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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의 장인이자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였던 장유 초상. 장유는 심한 골초였으며 장인은 이런 사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담배는 1622년(광해군 14) 왜에서 들여왔다. 김상용의 사위 장유(효종의 장인)는 애연가였다. 장인은 사위가 내뿜는 담배연기와 냄새가 지독히도 싫었다. 그래서 임금에게 주청해 '요망한' 풀이 유통되지 못하게 했다. 시중에서는 담배가 근절되기는커녕 날개 돋친 듯 거래됐다.
한편 김상용은 후금이 쳐들어오자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해 적이 성을 함락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한다. 김상용이 담배를 무척 싫어한 데다 그가 불 속에서 숨지자 그 집안에선 대대로 담배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생겼던 것이다.
개고기 마니아였던 공자를 모방해 조선의 유학자들도 개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그 시대에도 개를 애지중지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판서 조상진(1740∼1820)은 반려견 사랑이 유별났다. 개가 병이 나자 의원을 불렀다.
기가 막힌 의원이 "저는 어의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공손히 돌려보냈다. 그 개가 통통하게 살이 찌자 주위에 자랑하고 다녔다. 누군가 "복날이 머지않았으니 안타깝소"라고 하자 조상진은 버럭 화를 내며 "늙은이가 아끼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이 그렇게 경박한가"라고 했다.
▲ 이항복 초상. 임진왜란 직후 제기된 파주 천도설을 이항복이 무산시켰다.
고려조에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서울)으로 몇 차례 이전하려고 한 적이 있지만 조선 역시 수도를 바꾸려고 했다. 전대미문의 환란인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였다. 서울이 왕기가 다해 천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했다. 도읍지로 집중 거론된 곳은 파주 교하지역이었다.
실록은 "서울을 교하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중대한 의논이었다"며 수도 이전이 조정의 중론으로 부각됐던 당시 상황을 소개한다. 조정에서 영향력이 컸던 이항복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광해군 2년(1610) 이항복은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난리와 수해를 피하고 백성을 위하고 중국과 통교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며 "신빙성이 막연한 말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면 솥이 깨지고 살림살이가 망가져 곤궁함만 더해 갈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나라에 덕을 쌓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게 급선무이며 그렇게 하고서도 나라가 약해지고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들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천도를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도를 교하로 바꾸는 논의는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다.
그 시절 청계천 등 도성 내 개천과 도랑에는 오물이 아무렇게 버려져 악취가 진동했다. 세종 때 이현로가 풍수설을 앞세워 명당을 물을 맑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서울에는 본래 적취물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어효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오물 투기가 근절되지 못했다.
300년이 경과한 1760년(영조 36)에야 임금이 이창의 등을 시켜 여러 관료와 백성들을 동원해 청계천을 준설했다. 사흘씩 부역을 해야 했지만 오랜 기간 쓰레기로 고통받아온 백성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어서 공사는 빠른 시일 내에 끝났다.
공사에 걸린 기간은 총 57일이며 백성 20만명, 금전 3만5000꾸러미(緡)가 소요됐다. 공사 후 나라에서는 상설기구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했다.
전란과 잦은 화재에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개국시조의 어진을 반드시 지키려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했던 태조어진은 임진왜란 때 경기전 하인이 접어 품속에 간직해 옮겼다.
저자는 태조어진을 보면서 그 접은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왕후 영정까지 제작했다. 성종 3년(1472) 선원전에 세종비 소헌왕후와 세조, 예종 어진을 모사해 봉안했으며 중종 34년(1539)엔 정종과 정종비 정안왕후의 영정을 함께 올렸다.
선원전의 태조 영정은 26점, 성종 9점 등 수많은 어진이 그려져 선원전 안에 잔뜩 쌓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색이 바래고 먼지가 쌓여 서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져 초본과 여벌 등은 땅에 파묻었다.
▲ 군복차림의 철종 어진. 조선시대 왕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정조가 외부 행차때 입기 시작한 후로 즐겨입게 됐다.
