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농구의 대들보로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역 시절을 떠올리면 엊그제 같은 기분이에요. 테이프� 거꾸로 돌려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마음이 술렁술렁해지네요.
처음 농구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였죠. 당시 농구부 선생님이 몰래 보고 절 발탁했다는데, 운동선수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큰 일 난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처음엔 단호하게 거절을 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170cm라고 들었어요. 반장이었는데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아 선생님인 줄 착각할 정도였죠. 수업 끝나면 제가 다음날 자습 판서도 미리 해놓고 담임선생님하고 옥수수 빵 먹던 기억이 나요.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운동은 정말 하기 싫었죠. 당시 담임선생님도 운동하지 말고 공부하라며 농구하는 것에 반대하셨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이 먼저 설득을 당하시고,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들었던 저도 농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죠. 그래서 창신초등학교에서 숭의초등학교로 옮기게 된 거예요.
농구를 처음 했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농구공을 보는 순간 농구공이 너무 커서 지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골대는 또 얼마나 높은지 하늘 꼭대기에 있더라고요. 선생님이 공을 넣어보라고 해서 던졌는데, 공이 림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제 머리 위로 다시 떨어지더라고요. 그 기억이 정말 생생해요.
농구의 어떤 매력에 빠지게 된 거죠? 매력에 빠질 시간도 없었죠. 박찬숙을 빨리 키워야 된다는 이유로 다른 선수들 놀 때도 전 개인 연습을 엄청 했어요. 뛰어가서 백보드를 쳐보라고 해서 뛰었더니 다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발전을 조금씩 하게 됐고, ‘나도 운동신경이 있구나’라고 느끼게 된 거죠. 그 뒤로는 그냥 죽기 살기로 하기 시작했죠.
초등학교 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남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계속 발전을 하면서 6학년 때부터 언론에서 저를 다루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뭔가 되려나보다’하고 기분이 좋았죠. 그런데 그 뒤로 기자들이 계속 몰려오는 거예요. 지금은 능청맞지만, 그 때는 너무 부끄러워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기자였어요. 인터뷰 있다고 하면 울어버린 적도 많았거든요.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매번 똑같은 인터뷰를 하다 보니 어린 나이에 스트레스와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거죠.
운동신경은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나 봐요? 외탁을 많이 했죠. 아버지 키는 173cm인데, 어머니 키가 180cm였거든요. 학창 시절 육상 선수 출신이었고요. 외할아버지도 씨름하시면 소 한 마리 가져올 정도로 장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저에 대한 걱정도 많이 하셨는데, 어렸을 때는 다 잔소리 같았죠. “찬숙아, 넌 그것밖에 못하니? 덩치가 크니까 빨리 뛰어라”라고 평가를 내리시는 게 참 싫었어요. 지나고 보면 그런 게 다 큰 공부고 도움이 된 거죠.
농구공을 껴안고 잠을 잘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고 들었어요. 그 때 코치님이 화장품 대신 농구공 가죽 냄새가 나게 하라고 하셨죠. 너무 순진했던 거죠. 로션도 안 바르고 농구공을 꼭 껴안고 잤어요. 가죽 냄새 나게 하려고요. 이왕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최고가 돼야겠다는 마음이었죠. 처음엔 제가 공 따라 가기 바빴지만, 나중에는 공이 저를 따라오게 됐죠.
농구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언제인가요? 대표팀에 들어가서죠. 숭의여중 3학년 때 190cm로 키가 컸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나진 않았어요. 숭의여고로 올라가는데 대표팀이 된 거죠. 그 때가 16살 사춘기라 예민할 때였어요. 가슴이 정말 벅차 올랐죠. 10년 차나 나는 한국 최고선수들이 있는데 어린 제가 들어간 거예요. 막내로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노 룩 패스하면 얼굴로 받을 정도로 실력은 형편없었어요. 그렇게 1년을 고생하고 나니까 달라져 있었죠.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랄까요?
