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곡성당 -성모신심 특강 (2016.05.22)
1.저는 요한 복음 19장 25절부터 27절의 말씀을 좋아하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이 시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모님은 누구이십니까?
『제가 이태리에 가서 언어 공부를 하고 로마에 막 내려가서 첫 번째 시험을 치르는데, 뭐 알아듣기를 잘합니까, 그렇다고 책을 잘 읽어내기를 합니까, 아무튼 부지런히 준비를 해서 A4 몇 장을 외워서 할아버지 신부님께 마리아론 시험을 치러 들어갔습니다.
안 까먹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몇 줄 외우면 꼭 한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겨우겨우 외워대고 있는데 할아버지 신부님이 중단을 시키시더니 갑자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마리아가 누구야?”
아니, 마리아가 누구냐니? 이거 웬 질문이 이래?
나는 당신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제 실력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는 “마리아는 어머니지!”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억울하고 분하더라구요. 마리아가 어머니인 걸 누가 모릅니까? 그런데 지금 분위기에서 그걸 물어볼 타임이 아닌데..
또 외운걸 주저리 주저리 하고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이 날아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뭐하는 사람이야?”
어머니가 뭐를 하다니? 오늘 이분이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나? 뭐 이런 질문만 하시지?
역시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기르시는 분이지!”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거 누가 모릅니까? 어떻게 그 어려운 시험에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지...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집에 와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교수여도 그렇게 질문을 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가 책을 보고 줄을 치고 줄여서 달달달 외운 남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정말로 나의 어머니이시고, 나를 낳고 젖을 먹여서 기르신 분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질문을 하셨던 거지요.
마리아가 우리에게 누구예요? 어머니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나요?
성모 마리아는 우리를 낳고 우리를 길러 주십시다.』
제가 좋아한다고 하며 처음에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시는 부분이지요.
여기서 사랑하는 제자는, 그렇다고 써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도 요한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제자는 한 개인을 넘어서 사도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사도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 즉 교회를 대표하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 어머니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상황에서?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당신의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당신의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어머니를 당신의 제자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님이 되시고 나서 내신 당신의 첫 번째 교황권고인 『복음의 기쁨』에서 이 부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황님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요한복음 19장 30절의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씀과 연결지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새 창조의 절정인 이 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리아께 이끄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없이 걸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그분께 데려다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좀 바꾸어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모님은 참으로 예수님 마음에 드는 분이었다.’
‘성모님은 참으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분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도대체 성모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을까요?
루카복음 11장 27-28절의 말씀을 보면,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어떤 여자가 갑자기 이렇게 소리를 치지요.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거지요.
저런 아들을 낳고 기른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뿌듯해 할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답에 동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좀 의외의 답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서 여인의 말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언뜻 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너무도 잘 아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분이시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분 중에 으뜸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말씀은 성모님보다 이런 이들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진정한 행복이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또 잘 지킨 삶의 모습에 있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실질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첫 번째 일은 바로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주님의 천사의 예고를 듣고 응답하며 예수님을 낳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처음에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것이 아니라 그 일생 동안 이 모습을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의 복음 초반부에 두 번에 걸쳐서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지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두 번째는 소년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었다가 되찾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고 마리아와 요셉은 집으로 돌아가다가 하룻길을 간 다음에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같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정신없이 사흘을 찾아 헤매다가 아들을 찾고 나서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이 많이 참으시는 거 같습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엄마가 아이에게 화를 내지요.
그러면 아이가 울고 그런 아이를 보면서 엄마도 같이 울지요.
성모님께서 아무튼 당신의 애탄 심정을 표현했는데, 예수님은 부모님께 완전히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제가 본당 신부를 할 때 중고등부 아이들과 함께 미사를 하다가 이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았어요.
만약에 너희가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처럼 ‘왜 저를 찾으셨어요?’하고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은 원래 미사 중에는 별로 말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하나 같이 ‘맞아 죽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오래 간만에 보는 생각의 일치였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냥 마음속에 깊이깊이 잘 넣어 두었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생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단순히 예수님과 자신의 문제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 하느님께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함께 하고 있는 대학원 1학년은 외출을 못나갑니다.
신학교 안에서 머물면서 기도에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일인데요, 지난 주일에 작은 체육대회를 한다고 해서 잠깐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경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얼굴에 공을 맞았고 안경테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친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가 아니에요.
