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회 명단 및 과거 경력
(근거 : 사월 혁명회 홈페이지 및 각종 자료, http://rev419.jinbo.net)
제 1부 > 사월 혁명회의 기구 편성 및 주요 인물
사월혁명회 제7기 기구 편성/ 2001년 6월18일 현재
1. 임원
상임의장 황 건
공동의장 김준기 서정복 이낙호 정동익
이사장 이문교
사무총장 노중선
연구소장 정병호
운영위원장 장은기
조국통일위원장 곽태영
감 사 김진균 도강호
2. 평의원
곽태영 김동식 김규철 김길중 김준기 노중선 서정기
서정복 심영호 이낙호 장은기 전종득 정동익 정병호
최영남 한찬욱 홍근수
3. 이사 (이사장: 이문교)
기세환 김승균 김시현 김종대 방국진 유선근 이길재
이문성 이재형 임동규 전재창 조회환 최단옥
4. 연구위원 (연구소장: 정병호)
김국태 김승국 김언호 민충근 박석률 박태순 서정기
송재원 심정수 양재혁 오세철 이융조 이채언 임헌영
전기호 전종득 조영건 주섭일 주재환 최단옥 하일민
5. 운영위원 (위원장: 장은기)
김윤곤 김윤호 김정기 김영철 박영석 박홍섭 박경삼
손병선 심병호 연현배 정중서 조성래
6. 조국통일위원 (위원장: 곽태영)
기세문 김규철 김승균 김장현 김정태 나창순 최영남
정정수 최진호 홍근수 통일역사기행단(단체)
사월혁명회 제7기 기구 편성/ 2004년 7월 현재
1. 임원
상임의장 황 건
공동의장 김준기 노중선 이낙호 이문상 정동익 정병호 최영남
이 사 장 김시현
연구소장 전기호
사무국장 한찬욱
감 사 도강호 이길재
2. 평의원
곽태영 기세문 기세환 김승균 김규철 김동식 김시현
김을수 김장현 김정기 김종대 나창순 노수희 소기수
손병주 서정기 서정복 안현수 유선근 이문교 이 윤
이정태 이재형 임동규 장은기 전기호 전재창 정정수
조순덕 조영건 조회환 주경선 최단옥 최영남 한찬욱
3. 이사
곽태영 기세문 기세환 김승균 김규철 김시현 김을수
김장현 김종대 서정기 서정복 이문교 이재형 임동규
전기호 전재창 최단옥
4. 운영위원회 (위원장: 장은기)
김동식 김신정 김영철 김윤곤 김정기 박홍섭 손병선
심병호 심영호 이문교 전재창 정중서
5. 조국통일위원회(위원장: 곽태영)
곽태영 기세문 기세환 김동식 김규철 김승균 김을수
나창순 이재형 임동규 홍근수
6. 대외협력위원회(위원장: 김종대 )
고혜경 김장현 김종대 김정태 노수희 박경삼 박석률
방국진 소기수 임동규 조순덕 정정수 한주희
7. 연구위원회(위원장: 전기호)
김길중 김승국 민충근 박태순 서정기 서정복 송재원
심정수 안현수 양재혁 이 윤 이융조 이채언 임헌영
전기호 전종득 조영건 조회환 주재환 최단옥
8. 청년위원회(위원장: 주경선)
곽인석 김영일 김진열 노희준 손병주 이정태 정만군
조경래 조동문 주경선 하성완 한찬욱
제 2부 > 사월 혁명회의 주요 인물들(임원, 평의원, 이사, 각종 위원장급)의 과거 전력, 가나다순
A01) 곽태영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평의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회위원장 2004년)"
"출신지 : 전북 김제군 진북면 남산부락"
본명이 아님 , 개명 동기 - 김창룡 살해자 허태영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개명 함.
안두희 습격사건으로유면한 사람임.
