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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이씨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민영
사봉 이극돈, 대문장가요, 청렴강직의 선비이자 외교가, 국승의 정치인
序
이극돈은 문장가요, 청렴강직의 선비이다. 생의 관직을 전부 3司의 司儀에
종사하면서 不正과 挾雜을 배격하고, 세조 성종 연산 중종대의 혼군 亂世를
바로잡으면서 조선조의 왕권정치체제를 반석위에 올린 정치인이요
全國의 관찰사를 수번 겸임하면서 地方政治의 기틀을 조신한 行政家이다
또한 해박하고 깊은 지식의 문장가로, 명나라에서 조차 부러워하는
외교가이다. 후에 士林의 집중적인 견제와 압박를 받아서
모함과 사화의 연유로 배척을 당했으나
이는 朋黨 談論의 爭訟을 즐겨하는 士林의 배타적인 협의에 기인한 평가로,
역사적인 實體와 먼거리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김일손 사초파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당시 사림세력은, 유자광과 더불어, 이극돈을 모함하였다.
사화나 쟁송의 모함은 전부 이런 이유였다.
그만큼 이극돈은, 內外가 존경하는 조정에서 代表的인 덕망의 훈구대신으로
이극돈을 없애야만 사림의 붕당을 즐겨할 수가 있었기에,
김종직의 일문하들이 모함을 한 것이다
現今 이극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중이다
박홍갑(2007), 「이극돈의 생애와 역사적 평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극돈(李克墩, 1435∼ 1503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 외교관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의 동생이다.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관에 녹선되고,
광원군(廣原君)에 봉군되었다. 자(字)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사봉(四峯)이며
시호는 익평(翼平),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그의 부친 이인손과 형 이극배, 동생 이극균 3부자가 정승을 지내고 나머지 형제들도
판서를 지냄으로써 형제가 모두 작위를 받고 봉군되어 형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과 함께 5군으로 불렸으며, 종형제인 이극규, 이극기, 이극견 등을
포함하여 8극으로 불리기도 하며, 광주 이씨는 당대 제일의 가문이 되었다.
出生과 家系
사봉 이극돈은 1435년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다섯아들중 네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려시대 말기에 신진사대부와 교류하던 둔촌 이집 (遁村 李集)의 후손으로,
탄천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다.
그의 형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이 5형제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고려말기에 그의 증조부였던 둔촌 이집 (遁村 李集)의 5형제가 모두 등과하였던
연유로 5자 등과 집안으로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종형제인 이극규, 이극기,
이극견 등과 함께 고위 관직에 활동해 8극으로 불렸다.
그의 다섯 형제들 모두 봉군되어 5군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살았던 신문로2가 부근이
해방후까지 5군골로 불려왔다. 금부도사로 연산군의 모후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다가
멸문당한 이세좌는 이극돈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영민하였다.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전농시주부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세자시강원필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글을 잘 지어 칭찬을 들었으며,
경전과 고전의 지식이 해박하였다. 특히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의 글을 잘 지었다.
1467년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2월 중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청렴강직한 사의로, 부정과 부패 관료들을 혁파함
부정을 보면 참지못하는 청빈의 선비로 사의에 있을때 유양춘의 패륜에 있어서
유양춘이란 자가 2월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에게 양육되었으나, 뒤에 송사를 제기한 유양춘(柳陽春)을 규탄하고,
"유양춘(柳陽春)은 어릴 때에 그의 어미의 아우인 현득리(玄得利)에게 붙여 양육되었으니,
은혜가 아비와 같은데도, 이에 장고(狀告)를 발하여 꾸짖고 욕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습니다. 그 아비가 양(羊)을 훔쳤다고 아들이 증언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유양춘은 경박한 행동을 한 사람이니, 청컨대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만약 그 재주로써 시험에 나아가기를 허락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권려하고 경계를 보이겠읍니까? 또 신 등은 듣건대 한 사람을 상(賞) 주어서 천만 인(千萬人)을 권려하고, 한 사람을 벌(罰)주어서 천만 인을 두렵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양춘과 같은 자는 심행(心行)이 불초(不肖)하니, 허통(許通)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허통을 취소시킬 것을 청하였다.이어서 둔촌할아버지와 형제간인 諱희령의 따님 익산군 홍순의 손자이자
개국공신인 홍윤성(洪允成)이 전횡을 부리고 노비를 시켜 사람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힌 여죄수를 강간하는 사건이 나자, 주위의 만류도 듣지아니하고,이의 잘못을 탄핵, 치죄할 것을 청하고. 3월 죄인 김석을산(金石乙山)에게 벌을 주려다가 의혹이 있자 왕명을 받고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조간(曹幹) 등과 함께 심문하였다.