25대 철종 어진(보물 제1492호)은 군복 차림이다. 애초 임금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군복을 즐겨 입었고 정조도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화성에 행차할 때 추모를 위해 군복을 착용했다. 처음에는 재상 김익이 군복 차림의 정조를 향해 "전하께선 이 어인 복장이냐"고 비꼬았다. 말을 탄 군왕은 소매통이 좁은 옷을 입어도 된다는 인식에 따라 이후엔 임금의 행차 시 군복을 으레 착용하게 됐다.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수발만 들었을까. 단명한 헌종(1827∼1849)은 그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저자는 헌종을 직접 모셨다. 헌종은 정사가 한가할 때 모시옷을 손수 세탁하는 일이 많았다.
외부에 헌종이 사치가 심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왕의 문방구가 일반 사대부와 다르지 않고 화려한 물건도 절대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이불에 비단이나 털 담요를 쓰지 않았으며 천막도 고운 비단을 멀리했다.
한 집안에서 한 명 나오기도 힘든 정승을 10명이나 배출한 걸출한 가문도 언급된다. 조선개국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심덕부(1328∼1401) 집안에서는 본인을 포함해 심온, 심회, 심연원, 심통원, 심희수, 심열종, 심기원, 심수현, 심지원 등 10대에 걸쳐 10명이 정승에 제수됐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이 세종의 장인, 여섯째 아들인 심종이 태조의 부마가 된 덕이다. 정광필(1462∼1538)은 중종 때 3정승을 모두 지냈다. 그의 집안에서는 정유길, 정창연, 정지연,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정홍순, 정석오 등 7대 동안 10명의 정승이 나왔다.
이에 못 미치지만 좌의정 민정중(1628∼1692) 가문은 민진장, 민진원, 민응수, 민백상 등 3대에서 5명의 정승이 배출됐다. 김상용, 김상헌 집안도 이들 형제가 각각 우의정, 좌의정에 발탁된 것을 포함해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등 3대 동안 5명이 정승을 했다.
명산 금강산은 외국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권근(1352∼1409)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들 이 산을 한 번 찾아와서 구경하고 싶어한다. 더러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까지 있다고 한다"고 했다. 고려말 학자인 이곡도 "금강산은 천하에서 그이름이 유명해 인도가람들까지도 찾아와 구경한다"고 했다.
'남남북녀'라는 말은 주로 북한은 여자들이 예쁘고 남한은 남자들이 잘났다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남북은 원래 함경도의 남쪽과 북을 지칭했다. 함경도 북쪽 지방 여자들은 체구가 크고 살갗이 밝았다. 일도 잘해 한 해 2단(端)의 베를 짰다. 이렇게 짠 베로 시집갈 때는 치마를 4~5벌이나 갖추고 가마에 면포를 덮어씌운다. 일손이 절실했던 시절이니 노동생산성 높은 그녀들은 이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태 유래도 재밌다.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는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관찰사에게 갖다 바쳤다. 관찰사가 맛있게 먹고는 물고기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태씨 성의 어부가 잡았다고만 대답했다. 관찰사는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부르면 되겠다고 했고 이때부터 명태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졌다. 저자는 "원산을 지나다가 명태 더미를 보았는데 한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순우리말이라고 여겨지는 단어 중 상당수가 한자에 근거하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낱말도 부지기수다. 조선시대 벼슬아치의 높임말로 영공(令公)이라고 하고, 또한 영감(令監)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공은 당나라 곽자의(郭子儀)가 중서령(中書令)의 벼슬을 받자 곽영공(郭令公)이라고 했고 이 호칭은 곧 '존칭의 대명사'가 됐다.
조선말 영공이 영감으로 변질돼 유행했다. 어선(御膳, 임금에 진상하는 음식)을 수라(水剌)라 하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나리[進賜]라 하고 노비가 주인을 칭할 때 상전(上典)이라 하지만 역시 여러 출처에서 와전된 것들이다.
아픔을 느낄 때 부모를 찾기 마련인데 감탄사 아야(阿爺)는 아부(아비), 아미(어미)라는 한자가 변질돼 만들어졌다.
남자를 뜻하는 사내라는 단어는 고려후기 문신 이나해(李那海)와 연관 있다. 이나해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벼슬을 지냈으며 용모와 풍채가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인부(仁富), 광부(光富), 춘부(春富), 원부(元富) 등 4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모두 재상이 돼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나해의 네 아들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남자를 사나해(似那海)로 부르게 됐다.
▶이유원(1814∼1888)=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합격했으며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거쳐 고종초에 좌의정에 발탁됐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반목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개화를 주도해 1882년 전권대신 자격으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에 조인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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