A02) 기세문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비전향 장기수
A03) 기세환 "(이사,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2대악법 반대투쟁과 학생민통련, 실록, 민청학련 2 1974년 4월
A04) 김규철 "(평의원,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04 통일선봉대 총대장 김규철 범민련 서울시연합 의장
A05) 김동식 "문학 비평가 (평의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운영위원,조국통일위원, 2004년)"
문학평론가,본명 김남식
A06) 김승균 "1980년대 이후 북한 서적 출판권보유,평통사 고문, 제정위원장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
"출신지 ; 전남 강진, 6.25 전후로 해서 부친에 문제가 있어 경주로 이주 한 것으로 알려 져 있음
윤성식(월북, 전직 4월 혁명회 고문)과 절친한 관계임. 이대 학보사에 있던 최옥자와 결혼
장홍렬이 외삼촌이며 장재식과는 내 6촌 관계, 80년대부터 북한서적 출판권 확보함"
A07) 김시현 "6.3 운동 주동자 (이사, 2001년) (이사장, 평의원, 이사, 2004년)"
6.3운동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수배
A08) 김을수 1961년, 범혁신동지회 간부,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의장, 범혁신동지회사건 1961년 4월 1일 조직된 범혁신동지회의 간부 "
A09) 김정기 제주 4.3 연구소 관련 (운영위원, 2001년) (평의원, 운영위원, 2004년)
제주4.3연구소 4대 이사장에 김정기 전 서원대 총장 선임
A10) 김종대 "민청학련, 1974, (이사, 2001년) (평의원, 이사, 운영위원, 대외협력위원장, 2004년)"
A11) 김준기 "민노당 의원, (공동의장, 평의원, 2001년) (공동의장, 2004년)"
A12) 나창순 "범민련 남측 본부 의장,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조국통일위원, 2004년)"
A13) 노수희 "여중생 범대위 공동대표, 범민련 전국연합 공동의장 (평의원, 대외협력위원, 2004년)"
A14) 노중선 "김진균 장례 위원, 통일뉴스고문 (사무총장, 평의원, 2001년) (공동의장, 2004년)"
A15) 도강호 "민자통 의장(감사, 2001년) (감사, 2004년)"
A16) 서정복 "6.3 운동 주동자 (공동의장, 평의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연구위원 2004년)"
6.3운동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수배
A17) 소기수 "민자통 중안 위원 (평의원, 대외협력위원, 2004년)"
A18) 손병주 "성남 역사 문화 답사회"
A19) 윤성식 "1988년 4월혁명회 설립자 1998년 월북"
"출생지 ; 전남 보성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학위 취득, 동경대 학위 취득,
4.19 이후 민자통 관계, 시청앞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 횃불 데모 주동자"
A20) 이길재 "전 평민당 국회의원(이사, 2001년) (감사, 2004년)"
"기독교 계통 청년단체 관계, 농민단체 관계 함."
A21) 이낙호 "김진균 장례 위원(공동의장, 2001년) (공동의장, 2004년)"
A22) 이문교 "김진균 장례 위원(이사장, 2001년) (평의원, 이사, 운영위원회, 2004년)"
A23) 전기호 "(연구위원, 2001년) (연구소장, 평의원, 이사, 연구위원, 2004년)"
제주 4.3연구 / 역사비평사 , 삼일절 기념 민족문제 연구소 학술심포지음 발표문
A24) 정동익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감사 (공동의장, 평의원, 2001년) (공동의장, 2004년)"
"전주 고 출신, 곽태영과 친밀함. 동아일보 특위 출신 급진적 성향"
A25) 정병호 "(연구소장, 평의원, 2001년) (공동의장, 2004년)"
춤추는 최승희 저자 ? , 창작과 비평사
A26) 최영남 "김진균 장례위원(평의원, 조국통일위원, 2001년) (공동의장, 평의원, 2004년)"
A27) 한찬욱 "통일연대지도위원(평의원, 2001년) (사무국장, 평의원, 청년위원, 2004년)"
A28) 하일민 "6.3 운동 주동자(연구위원, 2001년)"
6.3운동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수배
A29) 홍근수 "평-통-사람들 상임대표 (평의원, 조국통일위원, 2001년) (조국통일위원, 2004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향린교회
A30) 황건 "6.3 운동 주동자(상임의장, 2001년) (상임의장, 2004년)"
6.3운동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수배
제 3부 > 사월 혁명회의 인물들, 주로 각종 위원회 위원급 : 대외 전력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B01) 고혜경 "(대외협력위원, 2004년)"
B02) 곽인석 "(청년위원, 2004년)"
B03) 김국태 "(연구위원, 2001년)"
B04) 김길중 "(평의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05) 김승국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06) 김신정 "(운영위원, 2004년)"
B07) 김언호 "(연구위원, 2001년)"
B08) 김영일 "(청년위원, 2004년)"
B09) 김영철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10) 김윤곤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11) 김윤호 "(운영위원, 2001년)"
B12) 김장현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대외협력위원, 2004년)"
B13) 김정태 "(조국통일위원, 2001년) (대외협력위원, 2004년)"
B14) 김진균 "(감사, 2001년)", 사월 혁명회 주요 거물급 인물들이 김진균 사후, 김진균 장례위원회 구성..!!
