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상권 30. 당신은 지금 이미 자유롭다.
문: 사람과 우주의 본성에 관해서는 매우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창조된 것이라는 거나 모두가 환이라는 견해, 꿈이라는 이론 등등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입니까?
M: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틀려요.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꿈 이론을 가장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M: 그런 건 모두 말을 늘어놓는 방식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이렇게 짜 맞추는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또 저렇게 짜 맞추는 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이론이라는 것은 옳지도 그르지도 않아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불과한 거죠.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이론이 검증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론을 쓸모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론의 검증입니다. 어느 이론으로 실험을 해보더라도 참으로 진지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어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선생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상황 속에 갇혀서 탈출로를 찾고 있어요. 자기 감옥에서 나오기 위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니에요. 그러나 진지하게 다룬다면 그들 모두는 조금의 가치가 있긴 해요. 해방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실성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문: 이론은 잘못된 방향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고 진지함은 맹목적입니다.
M: 진실함이 사람을 안내해 줍니다. 자유와 완성이라는 목표에 헌신하면 모든 이론과 체계를 버리고 지혜와 지성 그리고 실천적 사랑에 의해 살게 됩니다. 이론들은 출발점으로 좋을지 모르나 가능하면 빨리 버려져야 합니다.
문: 깨달음을 위해서는 8지칙 요가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의지력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거지요. 순수한 의지력으로 완전한 확신을 갖고 목표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들이 수십년 걸리는 노력을 적게 들이고 빨리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M: 집중에다가 완전한 확신, 순수한 의지가 있다면 당장 깨닫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어요? 오직 하나의 바램만을 남겨 놓고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구도자에게 정말 좋은 요가이지요. 결국 마음과 심정의 한결같음이 바로 의지가 아니겠어요? 그러한 꾸준함이 있다면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어요.
문: 제가 느끼기에 그 수행의 말은 목적을 향한 지속적인 꾸준함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목적에 고정된 의지가 있으면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도한다는 사실만이 그 목적을 끌어당긴다는 것이지요.
M: 의지는 부동의 목적이든 마음의 집중이든 결국 진실함, 진지함, 정직함일 뿐입니다. 사람이 아주 진지해지면 모든 순간을 목적을 위해 활용하게 됩니다. 다른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지요. 의지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또는 단순한 정직성이라 하든 전적으로 그 목적에 헌신하게 되지요. 우리는 안팎으로 싸우고 있는 복합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일을 오늘 후회하는 모순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도 당연해요. 그러니 집중하여 조금이라도 온전해지면 대단한 진보가 생기지요.
문: 욕망과 운명 중 어느 것이 더 강합니까?
M: 욕망이 운명을 만듭니다.
문: 욕망이 운명을 정하기도 합니다. 저의 욕망은 유전과 환경 또 여러 가지 기회와 사건들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걸 두고 우리가 운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M: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문: 언제쯤이나 제가 원하는 대로 될까요?
M: 선생은 이미 자유롭습니다. 뭘 원합니까?
문: 물론 전 마음대로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욕망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다른 욕망들이 길을 잃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바램이 강하지도 못합니다. 제가 그 바램에 뜻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오히려 제가 바라지 않는 방향의 욕망들이 더 강합니다.
M: 선생은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다치지 않고 욕망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참된 바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문: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이론입니다. 사실은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마음 놓고 바라지 못하는 것 같고 제가 올바른 바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그 바램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M: 그건 모두 마음이 약하고 마음의 통합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모아 통합력을 강화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 말고 행동들이 의지의 방향대로 동조하게 됩니다.
문: 또 다시 공허한 가능성만 말씀하시는군요. 마음을 통합하고 강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시작하나요?
M: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면 되요. 선생은 지금 여기에 있고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문: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M: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 수가 있어요. 지금 여기에서 말입니다.
문: 그게 모두입니까?
M: 그게 모두요. 그 이상은 할 일이 없어요.
문: 저는 깨어있거나 꿈꾸면서 언제나 저 자신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도움이 안 됩니다.
M: 그건 생각이나 느낌, 행동을 알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 제가 새로 갖추어야 될 요소가 뭐라는 거죠?
M: 그냥 관조하는 태도, 사태 속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문: 그게 제게 무슨 일을 해줍니까?
M: 마음이 약해져 있는 것은 지성과 이해력이 부족해서인데 이건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자각에 힘씀으로써 마음을 모으고 강화할 수 있어요.
문: 전 진행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M: 지금 선생은 오해하고 있어요. 진행되고 있는 일이란 마음이 투사된 것입니다. 약한 마음은 자신이 투사해 놓은 것도 모르고 투사한 마음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스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과 마음이 투사한 것을 자각하도록 해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조정할 수는 없어요. 그 반면에 그것을 알면 힘이 생깁니다. 실제로는 이건 매우 쉬운 거예요. 자신을 통제하려면 자신을 알도록 하세요.
문: 아마도 저는 저 자신을 통제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혼돈을 다룰 수는 있을까요?
M: 선생의 마음이 만드는 혼돈 외에는 세계 속에 혼돈 같은 건 없어요. 그것은 스스로가 만든 것인데 자기 자신을 다른 어떤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선생의 무한한 가능성은 고갈 불가능한 가능성이에요. 선생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우주라는 것은 선생의 무한 가능성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문: 저는 전적으로 즐거움에 대한 욕망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흔들립니다. 저의 욕망이 아무리 고귀하고 저의 두려움이 정당화되더라도 즐거움과 고통은 제 인생 안에서 흔들거리는 두 축입니다.
M: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두려움 둘 모두의 근원으로 가세요. 관찰하고 조사하고 이해하도록 해 봐요.
문: 욕망과 두려움 모두가 육체나 정신의 요소들에 의해 야기된 느낌입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거기에서 꿈틀거리는데 왜 거기에 있습니까? 저는 왜 즐거움을 바라고 고통을 두려워합니까?
M: 즐거움과 고통은 모두가 마음의 상태입니다. 자신을 마음, 혹은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런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문: 그러면 제가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제가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까?
M: 몸이 있고 몸을 방어하는 마음이 사건들 속에 있게 되지만 사건들이 자신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심의 초점이 사건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있게 되지요. 그곳에 묵묵히 있으면서 딴 곳으로 한 눈 팔지 않게 됩니다.
문: 하지만 사건들은 여전히 남게 되니까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M: 이미 자유로운 거예요, 선생의 업이나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 불과해요. 이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보편적 두려움에 의해 판단할 수 있어요.
문: 사람들은 가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만.
M: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 할 때에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죽을 마음의 준비마저 삶 그 자체보다 더 깊은 근원인 살고자 하는 의지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거에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은 궁극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놀라운 존재가 있어요. 그 너머의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며 삶도 아니고 삶이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있어요. 그것은 순수한 자각의 상태로서 시공의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일단 마음과 몸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