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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立つ鳥跡を濁さず
명예교수 한재숙
사제동행(師弟同行), 은사(恩師)님을 추억하는 글을 쓰도록 청을 받았다. 필자는 원래 글을 즐겨 쓰는 재주도 없고, 무엇보다 어느 은사님을 대상으로 할까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별히 한 분만을 떠올리면...... 괜스레 많은 은사님들께 송구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필자 역시도 지금껏 훌륭하신 많은 은사님들의 가르침과 배려 덕분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추억할 은사님, 사제동행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필자는 먼저 제자의 현실적 삶의 안내자였던 은사님을 찾았다. 교수로 연구자로서 제자가 걷는 길을 앞서 걸으시며 잘 인도해 주신 선생님, 그리고 한번 더 모시고 싶은 선생님, 무엇보다 제자가 본받고 따르고 싶은 삶을 사신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지난 세월을 찬찬히 떠올려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일본인 답지 않게 yes, no가 분명하신 우라카미(浦上)선생님
1970년 당시 만 22세의 필자는 일본 유학이라는 겁 없는 도전을 했다. 여학생의 해외 유학은 지금도 쉽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더욱 여러 가지로 열악한 상황이었으니, 진심으로 필자에게 무모한 도전을 만류하는 분들이 많았다. 필자는 여권과 비자 수속을 위해 교육부(당시 문교부), 외무부 주일대사관을 16차례나 오가야 했다. 서울을 왕래하며 6개월이 소요되는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오사카시립대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필자를 제자로 받아 주셨던 우라카미 지에코(浦上智子) 선생님과의 인연을 회상하고자 한다.
우라카미 선생님의 이름에 대한 일화 하나는 浦上智子(우라카미 토모코)로 읽어야 하지만 출생신고 때 浦上智恵子(우라카미 지에코)의 恵자를 담당 공무원이 빠트려 일본어 恵자가 빠진 상태로 선생님과 가족은 지에코에 마음을 두고 있었기에 한자와 일본어 읽는 방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우라카미 지에코라는 이름으로 사신 분이다. 선생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필자의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여성교육자로서의 선생님의 삶에 대한 찬탄과 감사를 부족한 글로써 표현하고자 한다.
우라카미(浦上) 선생님은 1912년 2월 14일에 태어나셨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영향으로 근대화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급속하게 성장하던 시기로 ‘서쪽엔 영국, 동쪽엔 일본’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제국은 무모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미국에서 생활하시던 선생님의 청년기는 참으로 혹독한 고초를 겪으셨다고 회고하셨다.
선생님께서는 1930년대 초 미시간대학(Ann Arbor 캠퍼스) 약학부를 졸업하시고, 동 대학 대학원 화학과 석‧박사과정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귀국 후, 오사카시립대학 재직 시에도 당신 자신에게는 매우 근검절약하시면서 매월 미시간대학 동창회에 기부하시는 일은 변함없이 지속하셨다.
1940년 8월 시행된 외국인 등록법(Smith Act)은 물론이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은 일본과 일본인을 적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일본인은 지정된 구역에서 오후 8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다. 1942년 말부터 일본은 ‘dirty Japs’라 불리며 집단 수용소에 갇혀서 가혹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제대로 먹을 수도, 다닐 수도 없이 거부와 놀림과 멸시를 당했던 그 시절 선생님께서는 극한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일찍부터 체험하면서 난관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신 것 같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배에 실려 40여일의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고 하셨다.
지기추상(持已秋霜)의 여중군자(女中君子)이셨던 선생님
극심한 시련을 겪으시면서 선생님께서는 스스로에게 늘 엄정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주변을 관리하고 또 전문적인 역량을 키워가는 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자신에게는 모름지기 가을 서릿발처럼 엄하게 대하라는 지기추상(持已秋霜)의 체화된 지혜를 일상에서 실천하신 것이다. 청년기 선생님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원대한 꿈을 키우며 마침내 영어가 유창한 일본의 신여성으로 오사카시립대학 교수가 되셨다. 필자의 감정이 이입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공부하시고 사회활동 하시던 그 당시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은 또 그 몇 배나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실제로 혼인이 당연하던 그 시절 선생님께서는 비혼으로 지내시며 교육자와 연구자의 한결같은 삶을 살아내시고자 하셨다.