B15) 김진열 "(청년위원, 2004년)"
B16) 노희준 "(청년위원, 2004년)"
B17) 단체 "(조국통일위원, 2001년)"
B18) 민충근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19) 박경삼 "(운영위원, 2001년) (대외협력위원, 2004년)"
B20) 박석률 "(연구위원, 2001년) (대외협력위원, 2004년)"
B21) 박영석 "(운영위원, 2001년)"
B22) 박태순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23) 박홍섭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24) 방국진 "(이사, 2001년) (대외협력위원, 2004년)", 김희선 남편, 한국 원자력 산업회 부회장
B25) 서정기 "(평의원, 연구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연구위원, 2004년)"
B26) 손병선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27) 손병주 "(평의원, 청년위원, 2004년)"
B28) 송재원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29) 심병호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30) 심영호 "(평의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31) 심정수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32) 안현수 "(평의원, 연구위원, 2004년)"
B33) 양재혁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34) 연현배 "(운영위원, 2001년)"
B35) 오세철 "(연구위원, 2001년)"
B36) 유선근 "(이사, 2001년) (평의원, 2004년)"
B37) 이낙호 "(평의원, 2001년)"
B38) 이윤 "(평의원, 연구위원, 2004년)"
B39) 이융조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40) 이재형 "(이사,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2004년)"
B41) 이정태 "(평의원, 청년위원, 2004년)"
B42) 이채언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43) 임동규 "(이사, 2001년) (평의원, 이사, 조국통일위원, 대외협력위원, 2004년)"
B44) 임헌영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현 민족문제 연구소장
B45) 장은기 "(운영위원장, 2001년) (평의원, 운영위원장, 2004년)"
B46) 전재창 "(이사, 2001년) (평의원, 이사, 운영위원, 2004년)"
B47) 전종득 "(평의원,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48) 정만군 "(청년위원, 2004년)"
B49) 정정수 "(조국통일위원, 2001년) (평의원, 대외협력위원, 2004년)"
B50) 정중서 "(운영위원, 2001년) (운영위원, 2004년)"
B51) 조경래 "(청년위원, 2004년)"
B52) 조동문 "(청년위원, 2004년)"
B53) 조성래 "(운영위원, 2001년)"
B54) 조순덕 "(평의원, 대외협력위원, 2004년)"
B55) 조영건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56) 조영건 "(평의원, 연구위원, 2004년)"
B57) 조회환 "(이사, 2001년) (평의원, 연구위원, 2004년)"
B58) 주경선 "(평의원, 2004년) (청년위원, 2004년)"
B59) 주섭일 "(연구위원, 2001년)"
B60) 주재환 "(연구위원, 2001년) (연구위원, 2004년)"
B61) 최단옥 "(이사, 연구위원, 2001년) (평의원, 이사, 연구위원, 2004년)"
B62) 최진호 "(조국통일위원, 2001년)"
B63) 하성완 "(청년위원, 2004년)"
B64) 한주희 "(대외협력위원, 2004년)"
제 4부 > 사월 혁명회상 역대 수상자 명단
제1회 (1990년) - (김주열 모), (전태일 모), 장준하
제2회 (1991년) - 이수병(추서)
제3회 (1992년) - 김상진(추서), 문익환
제4회 (1993년) - 유가협(단체), 전교조(단체), 임종석
제5회 (1994년) - 민가협(단체), 임수경
제6회 (1995년) - 윤상원(추서), 신창균
제7회 (1996년) - 단병호
제8회 (1997년) - 민주노총(단체)
제9회 (1998년) - 서준식
제10회 (1999년) - 이기형
제11회 (2000년) - 권오헌
제12회 (2001년) - 매향리주민대책위원회(단체)
제13회 (2002년) - 전농(단체), 이종린
제14회 (2003년) - 여중생 범대위(단체)
제 5부 > 사월 혁명회 부설 민족학교 출강자 명단 및 강의 내용
4월혁명의 참뜻을 펼치고 21세기 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회원들의 뜻을 모아 개설한 사월혁명회 민족학교는 연 4회, 매 기마다 10일 15강(매주 목요일)으로 구성하여 진행하게 됩니다.
