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유(逍遙遊)는 소요(逍遙)와 유(遊)의 합성어
이다.
소요는 옛 사람들이 정자와 산의 이름에도 붙힌 단
어로 「장자」보다 앞서 저술된 「시경」에서도
몇 차례 등장한다.
소요(逍遙)의 뜻은 갖가지 사람들과 얽혀 일하되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여유작작한 모습이다.
쉽게 말하자면 "할 일 없이 왔다갔다 어슬렁 거리며
노닐다." "목적지 없이 거닐다." 라는 의미로
목적지 없이 거닌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遊)의 뜻 역시 "노닐다, 놀다, 이리저리 돌아다
니다." 이다.
이를 통해 장자는 머물거나 돌아가야 할 집보다는
돌아다니는 길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길은 곧 '도(道)'이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팔자 좋게 이리저
리 돌아다니는 것으로만 국한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는 무대의 소요를 누리려면 무명, 무공, 무기해야
한다.
즉,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되 자연의 규율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소요유를 누리는 사람이 진인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진인이라야 소요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번 날면 육 개월을 나는 붕새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동양사상
“등 길이가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있었지. 붕이라는 새지. 이 녀석은 한 번 날아오르기 위해 날갯짓을 하면 구천 리나 높이 날아오르는데 그때는 바닷물이 삼천 리나 튈 정도로 장관이지. 그리고 한 번 날면 육 개월을 쉬지 않고 날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동양사상’을 쓰다 보니 이 부분을 처음 읽었던 대학 강의실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기이한 표현인지라 장자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인간이 지닌 자유가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하게 펼쳐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요.
절대적인 자유, 어떤 인간적인 목적조차 거부하는 절대의 자유, 그런 것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그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습니다.
장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상대적인 두 상황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작은 그릇에 담긴 물에는 갈댓잎이나 띄울 수 있을 뿐이지. 커다란 배를 띄우려면 물이 깊어야 하지 않겠나? 바람이 작으면 커다란 새도 무력하게 엎드려 있을 뿐이지. 하지만 거대한 바람을 타고 창공을 향해 떠오르면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마음껏 날 수 있지.”
얼핏 보면 장자는 무척 허황된 생각을 지닌 사람처럼만 보입니다. 현실 생활에 있어야 할 섬세한 관찰이 부족한 사람처럼도 보이고요.
하지만 장자는 눈에 늘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은 사실 현실적인 것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과정에서 얻어 낸 것들이었습니다.
즉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예리한 눈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명한 비유인 ‘포정의 소 잡는 이야기’를 통해서 말입니다.(포정, 마음으로 소를 잡다)
소를 잡는 포정이 양나라의 혜왕 앞에서 직접 소를 잡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 솜씨가 무척 비범했습니다.
손으로 소의 뺨을 쓰다듬고 어깨로 떠받치는 동작, 그리고 발걸음을 떼는 과정, 적절하게 구부리는 무릎의 동작들은 마치 우아한 궁중 음악과 어우러진 한판의 춤사위와 들어맞는 듯했습니다.
넋이 나간 듯 그 모습을 보던 혜왕이 더듬거리며 말을 건넵니다.
“그, 그거, 그런 기술을 도대체 어떻게 터득했소?”
“허허, 이건 기술을 뛰어넘는 경지의 것입니다.”
“기술을 뛰어넘어? 그게 뭔가?”
“‘도’라고 부르지요.”
“‘도’?”
‘도’라는 말에 혜왕은 조금 멈칫했습니다. ‘도’라는 말은 그때 중원에 유행하던 말인지라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노자라는 인물이 만들어 낸 말인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설명들이 있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인위적인 억지를 버리고 순리를 따르라는 뜻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을 왕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도’라면 그 순리를 따르라는 노자인가 뭔가 하는 사내의 그 ‘도’요?”
“그런 셈이지요. 제 말씀을 들어 보시지요.”
“그러세.”
“기술을 넘어서는 ‘도’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 앞에 섰을 때는 온통 소의 모습만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렇게 한 3년 지나니 소의 외형뿐 아니라 다른 것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뭐가 보였소?”
“소의 속 근육과 뼈입니다.”
“그걸 볼 수 있소?”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볼 수 있지요.”
“오, 마음으로?”
“이제 소를 잡을 때는 촉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가 만들어진 원리를 생각하며 뼈와 뼈의 틈새로 칼을 집어넣고 빈 공간을 따라갈 뿐입니다. 해서 지금껏 한 번도 인대를 건드려 벤 적이 없습니다.”
“신비한 능력이로군.”
“보통 백정들은 칼을 한 달에 한 자루씩 쓰지요.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이 일 년에 한 자루를 쓰고요. 모두 근육과 뼈에 칼이 상하기 때문이지요.”
“그럼 자네는?”
“저는 19년째 이 칼 한 자루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껏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은 방금 숫돌에 간 듯 날카롭습니다.”
“대단허이.”
“칼은 칼의 길이 있습니다. 칼날을 소의 뼈와 뼈, 힘줄과 힘줄 사이로 움직이다 보면 소도 자신이 죽어 가는 줄을 모른 채 서 있게 되지요. 그러고는 마침내 모든 부위가 갈라지면서 흙더미처럼 털썩 주저앉게 되지요.”
“설명을 듣고 보니 참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터득한 듯 싶소.”
이 우화는 하나의 기술이 마음과 합치되면서 예술적인 경지로까지 오를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도’는 깊은 집중력의 마음과 노력의 결과인 현실적 기술이 연결된 경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도’는 노자의 그것과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노자에게 물어보니)
노자의 도는 인위적인 억지를 배제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현실 생활에서는 철저하게 도피하고 은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반면에 장자는 노자처럼 인위적인 억지는 배제하지만 현실 속에서 뭔가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때문에 여전히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고 인위적인 행동을 배격하지만 노자처럼 저잣거리를 떠나 숲으로, 자연 속으로 숨어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