성장기와 청년기의 삶이 이러고 보니 우리 선생님은 모습과 달리 매사에 쉽게 포기하거나 나약하게 주저하거나 또 게을리 하는 것을 싫어하시고 경계하셨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성실하고 강직하게 목표를 향해 노력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제자들을 아주 엄격하게 대하시며 사제 간의 경계는 분명하게 지키셨다. 그렇게 늘 제자들을 채근하시기 위해서라도 선생님 당신 역시 연구자로서 탁월한 능력은 물론이고 성과도 남다르게 만들어 내셨다. 부드러운 모습과 달리 선생님은 장부와 같은 굳은 기개를 함께 지니셨으니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우라카미 선생님께서는 1975년 오사카시립대학에서 정년 퇴직을 하셨으니, 필자는 선생님께서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인 유학생이었다.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은행(銀杏)의 지질에 대하여”였으며 1975년 미국유화학회지(Journal of American Oil Chemists' Society)에 논문이 게재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대학원 재직 중에는 실험실습 환경이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일본의 교육환경은 실로 엄청나게 발전된 그리고 연구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1970년~1972년) 대구경북을 통틀어 대학에서 GC(Gas Chromatography)와 같은 기기가 1~2대 있을까 말까 하던 시기였으나 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차를 감안하여 우리카미 선생님 연구실 대학원생 2인에게 각각 1대의 GC를 사용하도록 해 주셔서 석사과정 기간 중에는 마치 장난감 다루듯 거의 매일 GC와 지난한 시간을 보냈었다. 이 밖에도 TLC(Thin Layer Chromatography), 다른 이학부(理学部)에 의뢰하긴 했지만 GC-MS를 다루는 등 그야말로 초고급 기술과 기자재로서 대학원생의 연구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실험재료는 오사카시립대학 캠퍼스 내의 은행을 주워 시료로 사용하였으며, 대학원 연구실에서 실험을 위해 고약한 은행(銀杏) 냄새를 진동하게 하던 한국인 여학생에게 동료 연구생들은 참아내느라 힘들어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오히려 더 많은 격려와 관심을 보내주셨다. 또 선생님은 당시 일본 대학가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급진 적군파와 일본 내 친북한 조직인 조총련으로부터 필자가 어떤 영향을 받지 않을까, 또한 그들로부터 애꿎은 피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항상 걱정하셨다. 당시 일본은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이런 일본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선생님은 청년기 당신께서 체험했던 여러 어려움을 딸같은 한국인 제자가 겪지 않고 또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격려를 해주셨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보다 더 꼼꼼하게 챙겨주신 선생님의 탁월한 지도와 세심한 배려는 필자가 후학을 지도하면서도 참 따르기 어려웠다. 그렇게 선생님의 지도와 배려로 필자는 석사과정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 결과 필자는 당시 대구 경북권에서는 흔하지 않은 외국의 석사학위 소지자로서 마침내 1973년 3월 모교인 영남대 가정대학 가정학과에 대우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2004년 3월 위덕대 총장의 소임을 맡게 되어 영남대를 떠날 때까지 31년간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로 생활 하였다.