10월25일에 시작된 제1기 교육과정에는 새시대 역군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35명의 수강자들이 등록하였습니다. 이날 개강식에는 이종린(번민련), 오종렬(전국연합), 홍근수(자통협), 박정기(유가협) 선생님을 비롯하여 민가협, 민자통, 전민동 등 여러 민족민주단체의 어르신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셨습니다.
강사진은 노동, 농민, 시민, 언론, 인권, 통일운동 등 민족민주 단체의 대표적 실천이론가들과 본회 회원들로 구성하였습니다. 제2기 교육은 2002년 2 - 4월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제1기 교육과정 강의 일정>
날 짜 제 목 강 사
10/25(목) 1. 4월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황 건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2. 4월혁명의 정치경제적 의미 정병호(사월혁명회 연구소장)
11/1 (목) 3. 민족민주운동의 당면과제 이천재(전국연합 공동의장)
4. 국가보안법 철폐운동 권오헌(민가협양심수후원회장)
11/8 (목) 5. 한국언론의 현실과 개혁 정동익(사월혁명회 공동의장)
6.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이문상(사월혁명회 연구위원)
11/15(목) 7. 노동운동의 과제와 전망 허영구(민주노총 부위원장)
11/20(화) 8. 시민운동의 현황과 전망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9. 박정희 반대운동과 민족정기 곽태영(박정희기념반대상임대표)
11/24(토) 10. M/T(민민운동가의 품성) 임방규(통일광장 공동대표)
11/29(목) 11.농업문제의 이해와 농민운동 김준기(사월혁명회 공동의장)
12. 통일방안의 변천사 노중선(사월혁명회 사무총장)
12/6 (목) 13.현단계 통일운동의 과제 민경우(범민련 사무처장)
12/13(목) 14. 주한미군문제의 어제와 오늘 김종일(자통협 사무처장)
12/20(목) 15. (특강) 한반도 통일정세와 김남식(통일뉴스 상임고문)
민족의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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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시간:오후 6시30분-8시30분
장 소:전통문화센터 (낙원동)
연 락 처:사월혁명회 (전화:722-3630 팩스:722-3687)
1기 <졸 업 자>
곽신도 곽인석 곽태영 김정숙 김종대 김종만 박정철 방영숙 서경순
소기수 오영순 오영자 유민호 유선근 윤진수 이 영 이 진 이귀님
이군례 이낙호 이순영 이정임 임화진 장인선 정애경 정행균 조순덕
최용철 한주희 한준구 (30명)
<개 근 상> 유선근 이귀님 이순영 이정임 한준희
<정 근 상> 곽신도 곽태영 방영숙 유민호 이 영 이낙호 조순덕
최용철
<민족학교상> 이낙호
민족학교 제2기 교육과정
2/21(목) 개강식
민족민주운동의 진로 오종렬(전국연합 상임의장)
2/28(목) 민족과 계급문제 김승호(민주노조운동연구소 이사장)
언어제국주의와 우리말 김영명(한림대 교수)
3/ 7(목) 노동운동의 당면과제 김금수(한국노동사회연구원 이사장)
노동운동의 역사적 배경 전기호(경희대 교수)
3/14(목) 농민운동과 통일운동 정현찬(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민족언론의 진로 성유보(민언련 이사장)
3/19(화) 21세기 사회운동 김진균(서울대 교수)
진보정당운동의 전망과 과제 천영세(민주노동당 부대표)
3/23(토) 운동가의 품성 -수련회- 이낙호(사월혁명회 공동의장)
3/28(목) 반외세와 민족문화 남정현(작가)
세계화와 패권주의의 동향 주섭일(내일신문 주간)
4/ 4(목) 통일운동의 변천 과정과 과제 김규철(범민련 남본 부의장)
4/11(목) 외세와 자주통일의 과제 홍근수(자통협 상임대표)
4/18(목) <특강> 4월혁명과 민족정신 한상범(동국대학 명예교수)
4기 교육과정의 과목과 강사는 다음과 같다.