소속 팀에서는 실력 차가 엄청 많이 났겠어요. 대표팀에서 기술과 체력적으로 성장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소속 팀에 돌아오니까 ‘갖고 논다’는 표현처럼 매 경기 최고득점을 올렸거든요. 언니들 따라다니면서 울었던 게 도움이 된 거죠. 21~23살까지 날개를 단 것처럼 몸이 가벼웠어요.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강현숙 언니와 함께 준우승할 때가 몸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특별한 훈련 비법은 없었나요? 어려서부터 농구를 시작해 열심히 한 것 밖에 없어요. 새벽 4시에 도시락 두 개 싸들고 학교로 가서 남들 오기 전에 운동을 했어요. 친구들 오면 지금 온 것처럼 같이 운동을 한 거죠. 비법이라면 남들보다 5분이라도 먼저 나와 공을 만지는 것이었죠. 부상 공백이라도 있으면 팀 훈련에 지장 없게 그만큼 운동을 더 했어요. 이미 한국여자농구의 대들보니 간판스타로 알려져 있는데 게으른 모습을 보일 수 없지 않겠어요? 지금도 나이 50이지만, 더 노력하면서 똑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여자선수들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요. 일찍 대표선수가 돼 농구하던 동료들과 추억이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거의 태릉선수촌에서 생활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동창 친구들이 없어요. 동창인데 제가 얼굴과 이름을 기억 못하는 게 많았죠. 탤런트 김미숙과도 동창이라 인사는 하지만, 추억이 없어서 안타까워요.
태릉선수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지독하게 운동만 했던 기억이 나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겨웠어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죠. 막내이다 보니까 혼자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았고, 밤에 쓰는 일기는 거의 눈물로 젖어 있었어요. 어려서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서 정말 많이 울었죠.
1975년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셨는데, 당시 대표팀에서는 어떤 역할이셨나요? 만 10년을 연속으로 대표팀에서 뛰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도 되고, 무거운 짐이 주어졌죠. 한국여자농구의 기둥 센터가 되면서 위로 10년 아래로 10년 차까지 함께 뛰었어요. 제 앞에는 항상 ‘무적함대’, ‘대들보’ 등의 수식어가 붙어 선배가 되면서 부담감에 어깨가 항상 무거웠죠. 편안하게 안 해준 주변 환경이 저에게는 채찍이 될 수 있었어요. ‘왜 나만 갖고 그러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행복한 소리였던 거죠.
대표팀 막내였던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상을 받았는데, 좀 특별했던 상이었어요. 사실 게임은 거의 뛰지 못했기 때문에 라면 끓인 기억밖에 없어요. 전 ‘미스 월드 바스켓상’을 받았죠. 정말 기대도 안 했던 상이었어요. 제 딸(케이블 VJ 서효명)이 절 닮았나 봐요? 하하. 콜롬비아에서 받은 건데 에메랄드 보석이 7개나 박혀 있는 브러치도 받았죠. 지금도 제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데, 당시 언니들 시샘으로 뺏길까봐 조심스럽게 가져온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 보면 복이 참 많았어요.
이후 최우수상, 인기상을 수없이 수상하셨잖아요. 어떤 상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4년 뒤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는데 한국이 2위를 하고, 제가 세계 베스트 5에 들어간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1976년부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준우승 한 번 빼고는 계속 우승을 차지했죠. 게다가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세 번이나 나갔으니, 오래도 뛴 거죠.
태릉선수촌에서 경쟁도 많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각 팀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데다 190cm 가까이 되는 선수들도 저까지 4명이 있었죠.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도 있었고, 대놓고 미움을 받기도 했어요. 결국 저만 살아남았지만, 다른 선수 엄마들이 우리 엄마한테 ‘찬숙이 때문에 우리 애들이 죽었다’며 싫은 소리도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시기와 질투를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전 그런 시기나 질투가 오히려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잘 하고 있다는 증거잖아요. 상대가 바보처럼 느껴졌어요. 더 이기려고 노력을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선수들한테는 미안하기보다 ‘더 잘해서 완전히 기를 죽여야지’라는 마음이 많았어요. 운동에 있어서는 냉정해야 된다고 봐요.