외국인 제자가 모국으로 돌아가서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것을 선생님께서는 참 대견해하시고 또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나는 새 뒤를 깨끗이(立つ鳥跡をにごさず)’
선생님께서는 자주 제자들에게 ‘나는 새 뒤를 깨끗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스스로는 물론이고 제자들에게 늘 주변을 깨끗이 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일본인들은 특히 타인의 평판에 민감하고, 청결함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가치관 속에서 선생님은 주변정리와 청소(掃除、そうじ)를 잘하라고 강조하셨다. 청결함은 일본 정체성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신도(神道)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에서 청결함은 곧 신독(愼獨)이며 독실(篤実)함이고 또 여여(如如)함이다. 선생님은 일상을 어쩌면 구도자의 마음가짐과 태도로 지내신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스스로 주변을 단정하게 정리하여 뒤이어 오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정신과 실천을 강조하신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나(出)고 듦(入)에 있어 흔적 남기지 않는 새의 모습을 교훈 삼아도 좋을 것 같다. 이는 또한 염치(廉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몰염치로 인한 걱정이 심해지는 오늘날 반추해 볼 선생님의 가르침이다.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自分のことは自分で)’
선생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를 강조하셨다. 아무리 커도 멍텅구리배는 동력이 없는 배라서 스스로 움직이지를 못한다. 사람을 바라보는 데는 외형에 앞서 자기 동력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연구하는 제자들에게 늘 주문하셨다.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자주적인 삶, 스스로 주인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은 교육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덕목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선생님은 1975년 오사카시립대학을 정년퇴직하시면서 사재 1억 엔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셨다. 지금도 큰 금액이지만 50여 년 전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라 모두가 놀랐었다. 머리로 좋은 일임을 알더라도 마음과 몸이 그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들 잘 알겠지만, 퇴직하는 노년의 선생님은 후학을 위해서 많은 장학금을 쾌척(快擲)하셨다. 더 놀라운 것은 장학금 수혜자를 ‘일본인이 아닌 아시아 지역 유학생’으로 특별하게 지정하신 것이다. 덕분에 여러 명의 한국 유학생이 장학혜택을 받았다고 들었다.
오사카시립대학(大阪市立大学)을 퇴직하시고 데츠카야마여자대학(帝塚山女子大学)에서 만 70세까지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고 교육하신 후 퇴직 후에는 코베(神戸)에 있는 유유노사토(ゆうゆうの里)라는 실버타운에서 생활하셨다.
퇴직 후에 선생님은 유화를 즐겨 그리셨으며 기념으로 한 점을 필자에게 선물해 주셨다.
골프, 수영 그리고 일흔을 훌쩍 넘기신 연세에 새로운 도전을 하시면서 늘 외국 귀빈이 오실 때에 영어 통역관으로도 활약하셨다.
주위의 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하셨으며 아흔이 넘은 시기에도 거처하시는 유유노사토에서 반장 역할을 담당하시기도 하였다.
1980년경부터는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를 돕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으며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풀리지 않는 수원(愁怨)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선생님은 말없이 몸소 그렇게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힘이 있고 여유가 있는 자들이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증명하는 삶을 사셨다. 필자는 재주도 마음 그릇도 작지만, 우라카미 선생님의 철학과 삶을 새기고 따르고자 마음으로는 늘 다짐하곤 하였다.
큰 나무 곁에서 많은 이들은 그늘을 즐긴다.
선생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는 매년 2월 14일 전후해서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흰 머리의 후학들이 모였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선생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던 애플파이를 준비하였다. 작은 선물상자를 손에 들고 들어서는 필자를 선생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환한 미소의 선생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고 그립기도 하다. 그렇게 소담하게 준비한 다과와 커피를 함께 나누며 흰머리 된 제자 노인들이 상노인을 가운데에 모시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웃음꽃 피우며 담소하던 그 모습 또한 아련하고 그립다.
1970년에 필자가 선생님 그리고 일본과 맺은 인연은 그렇게 반백 년을 훌쩍 지나고 있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필자는 선생님의 생신을 전후해서, 아니면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찾아뵈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게 필자에게 친근해진 일본과는 필자가 모교의 학교법인 이사장의 소임을 맡으면서 한일 대학법인 간의 교류활동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선생님의 후학들이 이제는 거의 팔순을 전후한 노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선생님 제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정례적인 교류를 지속하면서 선생님의 위패를 모신 산사를 찾아가곤 한다. 현명한 부모님을 둔 가족은 자녀간에도 후의를 나누는 것처럼 선생님의 다함없는 제자 사랑의 큰 나무 아래에서 많은 후학들과 제자들이 선생님을 그리며 그렇게 그늘을 즐기고 있다.
선생님은 2010년 8월 30일 9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장례는 가장 가까운 소수의 친척들만 참여하는 가족장으로 치르셨다고 한다. 필자는 물론이고 많은 일본의 후학들도 조문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필자의 동료였던 일본인 제자들도 당시 필자가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의 공직을 맡고 있어서 일본 방문이 어려울 것이며 직접 조문 역시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제때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다.