그러나 홍윤성의 잘못이 처벌되지 않자 그는 계속해서
홍윤성의 처벌을 청하는 탄핵 상소를 올리는등
사간에있으면서 정화에 앞장선 것이다.
또한 성종 즉위 초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관리들과 문제있는 신려들을 탄핵, 규찰하였다.
1470년(성종 1년)초에 자신의 형 이극배(李克培)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셋째형 이극증(李克增)은 도승지(都承旨)인 점을 들어
자신은 재상에 있으면 안된다고
청하여 현직을 사퇴하는등 강직한 면모를 보인 것이다
국서의 편찬과 감수활동, 문장가
1468년 3월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동년 6월 통정대부 예조 참의로 승진하였으며, 1469년(예종 1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계감청 당상(繼鑑廳堂上)의 한사람이 되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수하였다. 동년 4월 한성부 우윤이 되어 1계급 특진과 제집사(祭執事)직을 겸직하였다. 그해 9월 다시 한성부우윤, 10월 수 사헌부 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바로 사헌부 대사헌,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왕명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71년(성종 2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관에 녹훈되었고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에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 완간하였으며, 성종때에도 왕명을 받들어 1483년(성종 14) 강목신증(綱目新增), 1485년(성종 16)에 성종의 서거정(徐居正)·정효항(鄭孝恒)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편찬, 발간하였다.
외교 활동과 지방행정의 혁신,왕도정치의 구현
1472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광원군(廣原君)에 임명되었다. 그해 처당숙인 권호(權瑚)의 일에 연루 사헌부 장령 허적(許迪)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73년 호조 참판을 거쳐 동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다녀왔고, 1474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폐비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책봉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1478년 병조참판,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을 거쳐 1479년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
148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때 한명회, 양성지 등의 비행을 규찰하여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이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강원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국상에 장흥부에 간일로 김일손(金馹孫)이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려한 일로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경상도영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487년(성종 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94년 이조 판서에 이어 병조판서, 호조판서, 5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과 우찬성을 거쳐 다시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의정부의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성종때부터 훈구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신진 사류인 사림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1497년 경연지사, 의정부 좌찬성, 의금부 당상을 지냈다.
사림파와의 갈등 그리고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 당상관을 역임하였다.
1498년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意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고는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했으나 효과가 없자,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알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
사실이 아닌 것으로 실록청의 당상관일뿐 사초에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극돈이 죽은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중종즉위 이듬해 유자광을 탄핵하였는데
유자광에게 무오년의 (무오사화)일에 대해 문초하자
유자광이 처음에는 허침에게서 들었다고 하여
그럴리없다고 추국하자 이극돈이 알려줬다고 거짓 토설한 진술로 인해
사림으로부터 유자광과 함께 이극돈이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 지목되었고 사림측의
잘못알려진 기록으로 후세까지 유자광과 함께 반적으로
오도된 것이다. 즉
무오사화때 유자광은 김종직의 저서들과 조의제문 사본을
의금부와 형조의 형관들에게 제출하고,
원본에 해석과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전달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는데 이에
연산은 김종직이 세조의 부름을 받아 세조의 녹을 받았으면서
주군을 배신했다며 김종직과 그 문하가 주축인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극돈 또한 당시 실록청의 사관으로서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
김전(金詮) 등과 함께 김일손의 사초를 알고도 연산에게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
중종 때, 파직을 당하였고, 후에 다시 복권, 광원군에 봉해진 것이다.
1501년(연산군 7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년) 1월 병조의 업무가 중함을 들어 스스로 병조판서에서 사퇴하고, 그해 2월 2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향년 68세였다. 죽은 뒤 익평(翼平)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뒤에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으나 중종6년 이세정의 상소에의해 환급되었다.
사후 재복권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대원근린공원 뒤 능선에 안장되어있다.
