ 하면서, 엄마가 입을 벌린 것처럼 아기도 입을 벌려 받아먹으라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리현상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것을 그려내고 놓치고 하는 것이 호리의 차이다. 형상을 그리되 진정을 담아내는 예술가의 정신은 호리의 차이에서 판명난다.
호리의 차이는 예술가의 정신 자세를 다잡는 말이 되기도 하고 예술품의 감식안을 변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글자 한글은 점 하나를 더하거나 빼게 되면 전혀 다른 경지를 가리키는 참 놀랍고도 재미있는 문자다. 우리말 우리글 가운데 특히 고유어를 가지고 시적 탐색을 하는 경우를 본다. 정말 무궁무진한 세계가 열려 있는 것이다.
님 자에 점 하나를 더하면 남이 되지만
분노에 점 하나를 더하면 분뇨가 된다
배신에 몸을 떨다가 똥이 될까 두려워라
— 김복근 〈파자 3―분노〉(《열린시학》 봄호)
정말 그러네! 님 자에 점 하나를 더하면 남이 되네?! 분노에 점 하나를 더하면 분뇨가 되네?! 하! 이 언어 탐색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걸리적거리는 님에 점 하나를 찍어 남이 되게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하하! 그렇다고 분노에 점 하나를 찍어 분뇨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분노는 혼자 삭이면 되지만 점 하나 찍어 분뇨가 되어 번진다면 유쾌하지 못한 사연들은 어찌 하누? 아니나 다를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나를 먹어치울 듯한 분노는 유산균처럼 번지며 커진다. 나를 망가뜨려가는 이 기분이 분뇨 아니고 뭔가. 똥 아니고 뭔가 말이다. 에이! 그러면서 웃음이 난다. 웃음이 자꾸 난다. 꼭 내 이야기를 대신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다. 공감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창의적 서정인 시적 주체의 개별발화지만 누구나 살아가며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그만그만한 시들 가운데 이런 시를 발견하면 기쁘다. 통쾌하다. 언어유희를 한다면 이쯤은 되어야지. 이것은 품격이 다른 말놀이다. 이 작품은 장식적 수사나 동음이의어 또는 이음동의어와 같은 반복적 말놀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생산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사는 동안, 님을 남이 되게 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뇨가 될 수도 있는 분노도 원이불노(怨而不怒), 삭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령 그가 날 배신했다 하더라도 배신자라 원망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삶에 대해 배우는 중이라 삶에 서툴러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용서할 수 있다면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아 두려움도 없으리.
언어 탐색, 갈등의 화해(和諧)
내린 뿌리 한 곳인데 부여잡는 손이 달라 내가 칡넝쿨이면 그대는 등줄기라 내도록 얽히고설켜 풀어갈 길이 없네
천둥번개 치던 날에 뒤틀린 채 잘려나간 그 넝쿨을 만나거든 한번 엮어보시게나 세상에 가장 단단한 동아줄이 또 우리니
— 이승은 〈갈등(葛藤)〉(《시조세계》 봄호)
필사문화 시대의 노래책에서 보이는 우종서(右縱書) 이어쓰기처럼 인쇄문화시대의 오늘날엔 〈갈등〉과 같은 좌횡서(左橫書) 이어쓰기를 종종 본다. 이런 시적 형식은 칡넝쿨과 등줄기가 서로 휘감아 늘어진 모습을 고려한 이어쓰기로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을 소리 내어 읽다보면 자연스레 율독의 질서가 나오고 시조의 정형율격이 드러난다. 첫째 수는 초장 4 4 4 4, 중장 2 5 3 4, 종장 3 5 3 4 둘째 수는 초장 4 4 4 4, 중장 4 4 2 6, 종장 3 5 5 3의 음절량을 보인다. 두 수가 다 초장에서 4음절(4모라) 정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식성은 중장에 와서 2음절과 5음절, 2음절과 6음절의 자재한 음량으로 대상하여 리드미컬한 율동미를 보여준다.
칡 갈, 등나무 등. 이 〈갈등〉은 “칡넝쿨”과 “등줄기”가 빚어낸 문장이다. 칡과 등이 서로 얽혀 사는 모습을 형상하면서 그처럼 “얽히고설켜” 사는 인생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린 뿌리는 한 곳에 있는데 부여잡는 손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사이 어떤 국면!
장파(張法)에 의하면, 질적으로 상이한 요소와 사물 간에는 분명히 대립적이고 배척하는 성질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립하고 배척하는 성질이 있다고 해서 불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여잡는 손이 달라”도, 각기 다른 칡넝쿨이고 등줄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고 다른 양상일 뿐 화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여잡는 손이 달라”도 상반상생(相反相生), ‘유무가 상생하고 쉬움과 어려움이 서로를 이루며, 장단이 서로를 형성하고 고저가 서로 기울이고 음과 성이 어우러지며 앞뒤가 서로 따르는 음악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노자(老子)》).’
각기 다른 것의 공존은 용호상박(龍虎相搏)을 넘어선 어우러짐이요, 화해다. 이렇게 사는 것이란다. 그래서 시인은 잘려나간 넝쿨을 만나거든 한번 엮어보라고 권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아줄이 ‘갈등(葛藤)’이라고. 갈등의 형상은 불화가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사는 한 방식이라고. 다른 손이 맞잡으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아줄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서로 응하고 잘 어울리는 관계의 미학이다. 화해다.
고심참담
한 편의 시가 아무리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적실(適實)한 시어를 활용하지 못했다면 실격이다. 한 편의 시가 아무리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를 갖추었다 해도 고심참담(苦心慘憺) 끝에 나온 창의적 새 목소리가 아니면 실격이다. 한 편의 시가 아무리 당당한 포즈를 가지고 있다 해도 따라가는 후발주자의 모습이 보인다면 실격이다. 나는 고심참담하였는가. 발췌: 월간 《유심》63호 2013년 7월
홍성란 srorchid@daum.net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등이 있고,
시조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시조감상에세이 《하늘의소리, 땅의소리―백팔번뇌》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성균관대 강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