당시에는 다소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자식 같은 제자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생님의 뜻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이해가 되고 또 더욱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다.
구도자와 같던 선생님의 삶을 새기고 살펴 따르겠습니다.
선생님의 영면 이후에 알게 된 것은 선생님의 기일에 대한 행사였다. 일본에서 드러내어 기일(忌日) 행사를 하는 것은 처음 맞이하는 1년, 3년, 7년, 13년, 17년, 23년, 27년 주기로 특별히 챙기는 기일이 있다고 들었다.
코로나 펜데믹을 지나면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13주기를 앞당겨 2022년 11월 24일에 선생님의 위패를 모신 사찰을 방문하였다. 당시에는 코로나 펜데믹이 진정되지 않았던 시기라 비자발급 문제와 항공기 운항이 극히 제한되던 시기였다. 기시다 총리가 총리직을 승계한 다음 10월부터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졌으며 오사카행 비행기는 KAL만이 인천공항을 통해서 하루 1차례 운항이 가능했었다.
선생님은 교토(京都) 아라시야마(嵐山)에 있는 조자쿠코지(常寂光寺)에 모셔져 있다. 이 사찰은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날도 사찰에는 낙엽과 단풍으로 단장한 만추의 고즈넉함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사찰을 방문한 제자들도 이제는 나이가 적지 않으니 당신의 위패를 쉽게 찾기 어려웠는데 유독 한국 제자의 눈에 맨 먼저 현현(顯現)하셨다. 필자는 어린 소녀처럼 반갑고 또 선생님께서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필자의 그 마음을 알아챈 듯이 함께한 동료들도 선생님은 재학시절에도 필자를 특별히 아끼고 그러시더니 오늘까지도 필자가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며 부러운 핀잔을 하며 함께 웃었다. 2026년 필자에게 있어 또 하나의 큰 행사는 선생님의 17주기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일이다. 코로나 관련 지장이 적어졌으니 좀 더 큰 규모의 졸업생들의 모임을 만들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
선생님. 당신의 위패 앞에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또 앞으로 맞을 제자의 시간에 대해 선생님께 지혜를 여쭙고자 합니다.
천천히 긍정하며 믿음으로 더딘 제자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의 성장을 참고 기다려주신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조급함, 짧지 않은 교직 기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여러 자녀와 손자녀를 키우면서 필자 역시 익숙한 듯 자주 범하는 오류다. ‘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지’ 부모와 선생은 급한 마음에 쉽게 채근하게 된다. 돌아보면 선생님은 우선 스스로 몰입하는 제자에게 절대로 재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좌충우돌하는 제자를 격려하고 기다려주셨다.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교육에는 학생의 노력 이상으로 교육자의 인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강조하는 개별학습, 문제해결학습을 선생님은 반백 년 전 그 시절에 이미 실천하셨던 것이다. 후학들과 자녀들에게 채근하지 않고 우직하게 기다려주는 것, 선생님을 통해 얻은 매사 조급해하지 않는 가르침을 필자 역시 실천해 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다지 치장하는 일에는 둔한 편이며 가능하면 멀리하고 있다.
선생님은 ‘공부하는 사람은 외모를 드러내기 위한 장식이나 꾸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반지하나 손에 끼지 않으신 것이 여전히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우라카미 선생님,
당신께서는 저의 일상에 지금도 저를 지켜보고 계신 듯합니다.
선생님. 참 그립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제자 韓 在 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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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사장님, 바쁘신 시간 쪼개어 옥고를 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정말 세심하게 쓰신 원고를 따라 들어가며 ‘닮고 싶은 스승이며 제자’라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특히 여 교수님 글로는 처음 들어온 이글에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아실른지요? (여 교수 비율이 적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요......) 여성 스승에 대한 글이 드문데, 더욱이 그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간 여성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전합니다. 또한 이사장님께서 스승님을 모시는 모습을 대하며, 제 은사님들께 정말 죄송해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