1511년(중종 6년) 6월 아들 병조 참의 이세정(李世貞)이 그를 신구, 변호하며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중종이 특명으로 그의 직첩을 되돌려주었다. 바로 김종직의 문하인인 홍문관 부제학 이세인(李世仁)이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상소했으나 왕이 거절하였고, 또한 반대파이자 김종직의 문하인 예문관 봉교(奉敎) 유중익(兪仲翼)은 그가 유자광을 사주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며 환급의 반대를 상소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양사에서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계속 상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으며 추후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이지직(李之直, 1354 - 1419, 호는 탄천(炭川), (태종)이조참의,정몽주의 문인)
아버지 : 이인손(李仁孫, 우의정, 1373년 ~ 1463년 윤 7월 13일)
형님 : 이극배(李克培, 영의정 광릉부원군)
형님 : 이극감(李克堪, 형조판서 광성군, 시호는 문경, 영의정을 지낸이준경의 증조부)
형님 : 이극증(李克增, 우찬성 광천부원군)
동생 : 이극균(李克均, 좌의정 광남군, 5대손은 영의정 덕형(德馨)))
부인 : 안동권씨(安東權氏)
아들 : 이세전(李世銓, 부사)
아들 : 이세경(李世銓, 돈령부 첨정)
아들 : 이세정(李世貞, 1461 - 1529, 도승지,전라감사)
손자 : 이수완(李秀莞, 판관)
손자 : 이수진(李秀蓁)
역사적인 평가, 정치인, 행정가, 문장가, 치밀하고 까다로운 성격
가풍인 근칙 현행의 선비로 사림등과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
세조, 성종 대에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관으로 중용되었을 뿐 아니라 국방, 외교, 내치에 골고루 업적을 남긴 관료였다. 글을 잘 지었으며, 전례(典禮)에 밝고 경학과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실록에는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고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서 한때의 추앙한 바가 되었지만, 성격이 너무 까다로워 털끝만한 일도 파고들었다.'고 평하였다.
이극돈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정국을 이어갔던 때였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으로 대표되는 삼사의 역할과 위상이 고조되어 의정부,육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국정운영의 한축으로 떠올랐던 시기였으며, 조선 건국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과전법이 붕괴되어 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렇듯 혼란한 정국속에서 훈구세력을 대표한다고 알려진 인물이 다름아닌 이극돈이었다.
이극돈이 성종 초기에 사헌부 대사헌 신분으로 시무12조라 일컫는 상소문을 올려 왕으로 하여금 국정전반에 걸친 폭넓은 개혁을 주창하였으며 차서를 구애하지 말고 발탁하여 등용 할 것 등을 요구한 것은 당시대의 사대부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인 주의주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왕으로 하여금 국가 원로 등이 총 동원되어 사안별로 검토케 했으며 국정운영에 적극 반영되게 한 실천적 리더십으로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이극돈은 조선 초기 훈구와 사림세력의 갈등 구조 속에서
훈구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가 죽은 이후에는 사림세력들이 집권하여 정권을 유지해 갔기에,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무오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도리어 국왕에게 미리 실록의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는 점은 역사 평가 작업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을 최초로 발설한 인물인 유자광에게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알려준 인물로 지목되어, 사림들에게는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로 잘못 알려져 두고두고
사가의 비판 대상이 된 것인데 이는 잘못된 역사기술인 것이다.
그가 사림파로부터 견제와 모함을 받은 것은 당시 왕권보위에 중추적인
훈구대신으로 중심에 있었기에
언제나 사림과는 대척점에 슨 인물로 잇었기 때문이다,
나중 중종집권수년후에 무오사화가 이극돈의 연유가 아닌것이 밝혀져서
중종 1511년이세정의 상소에 의해 복권되었으나,
이후 조광조 등 사림의 진출과 1565년(명종 20년) 훈구파의 몰락,
그의 후손인 광해군시대의 명신 간송 이이첨이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하면서
이극돈은 유자광과 더불어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다
이모두 붕당과 예송에 치우친 사림붕당정치의 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동정 여론과 복권 논의가 나타난 것은 1910년(융희 3년) 조선 멸망 이후부터였다.