민족과 민족주의 김남식(통일뉴스 상임고문)
민족문화론 남정현(작가)
세계화와 민족문제 김승호(민주노조운동연구소이사장)
민족교육의 과제 신연식(전교조 통일위원장)
노동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 이원보(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민족민주운동사 박세길(전국연합 기획위원장)
민족언론의 현실과 개혁 정동익(사월혁명회 공동의장)
4월혁명의 의의 도강호(민자통 상임의장)
농민운동의 역사와 과제 김준기(사월혁명회 공동의장)
통일운동사 노중선(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여성운동의 현주소 이미혜(반미여성회 회장)
국가보안법 권오헌(민가협양심수후원회장)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 이문상(사월혁명회 이사)
민족자주와 주한미군 김종일(자통협 사무처장)
6.15공동선언 해설 김세창(범민련 조직위원장)
구시대 잔재청산과 4월혁명 정신 한상범(의문사진상규명위 위원장)
제 6부 > 4.19 혁명에 대한 이들의 역사관/정치적 관점
<참고> 4월 혁명회 : http://rev419.jinbo.net, 과거의 4월(419) 혁명 연구소
[주소] 서울 중구 정동 11-3 풍전빌딩 602호
[전화/팩스] 02-776-3630 /02-776-3687 [E-mail]rev419@chollian.net
<참고> 4.19 민주 혁명회 : http://www.419revolution.org/
4.19 민주 혁명회, 4.19 혁명 희생자 유족회, 4.19 혁명 기타단체, 4.19 혁명 분향소를
포함하는 공식 4.19 혁명 기념 단체
[주소] 서울 종로구 평동 166번지 4.19 혁명 기념회관
[전화/팩스] 02-737-1040 /02-737-1043
4월혁명의 정치경제적 의미 : 정 병 호 (사월혁명회 연구소장)
마티에(A.Mathiez)는 "참다운 혁명은 정치형태와 정부의정부의 집권자를 변경할뿐만 아니라 사회제도를 변경하여 재산의 위치를 변경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정치변혁과 사회변혁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계급혁명은 유해한 지배계급을 사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소렐(G.Sorel)은 "계급혁명이란 무익하고 유해한 분자를 추방하는 사회혁명이다."라고 한다. 그외 많은 학자들이 계급혁명을 소개하고 있으나 가장 핵심적 주장은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된다. 맑스에 의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풀기 위해, 나아가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간의 대립 속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본다.
엥겔스(F.Engels)는 "지배계급을 물리친 다른 계급적 지배"를, 카우츠키(K.Kautsky)는 "과거 종속적이었던 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 사회의 법적, 정치적 상층구조 특히 재산관계의 변혁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론에 앞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4월혁명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좀더 넓혀 보자는 것이다. 4월혁명은 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한 이론을 동원해 접근하고 있다.
첫째, 이승만은 철저히 사인적 권위주의체계(Privatized or Personalized authoritarianism)를 추구하였다. 민중을 억압하면 자기 개인적 권력욕을 추구해 왔었다.
