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수종자로 일생동안 수고도 많이 하였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둥병이 걸려서 최후를 비참하게 마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일생동안을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던 하나님의 종들이 말년에 신앙으로 실패를 한 사람들의 기록을 종종 보게 됩니다.
신앙의 생활을 체험하고 은혜의 진미를 맛본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위하여 일생동안 수고를 하고 말년에 신앙적으로 실패를 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제적 실패는 다시 회복할 수 있고 정치적 실패는 다시 성공할 수 있지만은 신앙의 실패는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신앙의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1. 탐심 때문에 불행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의 군신 나아만이 문둥병으로 신고하다가 엘리사를 방문하여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아만은 많은 은과 비단으로써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렸으나 엘리사는 한가지도 받지않고 물리쳤습니다. 나아만은 이적에 한번 놀랐고 엘리사 선지의 청렴에 두번째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귀로에 올라 차탄우행(嗟歎又行)하는 도중이었습니다.
나아만의 예물을 엘리사가 거절하자 게하시는 탐심이 생겨서 돌아가는 나아만 장군에게 가서 엘리사의 말씀이 두 소년이 에브라임에서 왔는데 그 소년에게 옷 두벌과 은 달란트를 주라고 하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두 달란트를 주었는데 게하시는 이것을 감추고 돌아오자 엘리사가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속였습니다. 그리하여 게하시는 그만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옷 두벌과 은 두 달란트가 얼마나 됩니까? 이적은 물질의 탐심을 이기지 못하고 엘리사를 속이고 나아만을 속였습니다. 게하시는 여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이기지 못하면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실패하는 이들이 대부분이 탐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고 가룟 유다가 그랬고 롯의 처가 탐욕 때문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 게하시의 죄는 참으로 큰 죄였습니다.
2. 때를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26절에 "엘리사가 이르되 그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아만으로부터 얻은 돈으로 감람원 포도원 우양 등을 사려했던 게하시의 생각을 엘리사가 간파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보면 게하시는 착복한 재물을 팔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것같다.
성도는 게하시처럼 물질에 대한 탐심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고"(약 1:15) 했습니다. 게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려고 한것이 아니고 자기의 계획으로 축복을 누려보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생각할것은 저에게도 축복을 받을 시기가 다가오는데 그 시기를 참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분명히 엘리사의 이말은 저의 축복이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한데 저는 그 영적 지식이 부족해서 그 사실을 내다보지 못한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마치 발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나귀는 주의 사자를 보았는데 그는 그것을 못보고 나귀만 채찍질한 것이나 같습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는 영안이 열리어야 하겠습니다.
3. 그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불행을 당했습니다.
22절에 "저가 가로되 평안이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고 했습니다.
게하시는 설명하기를 에브라임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 중 어린 생도들이 갑자기 엘리사를 방문했다는데 이 소년들이 돈과 의복을 요구하면서 엘리사가 지금은 한달란트와 의복 두벌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상 나아만이 원래 주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억지로 청하여 게하시에게 한달란트가 아니라 두달란트를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물들을 감추었습니다. 그후 그는 동방의 종들이 하는 습관대로 가서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마치 나아만이 출발한뒤에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꾸민 것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게하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게하시는 적어도 자기가 한 일은 자신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했으나 엘리사는 게하시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게하시는 신뢰를 깨뜨린 것입니다.
"신뢰란"(신용하며 의로함 남을 믿고 의지함)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신뢰를 했습니다. 한대 게하시가 그 신뢰감을 깨뜨린 것입니다. 게하시의 행동은 우선 그의 주인이 그에게 가졌던 신뢰의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크게 신뢰받는 동료이기도 하였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함께 있다가 그 자체가 큰 영향력을 가진 특권적인 위치였습니다. 엘리사의 종이라는 것 자체가 이방인이 두려워하는 명예로운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게하시가 탐욕스런 욕망에 굴복하며 나아만을 따라가 보물을 달라고 한 게하시의 행위가 엘리사의 눈에 악하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종교의 사역을 크게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여 하나님을 실망시켜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이 믿어 줄 만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믿어 줄 만한 신자 총애를 받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5. 자기의 위치를 탈선하였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은 선지자의 주권하에 움직이어야 했습니다. 한데 저는 자의의 행동을 했습니다.
여기 "네가 어디서 오느냐"했으니 저의 행동의 소재를 밝히지 아니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저의 크나큰 화근이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큰 죄를 범했습니까. 저는 예수님에 전도 대열을 자주 이탈하여 대제사장들과 접촉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에 사명에 위치와 교회에서의 위치가 어디인가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은 우리들이 해야할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배시간에 잘 참석하지 아니하는 신자 그 신자는 꼭 병이 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탈하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행동 인것입니다.
이제 원하기는 자기의 위치를 탈선하여 게하시아와 같이 불행이 되지 아니하도록 금년에는 주어진 사명에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6.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게하시는 진실이 없어서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칭찬하신 것은 (요 1:47)"보라 이는 참 이스하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참 성도는 이같이 마음이 간사함도 없이 진실해야 합니다. 간사하고 거짓된 것이 있으면 주님은 칭찬을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진실된 인간 영혼이 모든 자연적 미덕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참 종교, 용기, 정의, 절제 등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진실하고 공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는 것도 사도들의 목소리인 동시에 우리안에 있는 진실성의 목소리입니다. 성도들의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를 구하도록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진실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그의 성례전 안에서의 은총을 찾도록 인도하는 것도 역시 우리 안에 있는 진실성입니다. 진실 그것은 모든 도덕적 종교적 진보를 위한 하나의 조건입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에 역사를 나타남을 보고 체험하고 은혜를 충만히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인 것을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앞에 양심에 가책이 되는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7. 선지자의 책망으로 불행을 당했습니다.
27절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게하시가 받은 형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게하시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문둥병자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병이 자손 대대로 유전 되리라는 것입니다.
게하시의 처벌은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게하시의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것을 고려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처벌의 공·의를 분명이 발견하는 동시에 나의 행위이며 무엇 보다도 진실이 결열 되게 살지나 아니 했나 자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게하시는 불행의 생을 마추게 된것입니다. 주님에 이적중 가나 혼인 집의 기적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좋은 포도주가 풍성했는데 게하시는 나중이 더 불행했습니다.
결 론
(눅 23:42)에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 십자가상에 한편 강도는 마지막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나중이 더욱 불행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