무오사화의 원흉설은 거짓과 모함에 근거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림이 붕당의 권력유지을 위해서
제거의 대상으로 이극돈을 택한 것이다, 왜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무시못한 혼조의
정국대신으로 내와 촉망의 신하이기 때문이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기사를 정리하다가, 당시 실록청 당상이었던 윤효손으로부터 사림파의 지도자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에 대한 처리 방안을 협의 받고, 그는 이 〈조의제문〉이 성종대의 역사에 세조의 행적을 싣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사초를 봉하고 일체 발설치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다음날 유자광,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秘事(비사)를 아뢰기를 청하면서 도승지 신수근으로 하여금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사관의 참여를 막아서 유자광등이 어떤 경로를 통해 '세조조의 일'이 김일손의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즉 임금에게 보고 하면서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는 당연히 보고되었을 것인즉 자광이 사초의 일을 연산에게 말했다면 이극돈이 연산으로부터는 즉시 보고치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삭탈관직에 4개월간 유배생활을 당하기보다는 상을 받았을 것이나, 사림파들로부터는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몰렸었다.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 등 역사에 의하면 무오사화로부터 피해자인 그가 가해자로 몰린 아이러니는 사림과 훈구의 갈등 속에 사림파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은 까닭이
아닌가,
기타 광해군 때의 훈구대신 이이첨과 재평가작업
광해군 때의 대표족인 중신 이이첨은 그의 5대손이었다.
조선을 개국할때, 개국의 태조를 도운 이방원 같은 분으로 치세의 상신으로,
관송 이이첨은 광해군의 왕권과 국승을 공고히 하였다. 특히 이분은 집안의 내력이 그리하듯, 문장가요, 청렴하고 강직한 품성으로 상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상 삼베옷을 입고다녔다.
근검 검소한 것은 모범이요, 권좌를 이용하여 사익을 취한다거나 사사로움이 없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제거되면서 마지막 거두인 이이첨이 죽으면서 아울러
훈구파가 몰락하고되고 사림이 득세를 하게된 연유가 되는 것이자
이극돈에 이어서 반정공신들과 사림으로부터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또한 잘못된 역사평가이다. 20세기에 이르러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조선조 중흥의 군왕으로 평가를 받게되는 것은 이이첨의 강력한 보좌를 받았기 때문이다
현명한 다스림때문이다.
이이첨의 일족들은 선대 둔촌 이집으로부터 9대에 걸쳐 한번도 빠짐없이 문과 급제를 한
조선역사에 보기 드문 내력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세간으로 부터 무시와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대문장가인 이극돈은 당대에서 따를 자가 없었다
외교문서의 작성은 물론 각종 실록의 판찬과 문집의 발간등은 이극돈이 한 것이다
세조때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경국대전편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세조실록의 편수관으로, 성종실록 편찬시 지관사로 참여했으며, 예종때는 무정보감을 직접 편찬했고, 신목강증을 노사신 이경동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무정보감은 조선 건국초부터 예종당대까지 발생했던 국내의 정변과 전쟁, 외침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인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492년(성종 23)에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와 국내 저작인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재(太平通載) 등의 책을 인쇄, 발간하는데 참여였다. 또한 1494년(성종 25)에 노사신 등과 계몽의두(啓蒙議頭) 등의 책과대명률(大明律)을 대조해 미비한 것을 참작해 쓸 것을 청하였던 것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여 서문을 직접 썼으며,
감수에도 참여하였다.
이극돈의 광주이씨는 조선조 왕권보위의 위치에 있는 훈구세력의 대표가문이다.
