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수당(휘 수민)의 묘
공의 휘(諱)는 수민(秀民) 자(字)는 자빈(子賓) 호는 춘수당(春睡堂) 또는 동리(東里)이시고, 문헌공(汝昌)후 동지공(彦男-언남)의 둘째 아들이시다.
공은 1577년(선조 10년 丁丑)에 태어나셨으며 인조(仁祖)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군자감(軍資監)의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공은 천성이 순박하고 청렴검소하였으며 효우(孝友) 또한 남달리 지극하셔서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항상 즐거운 표정과 공손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또 부모님의 거상(居喪)에는 그 예(禮)를 다하여 3년동안 부모님의 묘소(墓所) 옆에다 초막을 짖고 시묘(侍墓)를 하시면서 복을 마치셨다.
그리고 공은 남을 속이지 않는것을 위주로 수신(修身)하시고 집안은 가난 하셨지만 학문을 탐구하고 학덕을 쌓는데는 구차 하지 않으셨으며 생활은 부화(浮華)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에게 글을 배우면서 예(禮)를 설하는 곳에 참석하여 묻고 또 경서(經書)의 뜻을 깊이 탐구하니 선생께서 공의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시고 학문을 깊이 연구해 보라고 하시었다.
공은 학문을 깊이 연마하여 항상 안빈낙도(安貧樂道)하시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시니 먼곳에서도 공에게 글을 배울려고 많은 학도들이 찾아왔다. 그래서 공은 제자들을 잘 가르치기 위하여 계속 스승의 문하에 출입하시면서 스승의 도의(道義)를 배우는데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소임에는 꾸밍이 없이 진실되게 하려고 힘쓰셨다.
그리고 언제나 고을이나 마을 앞을 지날때는 비록 밤이라 보는 사람이 없을 지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서 가셨으며, 혹 사람들을 만나서 그 앞을지날때도 말에서 내리시고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셨다.
또 공이 말씀 하시기를 “군자(君子)의 배움중에 가장 귀중한 것은, 남을 속이지 않는 마음 가짐인데, 어찌 남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이루지 않으면 되겠는가”하셨다. 공은 항상 고향을 사랑하시고 선현(先賢)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과 부충효열(夫忠孝烈)을 추모하여 그 행적(行蹟)을 일일이 기록하여 싫고 또 산천(山川)과 속요(俗謠) 및 토산명(土産名)을 수집하여 천령지(天嶺誌)를 찬하고 문헌공(文獻公)의 유적(遺蹟)을 모아 한강(寒岡)선생의 교정을 받아서 문헌공 실기를 간행(刊行)하여 세상에 전하고 있으며, 또 화개도(花開圖)도 저작(著作)하시고 명현록(名賢綠)과 문집(文集)도 같이 전하고 있다.
1658년(효종 9년. 戊戌) 5월 15일에 향년 82세로 별세하셨으며 뒤에 효행(孝行)으로 통훈대부 장악원정(通訓大夫 掌樂院正)에 추증되셨다.
1838년(헌종 4년. 戊戌)에 도곡서원(道谷書院)에 향사(享祀)하고, 정한강(鄭寒岡)선생의 후예인 참봉(參奉) 정치흠(鄭致欽)이 공의 행장(行狀)을 찬하고 묘갈명(墓碣銘)은 문헌공(文獻公) 사손(祀孫) 증 참의(贈 參議) 재기(在箕)공이 찬하였으며,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은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찬하였다.
묘소 입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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