둘째, 민중의 빈곤과 가난을 권력조작에 이용해 왔다. 아직 정상적인 민주주의로 가기에는 멀었다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부정투표의 관행화, 관권선거, 환표등으로 민주주의 기본을 배제해 왔다. 이로써 내재적 혁명의 씨앗을 키워왔다.
셋째, 6.25 참상을 겪은 민중에게 갖가지 반공의식 교육과 진보당 탄압, 반공관련법령의 제정등으로 반공규율사회를 축성해 왔다. 각종 정치파동때마다 경찰, 반공청년단, 백골단, 땃벌떼등이 동원되었다. 억압적 국가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를 총동원하여 민중을 반공망속에 가두어 두었다.
넷째, 이러한 반공규율 사회는 보수적 논리의 타당성만을 용인함으로써 진보적 정향을 차단하는 정치문화의 파행성을 노정시켰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전상국가가 아닌 예외국가, 국가주체가 없는 국가객체만이 존재하는 기형성을 보여주었다.
먼저 앞서 살펴 본바와 같이 이승만 정권은 사인권위주의에 얽매이고, 민중배제적 권력을 일삼으면서 반공규율사회를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결국 민주주의 정도로부터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구조가 하부구조인 경제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부구조는 대외종속과 빈부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승만정권은 하부구조의 병리현상을 담지하고 있는 관료매판자본과 짝을 이루면서 반민중정권을 유지하려 한 성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부정한 자본과 부정한 정권의 공생이 4.19 당시의 한국사회구성체였다. 여기서 학생들은 읽어 내기를 민족자립경제와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하부구조를 이루고 그에 상응한 정치민주화 지향세력이 상부구조를 이루는 것을 열망하는 혁명을 의욕했던 것이다.
여기서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정통 맑시즘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이 말은 옹호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하더라도 혁명사태를 설명하는데는 많은 예외적 조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요제프마저도 상부구조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본다. 즉 사상교육이 하부구조를 개혁한다는 의미다. 알튀세(Althusser), 플랑차스(Poulantsas), 그람시(Gramsci)등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간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상부구조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본다.
구시대 잔재의 청산과 4월혁명 정신 : 한 상 범(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1. 역사에는「무임승차」가 없다.
우리는 근대시민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공세 앞에서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었다. 서방의 근대화의 개혁을 앞서 간 일본에게 예속되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잠자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 영정조 시대의 실학(實學)은 백성을 위함과 이용후생의 과학과 정책을 탐구해서 후에 개화운동의 길을 텄다. (2) 19세기 농민해방의 운동의 정신적 본향이 된 동학이 농민전쟁의 불을 붙였다. (3) 서양에서 전래된 기독교가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을 뜨게 해서 서양의 문물을 통해 민권을 일깨웠다.
그런데 그러한 운동이 혁명적 역량으로 결집되어 동원되는데 미숙하였던 우리의 한계 때문에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서방식 시민혁명을 피해서 왕권중심의 군사국가로서 서구 제국주의의 대열에 듦으로써 근대화에 성공한 듯 했으나 결국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 전락해 자폭하기에 이르게된다. 혁명을 회피한 보수 반동의 한계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의 역사를 봐도 1919년의 3 1운동과 1945년의 해방이란 일대 전기를 겪지만, 시민혁명이나 그에 준할만한 변혁을 겪지 못한 채 분단국가에서 독재정치로 한계상황에 머물게 된다.
결국 봉건왕조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관료주의와 신분질서란 위계의식을 타파하고 식민지 잔재인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로선 민주주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하지 못하고선 관료지배의 국가, 경찰국가, 군사정권의 지배구조, 특권재벌과 유착한 부패정치인과 관료가 지배하는 개발독재의 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혁명을 통해 쟁취되는 정신과 제도인 자유정신과 민주제도를 공짜로 얻어낼 순 없다는 역사의 진실을 우리는 교훈으로 해서 크게 배워야 한다. 이 문제의식에 대해 인식이나 이해조차 안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방치되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
2. 4월혁명의 진실과 그 후의 역사적 전환기에 제기된 문제들
1) 4월혁명과 민족 민주의 문제
1960년 3 15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로부터 발단되어 영구집권을 지속할 듯 위세가 등등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월혁명은 무엇인가? 왜 그토록 이승만 정권의 폭정에 항거하게 되었나? 당시의 사정을 보면 정부반대 시위는 빨갱이로 몰리고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나라님에 대한 반역으로 몰리는 경찰국가이고 전제정권이었다. 그런데 무슨 용기로 맨주먹으로 들고일어났는가?
