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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제129회 나주답사. 2010년 6월12일 토요일 간간히 비 내림.
약간 흐린 날씨에도 많이 참여하신 회원님들과 미륵사지 팀을 만나 익산시청 앞에서 오전 8시에 나주로 출발했다.10시 30분 나주목문화관에 도착, 오늘 나주를 해설해줄 부담 없고 수더분하신 시청 문화재관리팀장 김종순(나주시청학예연구사)께서 나와 계셔 우리를 반겨주셨다. 답사에 참여하신 회원님들은 이택회회장님, 류재일부회장님, 박용자부회장님,최곤석재무님, 권정하, 김관태, 김소현, 김영자, 김이화, 박광자, 박영애, 배홍선, 안장숙, 이귀희, 이윤옥, 이종범, 전창기, 채승묵, 채암석, 최옥님 회원님들께서 참여하셨다. 우리는 먼저 나주시와 답사코스를 알아보자. 나주목문화관→나주목관아(객사)→점심(나주곰탕)→나주향교→나주복암리고분, 반남고분군 →불회사를 끝으로 오늘의 답사를 즐겁고 행복하게 마쳤다.
나주시[羅州市]
전라남도 중서부 전남평야(나주평야)의 중앙에 있는 시로. 면적은 603.88㎢, 행정구분 1읍 12면 6동이 있다. 꽃 ; 배꽃, 나무 ; 은행나무, 새 ; 비둘기 인구 ; 96,670 명(2007년 기준), 가구수 ; 41,277 세대(2007년 기준) 1981년 7월 1일 나주읍과 영산포읍 일부가 통합되어 금성시가 되었다. 1986년에 나주시로 개칭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나주군과 통합하였다. 2003년 2월 현재 남평읍과 12개면 6개동을 관할한다. 나주 특산물인 나주배와 영산강을 형상화시킨 심벌마크가 있으며, 나주배를 의인화시킨 마스코트가 있다. 또한 목마른 나그네에게 버들잎을 띄워 물을 건네주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 장화왕후 오씨를 버들낭자로 표현한 캐릭터가 있다.
전남평야의 중심지로서 예로부터 벼농사의 중심지이며 과수농업과 원예농업도 활발하다. 동쪽으로 화순군, 서쪽으로 무안군과 함평군, 남쪽으로 영암군, 북쪽으로 광주 광산구와 접한다.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국도1호선의 도로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철도· 항공 등의 접근성도 매우 편리한 지역으로 10여 개의 시·군과 교통이 원활한 곳이다. 전체적 지형은 북서부와 동남부에 산지가 위치하고 그 사이에 영산강을 중심으로 넓은 범람원평야가 전개된다. 노령산맥의 한 지맥인 금성산지가 시의 북서부에서 길게 뻗어 도심지의 배후에 다다르고, 남동단에는 영산강 수계의 나주호가 위치한다. 지석천·극락강·만봉천 등의 지류를 합류한 영산강이 강의 좌안에 넓은 범람원을 형성하고 있다. 2차산업이 발전하지 않았고 녹지 및 산림이 전체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각종 과수단지가 산재해 있어 시계 수십km 이상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대체로 온난하지만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를 보인다. 연평균기온 13.2℃, 1월 평균기온 -0.5℃, 8월 평균기온 26.9℃이다. 북서쪽에 위치한 금성산(錦城山:452m) 때문에 겨울기온이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호남내륙권의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이가 심하고 지역내의 기온차가 최고 35.4℃, 최저 -9.9℃로서 비교적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이 지역 기후의 특색이다. 강수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어서 연강수량이 1,407mm에 달한다. 봄철 환절기에는 강한 돌풍현상이 발생하여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전남평야 지대를 제외한 구릉지대에는 포플러·소나무·관목류·참나무·오리나무 등이 자란다.
나주목문화관[羅州牧文化館]
고려·조선시대 나주목(羅州牧)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세운 문화관으로 전남 나주시 금계동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나주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나주의 문화와 관련한 기념품과 특산품을 구입하는 방법과 컴퓨터를 통해 나주의 대표적 관광지를 안내 받을 수 있다. 문화관의 주제인 나주 목(牧)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나주 지역의 삼국시대부터 정부수립까지 행정제도 변천을 소개하고 있으며, 1,000년 세월 동안 고려와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방단위인 牧으로서의 나주 역할과 역대 목사들의 명단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2006년 10월 19일 개관하고 나주목문화관은 나주시에서 직접 운영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나주목문화관 옆으로는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32호’, 앞쪽으로는 나주의 관아문이던 ‘정수루(正綏樓),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86호’가 자리 잡고 있다.
나주목 관아와 향교[羅州牧官衙-鄕校] 사적 제483호
전라남도 나주시 과원동 및 금계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 2007년 7월 31일 사적 제48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 및 교육기관의 입지조건과 건축적 양식이 담겨 있는 유적으로, 조선시대 관아와 향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 객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거의 없어지고 향교와 내아, 정수루(正綏樓)가 남아 있다.