태릉선수촌에서 여자농구의 위치는 어땠나요? 여자농구는 꽃이었죠. 가장 예의 바른 팀도 항상 여자농구였어요. 은퇴할 때쯤에는 선수촌장이 중매를 서려고 하기도 했죠. 그만큼 예뻐하셨던 거죠.
선수촌 내에서 스캔들 같은 건 없었나요? 알게 모르게 연애한 선수들도 많았지만, 전 눈길 한 번 안 줬어요. ‘운동을 해야지 어떻게 연애할 생각을 하냐’라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 게 매력이 됐던 것 같기도 해요. 특히 유도선수들이 관심을 많이 주더라고요. 당시 김재엽 선수(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도 친동생처럼 지냈는데, 꼭 와서 응원하고 일대일 농구하면서 놀기도 했죠. 선수촌에서 연애를 못 해본 게 아쉽기도 해요.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인대 수술로 대표팀을 포기할 뻔했다고 들었어요.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한 조승연(현 삼성썬더스 단장) 감독님께 정말 감사드리죠. 당시 무릎인대가 찢어지면서 나이도 25살인데다 몸이 아프니까 자신감도 떨어졌죠. 갑자기 은퇴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거예요. 그런데 감독님과 면담을 하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판단은 네가 하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껏 이뤄온 모든 것은 물론이고 넌 그냥 잊혀진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울면서 어리광 피우는 저를 현명하게 설득하신 거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갔으니까 핏대 세우며 강하게 훈련했어요.
1984년 LA 올림픽 이야기가 가장 궁금합니다. 중공을 꺾고 한국 구기 종목 최초로 은메달의 쾌거를 이뤘습니다. 영원히 못 잊을 순간이죠. 목표는 메달이 아니었어요. 유일하게 이길만한 팀은 호주뿐이었거든요. 첫 게임 상대가 캐나다였는데 국제 대회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팀이었죠. 제가 캐나다 센터만 만나면 기가 죽었거든요. 연습장을 가는 길에 캐나다 선수단과 우리 선수단이 우연히 마주쳤어요. 감독님끼리 말씀을 나누시더니 상대 감독이 “우리만 이기면 메달에 자신 있다”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상대가 한국이 무서운 팀이라고 느낀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신감이 막 생기더라고요. 감독님도 “봐라, 널 무서워하고 있잖아”라고 말씀해 주셨죠. 그리고 캐나다를 잡은 거예요.
숙적 중공과 준결승에서 만났잖아요? 캐나다를 이기고 나니까, 2m가 넘는 선수들이 즐비한 유고슬라비아를 만나게 됐는데 우리가 정말 하나가 돼서 또 이겼어요. 오히려 호주를 상대로 힘겹게 이기고 중공을 만나게 된 거죠. 3, 4위전 가면 다시 이기기 힘들다는 생각으로 중공을 상대했어요. 오전 9시 경기였는데, 전 밤새 어떻게 하면 중공을 상대로 이길 수 있나 고민하는 꿈을 꾸며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더라고요. 돌아서서 슛을 던지면 다 들어갈 정도였죠.
라커룸에서 눈이 붇도록 눈물을 흘리셨다고요.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진짜냐고 서로 꼬집어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정말 은메달이니?”라고 서로 물으며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그런 기분은 경험 못하면 몰라요. 감독님이 “야 임마, 너희들 연금도 타잖아”라고 말씀하시는데, 생각지도 않은 연금 소리에 다시 소리를 질러댔죠. 연금 액수보다 국가유공자가 됐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웠어요.
당시 1천명이 넘는 교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를 합창했다던데요. 기억이 정말 생생해요. 관중들이 응원하러 많이들 오셨는데 LA에서 경기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응원 열기가 대단했죠.