이승만의 폭정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이 이어오면서 친일파와 모리배, 정상배와 기회주의자와 정권 주변에서 날뛴 무리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김구선생으로부터 조봉암 당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인사를 공연히 학살하는 것을 보아왔다. 특히 1950년 전쟁당시의 이승만의 국민학살극은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긴급명령 1호(1950. 6. 25)에 의한 단심 군사재판 처형, 국민방위군 사건(1950), 거창 등지에서 양민학살...... 무수한 학살극을 보아왔다.
특히 나라님이란 이승만의 전제군주, 또는 폭군과 같은 군림은 눈을 뜨기 시작한 청년들에겐 더 이상 통할 수 없었다.
4 19의 혁명은 민족반역자가 반공을 내세우며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탄압체제를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민중의 자연발생적 항거였다.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희생된 피해자의 대표적 사례를 보자.
(1) 민족통일운동자의 암살 : 김구 선생
(2) 혁신 반독재운동으로 살해당한 예 : 조봉암 당수와 진보당
(3) 이승만 정권의 무능 부패로 인한 희생자 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 사 망자인 몇 만명의 아사자 동사자 병사자가 된 청장년
(4) 좌경 용공의 혐의로 피살된 자 : 보도연맹원 몇 십만, 빨치산 은거지 역 주민으로 피살된 거창 등의 양민
(5) 이승만으로부터 이탈 배신했다고 살해당한 예 : 서북청년단 간부 문 봉제는 조봉암 지지로 돌아섰다고 이승만 특명으로 헌병 총사령관 원 용덕이 직접 살해
위와 같이 유명인사로부터 이름 없는 무고한 국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유로 피해자가 되었다. 따라서 절대다수 대중은 피해대중으로서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경찰국가적 탄압체제에 살면서도 민족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의식을 간직한 채 선거부정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60년 학생봉기로 시작된 4 19 혁명은 서구식 시민혁명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고 또 시민적 발전의 배경의 취약성으로 인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정치적인 이니시아티브를 장악할 정도로 조직화와 투쟁성이 미숙하였기 때문에 이정권의 식민잔재나 반민주적 인적 잔재의 청산에 미약했었다.
2) 4 19 정신과 반혁명으로 5 16 쿠데타
1960년의 4월혁명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5년에 이르는 세월을 친일반민족 세력의 지배와 분단 및 전쟁의 민족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각된 민중의 궐기를 통한 문제 제기였다.
이승만 퇴진 이후에 제기된 문제를 주요항목별로 정리해 보자.
(1) 민주반역자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과 재산환수(1960년 4차 개헌)
(2) 억눌려 왔던 평화통일 논의의 대중적 제기와 통일운동의 확산
(3) 혁신운동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의 활성화
(4) 보도연맹원 유족 등 피살자 가족의 문제 제기
(5)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자각의 확산과 대중화 및 관료기구의
반민주성 극복(예 : 경찰 중립화)의 움직임
위와 같은 민족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을 용공 좌경이라고 해서 반발, 제압하는 정치공세가 1961년 5 16의 쿠데타였다. 이러한 반혁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민족 민주에의 절호의 기회를 무산 좌절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1961년 5 16 쿠데타는 결국 4월혁명의 성과와 그 진로를 전면적으로 부인 거부하는 수구 반혁명세력의 반격이었다.