나주향교는 제사공간이 앞에 있고 강학공간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墓後學)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평지향교이다. 특히 대성전은 규모가 대단히 웅장하고 그 양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객사 금성관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격식을 잘 갖춘 관아건물로,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매달 두 번씩 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는 정청만 남은 상태이며, 없어진 동·서익청을 복원하였다.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관아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내아는 목사가 살던 관사로, 1892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나주 관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전라도의 대표적 읍치였던 나주 지역이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과 교육기관의 입지조건, 건축적 양식이 담겨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나주목사 내아, 문화재자료 제132호
정수루, 문화재자료 제86호 금성관, 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나주객사 금성관 중삼문(외삼문과 내삼문의 중간에 있는 문) 나주향교, 유형문화재 제128호
나주복암리고분군[羅州伏岩里古墳群] 사적 제404호 반남고분군(사적 제76,77,78호)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 있는 옛 무덤. 1998년 2월 20일 사적 제404호로 지정되었다. 복암리 고분군은 회진 마을 앞 영산강 북안 강변에 형성된 충적평야에 위치한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대형 복합묘제 고분이다. 복암리 고분군이 자리 잡은 곳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조산(造山)으로, 한 가문의 선산으로서 고분인 줄 모르고 사용되었기 때문에 도굴을 피할 수 있어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총 4호분이 200m 반경 안에 분포해 있다. '봉분의 흙이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라서 질이 다르기 때문에 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1호분은 원형 봉분으로 규모는 18.5m이고 높이는 4.5m, 주구는 깊이 1m 내외, 주구너비 3.5m이다. 2호분은 직사각형으로 분구길이 36m, 너비 6∼21m, 주구너비 약 4m, 깊이 약 1m이다. 3호분은 가장 규모가 크며 분구길이 36∼43m, 높이 6m, 주구너비 약 5m, 깊이 약 1m이다. 3호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널방 안에 독무덤이 들어 있는 독특한 묘제이며, 1개의 봉분 안에 독무덤 22기, 구덩식 돌덧널무덤 3기, 굴식 돌방무덤 11기, 앞트기식 돌방무덤 2기, 앞트기식 돌덧널무덤 1기, 돌덧널독무덤 1기, 널무덤 1기 등 모두 7종류의 묘제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 유물은 금동신발, 철제관모, 각종 마구류, 은장삼엽환두대도, 철제관모, 은제관식, 규두대도, 구슬, 토기 등 300여 점이다. 이 고분은 3∼7세기까지 400여 년 간 계속 사용된 고분으로 특히 5호, 7호 돌방은 이 고분의 유력자 무덤인 듯하다. 이 지역에, 백제시대 두힐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회진성과 1.5km 거리로 넓은 평야를 배경으로 한 집단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들의 무덤으로 복암리 고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 무덤군은 영산강 유역의 토착 묘제인 독무덤과 백제계인 돌방무덤의 융합대체과정, 즉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독무덤 중에는 영산강 유역 전용 독무덤 중에서 4세기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굴식 돌방무덤 중에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다. 분구는 옹관 또는 돌방을 추가하면서 확대해가다가 어느 시기에 방대형(方臺形)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다른 곳과 다르게 직접 봉분에 올라 볼 수 있게 하여 더욱 고분을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정말 커다란 봉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봉분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불회사[佛會寺]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茶道面) 마산리 덕룡산 남쪽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이다.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고,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고도 한다. 그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건하였고, 1403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인 1664, 1747, 1798년에 세 차례나 불이 나 건물이 타버렸지만 그때마다 계속해서 중창이 이어졌다. 1693년에는 괘불탱화가 조성되었고, 1791년에는 나한전을 상량했는데, 이 나한전은 1798년의 화재 때에도 불에 타지 않았다. 1799년에는 명부전이 지어졌다. 불회사 대웅전(보물 1310)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이며, 그 안에는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등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종이로 만든 것으로 매우 드문 예이다. 명부전은 1402년에 건립하여 200여 년 전에 중수하였으며, 칠성각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와 원진국사의 영정이 있다. 그 밖에 당간지주 2기와 원진국사 부도가 있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불회사석장승[佛會寺石長栍] 중요민속자료 제11호 1968년 중요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제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7∼18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입구 300m 지점 길 좌우에 마주보고 서 있다. 사찰을 향해 오른쪽이 몸길이 315cm, 머리길이 80cm, 머리둘레 175cm, 가슴둘레 170cm, 얼굴너비 62cm의 남장승으로,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왼쪽은 몸길이 180cm, 머리길이 75cm, 머리둘레 162cm, 가슴둘레 162cm, 얼굴너비 47cm의 여장승으로, '주장군(周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불회사대웅전[羅州 佛會寺 大雄殿] 보물 제13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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