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35
ㅡ 삼국시대에 대한 궁금증 3 ㅡ
(삼국시대 삼국 언어는 서로 통했고, 자유롭게 왕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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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79회 '광복절'입니다.
이번 광복절은 최악의 반쪽짜리 광복절이 될 것 같습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및 여러 광복단체와 독립투사후손단체등 그리고 민주당, 조국신당, 개혁신당까지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을 안 하겠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김형석'이라는 뉴라이트로 의심받는 친일인사를 '독립기념관 관장'에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사에는 얼마 전,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후보 청문회 당시 위안부 강제성에 대해서 논쟁적인 사안이라며 명확하게 답변을 안 했던 '이진숙' 위원장이 오늘은 뉴라이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가 몇 회 광복절이냐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다"라는
이런 답변을 추가했습니다.
윤대통령은 왜 이런 인사들만 고르고 골라서 이런 자리에 임명하여 이 더운 날씨에 많은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확 높이는 걸까요?
일부러 그러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참말로 짜증나붑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광복절이면 광복절에 관한 글을 올려왔는데 저도 짜증나서 오늘은 안 올리렵니다.
대신 어제 올린 <삼국시대 언어 소통과 교류>에 관한 제 글에 대해 조금은 반대의견이었지만, 완벽한 보완설명 글을 올려 주신 분의 글을 올려드립니다.
사실, 삼국시대 서로 간 언어 소통은 당시 말로 녹음된 것이나 글로 기록된게 없으니 정확한 실상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뭘 알겠습니까?
단지 인터넷등 여러자료들을 보고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지요.
제가 참고한 여러자료들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 여러상황들을 살펴보고 추정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어제 제 글에 아주 길게 여러차례에 걸쳐 댓글을 달아주신 분은 확실한 역사기록들을 토대로 제 글에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워 주었습니다.
<삼국시대 언어 소통>에 관해 여러분들도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 분 댓글들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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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댓글;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의견이 있어 댓글을 남깁니다.
위에서 언급한 서동설화 뿐만 아니라 낙랑공주 이야기등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이야기들을 보면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면 이야기 성립이 안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예를 든다면 제주도의 방언을 못 알아 듯는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못 알아 듣는 것은 단어들 뿐이라 단어들만 알면 다 알아 들을수 있습니다. 몇천년 동안 단절 되어 살아간 섬 사람들의 언어인데도 말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간 의사소통에 관하여 유추할수 있는 문장들이 있는대요 소개하자면,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 들로 미루어 보아 ''황산벌'' 이라는 영화에서 처럼 일부 단어들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로 언어가 다른 종족간의 전쟁등으로 인한 통합은 몇천년이 지나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없다는 것도 이유입니다.]
위 댓글에 대한 내 답글;
[상당부분 님 논조에 공감이 갑니다.
글지만 낙랑공주이야기는 이해가 안됩니다. 낙랑공주는 중국어를 썼을 것인데 그랬다면 고구려어가 중국어랑 의사소통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호동왕자만 중국어를 썼다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오리지날 제주도 방언을 들으면 20% 정도나 알아듣을까요?
제 본문에도 말했듯이 몸짓 손짓으로까지 하면 의사소통정도는 가능했겠지만 님이 설명하듯이 왕이나 사신들 외교적인 자리에서는 통역이 필요했다 봅니다.
님이 든 예시는 후에 기록할때 통역은 빼고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내 답글에 대한 그 분의 재 답글;
[燭籠(초롱)박철홍전남담양60 삼국사기에 소개 드렸듯 통역을 썻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후대이기는 하지만 고려와 발해의 경우 통역을 두지않고 서로 말이 통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 대방, 낙랑은 한나라의 지방관이 파견 되었다거나 한나라 에서 직접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또한 한나라 주민이 낙랑 대방에 이주하거나 낙랑, 대방의 주민을 이주시겼다는 기록도 없구요...
그렇니 낙랑이 한나라의 주민이 살던 지역에 있지 않는 이상 낙랑이 중국어를 사용 하였을 것 이라는 주장은 잘못 된 추론 입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이 독점하던 초원길 무역의 이익을 차지 하였을 뿐 그 지역을 자신의 나라로 편입한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곧 죄목을 헤아린 다음’ 죽였다. 백제 항복 당시 신라태자 김법민(金法民, 후일 문무왕)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꾸짖는다’. ‘열전’, ‘김인문’ 편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이 잡히자 ‘인문이 고구려왕을 당의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었다. 고구려왕이 두 번 절을 하자 영국공이 그에게 답례했다’. 김인문은 보장왕에게 직접 말을 했으며 영국공은 보장왕이 절을 하자 몸짓으로 답례했다는 것이다. 그 외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삼국유사>, ‘기이’ 제2) 등,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마지막 단서는 중국 ‘24서’ 중 하나인 <양서(梁書)>, ‘동이열전’, ‘신라’ 편에 나오는대.
‘신라는 문자가 없고 나무를 조각하여 편지를 했다. 말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이 통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백제인과 신라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 국어학자들은 <삼국사기> 34~37권에서 삼국의 지리가 한자로 기록된 것을 거꾸로 유추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찾으려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글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원래의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많은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그 기원을 추적하면 삼국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중국 고대 진(秦)에서 수-당 시대 중국어의 변천과 우리말의 변천을 통해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설명이 전문적이어서 제가 이해하기 많이 힘 들었습니다.
결론으로 말 하자면.
'황산벌' 의 영화적 표현은 고증에 충실 하였다 볼수 있으며 당시 삼국은 지금의 사투리 정도의 차이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국경선이 지금처럼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경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큰 산맥이나 강에 가로막히지 않았다면 서로 왕래와 의사 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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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역사 지식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저도 이 분 글에 많은 부분 공감이 갑니다. 또 이 분 글처럼 삼국이 같은 민족으로서 통역없이도 언어소통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면 좋겠습니다.
어제 쓴 제 글은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역사학계 통설은 "삼국시대 서로 간 언어소통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외교 군사적 중요한 소통에는 통역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백성들도 언어소통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게 진실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두 주장 모두 추정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주장 중 어떤 주장이 더 논리적으로 와 닿는 가요?^^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