이집의 자손들은 조선왕조의 개창을 돕고 이어 세조의 집권을 도와 다수의 공신을 배출하며 조선 전기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집의 세 아들이 모두 여말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장자 이지직의 세 아들과 여덟 손자가 조선 전기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이지직의 둘째 아들 이인손(李仁孫)이 우의정을 역임한 것을 필두로 그의 장자 이극배(李克培)가 영의정, 차자 극감(克堪)이 형조판서, 3자 극증(克增)이 병조판서, 4자 극돈(克墩)이 좌찬성, 5자 극균(克均)이 우의정을 각각 역임하는 등 세조 이후 성종과 연산군 치세 동안 이들 5형제가 정국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광주이씨 상대 가계도
이러한 광주이씨의 번성은 〈광주이씨 상대 가계도〉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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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士禍)와 광주이씨가
좌익공신(左翼功臣)과 좌리공신(佐理功臣)을 연이어 배출한 광주이씨가문은 조선 전기 훈구파 가문의 대표격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훈구적 속성은 연산군대에 일어난 무오사화를 이극돈(李克墩) 형제와 조카 이세좌(李世佐)가 주도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서는 이극균(李克均) 부자를 비롯하여 이세좌와 그의 세 아들 수원(守元)·수의(守義)·수정(守貞), 그리고 세홍(世弘)·수공(守恭) 등이 화를 입었다. 또한 중종조에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를 기화로 비롯된 기묘사화에서 이세좌의 손자 이연경(李延慶)과 이세우(李世佑)의 손자 약수(若水)·약빙(若氷)이 화를 입게 되었다. 특히 기묘사화 시기에는 충주에 정착한 광주이씨 후손들이 사림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어 더 큰 화를 당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후 광주이씨 가문에서는 재차 화를 당한 자가 속출하였다. 을사사화로 인해 직제학으로 있던 약해(若海)가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유권(柳灌)과 가깝다는 이유로 사사되었고,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윤임(尹任)과 사돈관계였던 약빙이 사사되었으며, 그의 아들 홍남(洪男)은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다. 또한 이윤경은 을사사화 당시 대사간 직분으로 위사공신 3등에 책봉되기도 했으나, 그의 아들 중열(中悅)이 대윤(大尹)으로 몰려 사사되었고, 이로 인해 그 역시 삭탈관직되었다. 이준경(李浚慶) 또한 을사사화 당시에는 외직으로 나가 있어 화를 모면했으나, 이기(李芑)와의 구감때문에 대윤으로 몰려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처럼 조선 초기 최대 문벌을 자랑하던 광주이씨가는 갑자-기묘-을사사화에 연이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는 이들이 훈구적 성향에서 사림적 성향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오사화는 이인손의 넷째 아들 이극돈이 주도하였으며, 그는 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부관참시를 극론할 만큼 사림파에 대한 적대의식를 내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영남 사림들과 교류가 있었던 이극배의 손자 이수공은 불고지죄로 창성(昌城)에 유배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일시에 나타난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이집이 가졌던 절의파 지식인과의 깊은 교류는 그의 아들 이지직에게 이어져, 지직은 포은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손자 인손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의 재우(齋友)로 그의 평생사우(平生師友) 35인 중 으뜸으로 꼽힌다. 또한 인손의 아들 극균은 김숙자의 아들 종석(宗碩)·종직과 함께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극배(李克培)의 손자인 수공은 충청도 황간지역을 기반으로 이미 영남 사림세력과 교류하고 있었다. 즉, 광주이씨 가문이 당대의 벌열가문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도 이집으로부터 내려오던 학풍과 교류관계가 소극적이나마 신진사류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었고, 이러한 가운데 충주에 정착하여 사림파로 일신한 광주이씨 계열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사림의 붕당정치와 외척의 집권의 폐해, 조선왕조의 멸망조선시대 사림의 등장은 곧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에 이어지고 이런 붕당정치가 연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 인조 영조 정조대로 이어오다가는 순조 현종 철동 고종대는 외척정치로 이어졌다.
일본은 17세기 이미 갱항과 서구 문물을 받어들여 근대화에 상공하고, 이른바 아시아와 대동아 제패에 나섰는데 조선말은 연산조 이래로 부터 꿈속에 거닐다가 결국 일제 병합이란 비운을 맞게된 것으로
사림에 기한 붕당과 외척정치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조선조 내내 국흥을 이룬 것은 왕권과 신료의 완성기로 먼저 조선의 서업기인 태종. 세종. 성종. 중종과 .광해시대를 볼수가 있다. 이때는 전부 왕권이 확립된 시대로 그만큼 여력을 국가부흥에 쏟아진 것이다 그런데 사림의 등장으로 밤낮 예송과 권력투쟁에 머문 어두운 당파의 시대였으니 후일들은 자성해야 할 것이다
● 사림파(士林派)의 동서분당(東西分黨, 1575년)-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사림은 유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다.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으로,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관학자들과는 학문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주로 삼사(三司) 계통에서 언론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진출로 사화가 되풀이되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 김숙자(金叔滋, 1389년∼1456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孝敬)』·『사서오경(四書五經)』·『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고려의 유학자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상남도 출신.