1961년을 기점으로 군사정권의 등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에도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의 등장으로 1993년까지 이어졌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등장하면서「문민정부」를 자처했지만, 태생적 한계를 지닌 군사정부가 낳은 혼혈아 격이 되었다. 다만 YS정권 당시에 공직자 재산공개와 실명제의 실시, 군내의 사조직 하나회 해체,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반란과 내란의 죄에 대한 단죄 등은 일보 전진을 뜻하는 실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군사정부의 지배가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우선 정리해 보자. 먼저 군정지배자는 국민을「시민」으 로서 보기보다는 자기부하인「이등병」으 로 보고 국가를 병영화시켰다. 이승만 독재가 국민을 봉건사회의 우민으로 봐서 경찰국가로서 국가를 감옥화시킨 것에서 더욱 질적으로 악화시켰다.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강압적인 지배는 계엄령과 긴급조치(긴급명령)에 의한 지배이고 정보기관의 감시 통제를 내용으로 했다. 정치는 행정으로 대체되고, 정치갈등의 해소는 정보공작과 모략 또는 기습적 무력행사(계엄선포) 등으로 정적을 제압, 소멸시키는 군사작전이 되었다. 이러한 군정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괴뢰국에 대한 일제 관동군의 관리를 모방하고 여기에 더욱 혹독한 매카시즘이 혼유된 탄압체제였다.
3) 4 19정신을 통한 민족정기와 시민정신의 계승
4월혁명은 친일파 지배의 반민족성, 반통일성, 사대의존성에 대한 반대와 민족자주성과 평화통일을 통한 분단극복의 민족노선을 확인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우리 민족은 1950년 전쟁을 통해서 전쟁 자체의 무모함과 반민족성을 실감했다. 특히 한반도에서 무력통일이란 시도는 어느 세력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1953년 7월의 정전협정이 증명했다.
그리고 통일을 반대하는 내외의 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끔 역사적 교훈을 주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점을 알아야만 4월혁명 후의 노도같이 일어난 통일에의 열기와 그 운동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동족간의 자멸적 전쟁의 선동으로 누가 어떻게 이익을 보는가 하는 정치적 자각도 점차로 일깨워 가고 있었다.
다음에 4 19의 정신은 독재나 봉건적 왕조식의 전제주의 등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의 지배를 반대하는 시민의 민주화 운동으로의 전진이었다. 우리 민족이 1919년 3 1운동에서「민주공화제」를 입국이념으로 한 이래 참으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각된 성숙의 산물이 4 19혁명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4 19혁명의 정치적 주체의 정치적 성숙이 미숙하였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가 되고 있다.
4) 4월혁명과 민주 복지사회로의 문제 제기
자유당 정권은 반동적 친일파지배의 전제주의적 지배구조인「나라님」과 「나리님」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이나 당파를 용공 좌경 빨갱이로 몰아 부쳐서 탄압하는 매카시즘으로 대응해 왔다. 그래서 결국 민주사회주의 정도의 정치강령도 빨갛게 칠해서 감옥과 교수대로 몰았다.
자칭「자유민주주의」이 고 「자유 세계」를 내세웠지만, 어디에도 자유는 없고 민주도 없었다. 자유와 민주의 핵심이 인간 존엄을 전제로 한 사상 양심 신조 및 세계관의 자유이고 기성권위에 대해 반대하는 자유와 권리가 인정되는 것이 민주제도인데, 어디에도 그러한 흔적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산업사회에서 사회복지와 노동권을 적대시하는 국가는 군사독재국가 이외엔 없다. 자본주의에서 수정 자본주의의 시대가 된 것이 20세기 후반의 기정 사실인데, 빨갱이 타령을 하면서 부를 독점한 모리배와 정상배들의 정권을 고집해 온 것이 이승만 정권의 실상이다.
이승만 이후의 군사정권도 모리배와 정상배, 일부 고급관료와 정치군인이 지배하는 개발독재로서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개발을 추진하는 권위주의 체제였다.
1960년 4월혁명에서 시대의 목소리가 전달되었듯이 사회복지와 노동자의 권익은 존중 및 실현이 당연한 것이다.
지금 21세기의 정보기술혁명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어떠한 국가를 세워나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민족과 시민이란 주체가 주인이 되는 민족 민주 복지국가여야 한다. 4월의 정신에서 눈뜨기 시작한 우리의 정치 사회의식을 누가 어떻게 이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오늘의 과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