올림픽 이후 12월 상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독감 투혼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독감이 아니라 식중독으로 엄청 고생했죠. 링거 10개를 꽂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계속 토하고 설사하고…. 저 없이 30점 지고 들어오는 것을 병원에서 TV로 보는데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제 침대 주변에 선수들이 모였는데, 결승전은 코트에서 쓰러져 죽더라도 뛸 거라고 다짐했죠. 서 있기만 해도 상대에게 위협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어지러운데도 억지로 버텼어요. 중공 선수들도 안 나올 줄 알았던 제가 나와 당황하더라고요. 결국 중공 적지에 들어가서 올림픽 이후 다시 이긴 거죠. 마지막 국제대회에서 또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은퇴를 화려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80년대는 스포츠 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관심이 많았잖아요. 특히 중공만 이기면 바로 전화를 하셔서 정말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요. 청와대 초청도 해주시고, 가끔 국내 대회에도 나오셔서 밥도 사주시고, 옆에서 같이 밥을 드실 정도로 정말 예뻐해 주셨어요. 그런 관심이 정말 큰 힘이 됐죠.
1985년 3월 10일 태평양화학에서 돌연 은퇴를 하셨어요. 빨리 시집가려고요. 75년부터 85년까지 대표팀을 하는 것이 너무 지겨웠거든요. 시집가면 농구랑은 담쌓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바로 시집갔어요. 그만큼 단순했죠. 그런데 딱 3년만 그랬고, 그 뒤로는 다시 농구로 연결되더라고요. 죽을 때까지 농구와는 인연을 못 끊을 것 같아요.
결혼 후 삶은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너무 좋았죠. 내 마음대로 잘 수 있다는 것이 우선 너무 행복했어요. 대표팀에 있으면 새벽 5시 반에 기상이잖아요. 전 현모양처 스타일이 잘 맞을 거란 생각으로 은퇴를 했는데, 애 기저귀 빨고 남편 기다리는 일상이 저랑은 안 맞았나 봐요. 주위에서도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요. 그 때 느꼈죠. ‘난 개인이 아니라 이미 공인이구나.’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다셨어요. 올림픽 은메달도 그랬지만, 최초의 주부선수셨잖아요? 1988년에 대만 백금보석에서 제안을 해서 갔는데 팀 사정상 난야플라스틱으로 옮겨서 4년간 선수 겸 플레잉코치를 하고 1992년 국내 무대로 복귀했어요. 그 때만 해도 여자는 시집가면 선수 생활은 끝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자기 관리만 잘하면 가능하다고 봐요. 저도 애를 낳았는데 몸이 너무 가벼웠어요. 혼자 헬스클럽 가서 스스로 몸을 만들었죠.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되더라고요.
1998년 완전히 농구 코트를 떠났다가 다시 2005년 7년 만에 28회 윌리엄 존스컵 국제농구대회 여자대표팀 코치로 돌아오셨어요. 역시 최초의 대표팀 여자코치였어요. 당시 박명수 감독이 후배였는데 꿈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는 자세로 경험 삼아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도자로서 정식으로 신고를 하게 된 거죠. 권한은 감독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코치는 서포터일 뿐이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동아시아대회 감독을 얼떨결에 했는데, 그런 게 연결이 계속 안 되더라고요. 프로팀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웠죠.
지금까지 여자농구 감독은 남자들의 전유물인데, 다시 도전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금은 마음이 굉장히 후련하고 편해요. 보여줄 건 다 보여줬고, 잘못된 것은 정당하게 제 생각을 표출하기도 했고요. 이제는 마음을 싹 비워서 미련이 없어요. 후배들 중에 기회가 돼서 여자 감독이 나오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응원해주는 일만 남은 거죠. 여자가 감독이 되더라도 아직 혼자 다 하지는 못한다고 봐요. 여자가 감독을 하고 남자가 서포터를 해주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농구인 박찬숙은… 1959년 6월 3일 서울 출생인 박찬숙은 1980년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울린 한국여자농구의 간판스타다. 숭의초교 5학년 때부터 농구공을 잡기 시작해 숭의여중·고를 거쳐 태평양화학과 대만에서 코치 겸 선수 생활을 했다. 1975년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10년간 대표선수로 활약하며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8년 은퇴 후 해설위원, 국가대표 코치 및 감독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체육회 부회장 및 이아이팩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글 서민교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인 제공
JUMPBALL 2009년 01월호(발행일 12월 25일) 기사
첫댓글 화려한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