○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자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 이목(李穆, 1471년∼149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 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 권경유(權景裕, ?∼1498(연산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君饒(군요)·子汎(자범), 호는 癡軒(치헌), 判官(판관) 질(질)의 아들. 金宗直(김종직)의 문인. 進士(진사)로 1485년(성종16)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1490년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하였다.연산군 때에 校理(교리)·堤川 縣監(제천현감) 등을 지냈고, 金馹孫(김일손)과 함께 史官(사관)으로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을 史草(사초)에 실은 사실을 그 후 1498년(연산군 4) 柳子光(유자광)·李克墩(이극돈)이 연산군에게 말함으로써 戊午士禍(무오사화)가 일어나 국문을 당한 끝에 아들 沇(연), 김일손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中宗反正(중종반정:1506년) 후 都承旨(도승지)에 追贈(추증)되었다
○ 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한 성리학자로서 저서에 《모재집(慕齋集)》·《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 김정국(金正國, 1485년∼1541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철학자, 성리학자, 서예가, 작가이다.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와 팔여사가,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으나 그 뒤 복직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李克墩)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 조광조(趙光祖, 1482년∼1520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奇大升)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白仁傑)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宜靈),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김시습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장군 남이,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文臣) 남포(南褒, 1489년∼1570년)의 친족척이다. 문신(文臣) 한산군(韓山君) 이손(李蓀)의 사돈으로 남효온의 딸이 이손의 3남 이온언의 부인이며 한산군(韓山君) 이손이 남효온의 집안을 보살펴줘서 추강집에 감사함을 기록했다.
○ 남곤(南袞, 1471년∼1527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정치인,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초기 사림파 정치인이었으며 성리학의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사장학과 경서 해석에도 재주가 있었다. 자(字)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지족(知足),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사림파 출신 인사 중 김전 등과 함께 심정·홍경주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 동조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찬성과 우찬성, 예조판서를 거쳐 기묘사화 이후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림파의 일원으로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복귀했다. 그 뒤 김전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1519년 훈구파와 손잡고 기묘사화에 협력하여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방조하였으나, 남곤도 김종직 학파의 한사람이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청렴하였으나, 조광조 등을 처형하는 데 동조, 묵인했다는 이유로 사림의 집권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자와 변절자로 몰려 지탄을 받았다. 후일 그의 외손자 송인은 조선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의 부마가 되었다. 그의 고모부는 임원준이고, 경상남도 출신이다.
○ 송석충(宋碩忠) 1454(단종 2)∼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현령 윤(綸)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창(韓昌)의 딸이다. 영천(榮川)에 거주하였다.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김굉필(金宏弼)·최보(崔溥)·박담손(朴聃孫)·신희연(申希演)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어 처벌받게 되자 평소 이들과 왕래하였던 서간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향리에 내려가 서사(書史 : 경서와 역사공부)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남효온(南孝溫)이 그를 평하기를 “성품이 강결하고 정직하며 명성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천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전(金詮, 1458년∼1523년)은 조선 전기,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능인(能人),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중종이 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13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자 반대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과 《속동문선(續東文選)》의 공저자의 한사람으로 청렴하여 집 한채 없었고, 전답하나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서 스스로를 즐길 정도로 청렴결백하였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 인물의 한사람으로 지목, 남곤과 함께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삼촌이자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증조부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고조부가 된다. 또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小尹)의 윤원형이 그의 손녀사위였다. 조카인 김안로와 손녀 사위 윤원형은 왕실의 인척인 훈구파였지만, 그는 김종직의 문하생인 사림파였다. 김종직의 문인.
○ 이심원(李深源, 1454년∼1504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 默齋(묵재), 太平眞逸(태평진일)이다. 연산군 때 동생과 함께 화를 당한 대유학자이다. 효령대군 보의 증손으로 보성군 갑의 손자로서 평성도정 위(사후 평성군에 추증)의 장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정암 조광조와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성종 때부터 훈구파의 퇴진과 사림파의 등용과 양심적인 지역 은거 인사들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고모부 임사홍의 비행과 비리를 성종에게 고했다가 할아버지 보성군으로부터 고소당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이해하고 반려하였다.
사림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인사들의 단종 정순왕후 복권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정광필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으로 증직되었다. 이후 홍록대부로 추증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의 행적은 『명신록(名臣錄)』, 『삼강행실(三綱行實)』, 『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책에 기록하여 학문과 충절을 돋보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