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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관련하여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만 역시나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규장각의 분소라고 할 수 있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된 의궤 297책을 약탈하여 가서 현재까지도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면서 돌려주지 않고 있다.
(위) 외규장각 주변의 프랑스 군인들 (19쪽)
(아래) 현재 규장각 서고 내부 (20쪽)
'문화연대'는 이러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프랑스 행정법원에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가 1심에서 패하고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1심에서 프랑스 행정법원은 '약탈'임을 인정하면서도 현재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으므로 자기들 재산이라고 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렸다. 문화국가는 허울뿐이다. 프랑스의 오만함과 제국주의의 악령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언젠가는 꼭 돌려받아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규장각은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한 정조가 그 일환으로 지은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역대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 중심 기관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재들, 즉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파나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젊고 참신하며 능력 있는 인재들을 불러모아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이용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겨,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御製, 왕들이 직접 지은 글), 어필(御筆, 왕이 쓴 글씨)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의 주요 전적을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규장각이라는 곳이 우리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책은 총 7개의 장에서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15년간 규장각 연구원으로 활동한 지은이는 어필, 온양별궁전도 등과 같은 기록화, 노걸대, 박통사, 첩해신어, 통문관지 등 외국어 학습서, 북학의, 열하일기 등 외국문물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대동여지도 등의 지도와 지리지, 세계적 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국가의 공식 연대기를 비롯하여 국가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오늘날 백과사전과 같은 지봉유설, 유원총보,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남명집, 중인들의 삶을 기록한 규사, 호산외기, 이향견문록, 소대풍요 등 조선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을 풍부한 사진과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 내고 있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땀이 배어 나와야 가능한 것이며, 또한 정신과 혼이 묻어나야 한다. 규장각에서 찾아낸 선조들의 유물은 명품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할 정도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굴이자 우리들의 정신이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다듬어야 할 유산이다. 그리고 후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외규장각 도서처럼 외국으로 반출된 유물은 반드시 반환 받아야 한다. 이는 우리의 정신을 도난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올해 유난히 멀게만 느껴지던 봄. 가족들과 연인들과 나들이를 하기 좋은 계절이다. 놀이공원이나 영화관도 좋지만, 모처럼 시간을 내어 가까운 박물관 등을 찾아 보는 건 어떨까. 선조들이 남긴 명품은 보관만 한다고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주 찾아보고 우리가 그 가치를 이해하고 느낄 때만 진정한 명품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선조들의 숨결을 찾아 먼 시간여행을 해보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소중한 현재의 기록물이다. 규장각에 보관된 우리의 유산과 정신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둔 정성이 가득 들어간 책이다.
한양 한복판에 개천(청계천)을 처음 뚫은 왕은 태종이었다
1782년 2월, 그동안 정조의 비상한 관심 아래 추진돼온 ‘강화도 외규장각의 공사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을 것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주요 서적들이 더 체계적으로 보관되었으며, 이후 100여 년간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 문화의 보고로 자리 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강화 행궁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 관련 자료들이 별고別庫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더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이들 자료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위치하면서 조선 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것을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17쪽)
그러나 외규장각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되었으며, 당시 프랑스 군이 약탈해간 의궤 297책은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약탈된 의궤는 아픈 역사를 겪어야 했던 조선 왕조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규장각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폐지되었다. 1908년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던 규장각 도서들은 잠시 이왕직李王職(일제시대 궁내부)에서 관리하다가 1911년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 옮겨졌다. 규장각 도서들이 일제의 관리하에 들어가는 불운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를 경성제국대학에서 관리하게 했다. 일제는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로 여겼기에 경성제국대학에 이관시켰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규장각 도서 역시 일제의 관리에서 벗어난 '해방'을 맞이했다. 규장각 도서는 1946년 경성제국대학을 승계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서울대학교에서도 오랫동안 도서관 소속으로 있다가 1992년 독립 건물을 지으면서 지금의 '서울대학교 규장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6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의 한국학 연구 기능을 합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출범하였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국보 및 보물을 포함한 26만여 점의 고도서, 고문서, 고지도, 정부기록류, 책판 등을 소장하고 있다. (20쪽)
19세기 조선시대를 보는 눈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민란이 곳곳에서 발생한 '어두운 시대'로 이해하곤 한다. 물론 19세기 조선 사회가 순조, 헌종, 철종 등 어리거나 힘없는 왕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본격화되고 외척이 힘이 커지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18세기까지 번성하던 사회가 불과 몇 년 만에 몰락해버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19세기 한양의 문물제도와 풍습을 노래한 <한양가>는 19세기 조선 사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11쪽)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이란 뜻으로, 반차도는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결혼식 기념사진이나 비디오테이프와 같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이 아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했다. 마치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사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 같은 성격을 띠었다. (277쪽)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박지원 등이 참여한 시 모임의 이름이 '백탑지사'였는데 이들의 집이 대개 백탑 근처였고 그곳에 모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탑골공원에 있는 백탑, 곧 원각사지 10층 석탑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8세기 탑골공원 일대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젊은 학자들의 중심 공간이었다. (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