저말고 다른 신부님도 그 자리에 함께 했는데, 그 신부님이 그 친구에게 가려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 신부님도 그 친구의 경제적 상황을 아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 가시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렸지요.
그냥 두시라고, 자기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알아서 할 거라고 말씀드리면서 말렸습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에 대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 안경 값은 반에서 해주기로 했지?’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더라구요.
얼마 전에 신학교 축제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신학교 안에서 한 것이 아니라 신학생들이 전주에 가서 그곳에서 축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축제 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대학원 1학년생들이 부제님들께 한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왜 그러나, 이들도 이젠 대학원생인데 뭘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듣게 되면서 좀 궁금해 졌습니다.
이 신학생들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 가는지가 궁금해져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구요.
그냥 몇몇 신학생들의 무리한 행동 때문에 전체가 혼을 난 일로 마무리짓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좋지가 않았습니다.
적어도 기도를 한다면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우리 공동체에 무엇을 바라시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냥 문제를 지나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요.
성모님께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부분이 바로 이런 것,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좀 떨어져서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요한 복음 2장에 보면 카나의 혼인잔치가 나오지요.
성모님께서는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 가서 말씀을 드립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포도주가 없으면 신랑 신부가 곤경에 처하게 되니 문제를 좀 해결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성모님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당연히 당신의 청을 들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성모님은 의외의 답을 들으시고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저는 처음에는 한동안 이 말씀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곧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실 것을 알고 굳게 믿으셨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해석이 뭔가 좀 꺼림칙하더라구요.
예수님은 할 수 없다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성모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신다면, 이것은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라 억지 아닐까?
우리는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써있는 그대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성모님은 당신이 먼저 꼭 포도주를 만들어 주셔야 한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내려놓고, 당신뿐만 아니라 일하는 이들도 모두 그저 그분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도록 안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성모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 사건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시는 당신의 삶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지요.
본당 신부님께서 성모님의 신심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는 청을 듣고 무엇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까를 고심하다가 이것을 말씀드리기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참 마음에 들어 하셨고,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실 만큼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 거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특히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려는 모습이 있었다.
바로 성모님의 이러한 점을 함께 살아가면 좋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어떤 일에서, 어떤 문제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 바람을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으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인데, 이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조급함이라는 것입니다.
조급함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일, 문제에서도 그렇고, 그 사람이 자신만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느님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앞에 있는 사람도 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좋은 것들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일을 엉뚱하게 이끌어 가고 맙니다.
여유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좀 다른 말로 하면 관대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떤 신부님이 그런 이야기를 쓰신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 영성지도를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한 신학생이 자신의 성소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신학교를 떠나서 다른 삶을 살겠다고 이야기 하려고 온 것인데, 신부님은 바쁜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내일 오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다음 날 갔더니, 또 다른 일이 있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해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다 가라앉은 거지요.
사실 신학교 영성지도 신부님에게 신학생 성소 상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걸 다 알면서도 신부님이 다른 일이 있다고 다음번에 오라고 계속 그러셨던 것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때는 좋지 않은 생각들이 우리를 휘몰아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성급하게 무언가를 결정하고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이 그렇게 상황을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좀 쉬어 가는 게 필요하지요.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앞에서도 얼핏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셨을까요?
『히야친또라는 성인이 있었습니다. 도미니꼬 성인의 첫 번째 제자들 중의 하나였는데 폴란드에 있는 도미니칸 수도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타르타르 사람들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는데, 성인은 성당으로 가서 감실의 성체를 모셔 가기로 했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성당에서 나가면서 제대 옆에 있는 커다란 성모님 상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 때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왜 데려가지 않느냐?”
성인은 뒤 돌아 서서 성모님 상을 보고 “내가 어떻게 이 큰 성모님 상을 모셔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는 왜 데려가지 않느냐?”
너무도 분명한 소리에 성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 상 앞으로 가서는 그 커다란 성모님 상을 자신의 팔로 껴안았습니다.
성인은 그 성모님 상을 함께 모시고 갈 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 성모님상은 성인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고 성인은 성체와 성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길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신 성모님과 함께 이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셨을 때, ‘사랑하는 제자가 그 때부터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은 물리적인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을 자기 자신을 이루는 내적인 모든 공간에 모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성모님을 예수님께서 주신 영적인 선물들, 즉 성사, 말씀, 성령들과 같은 것 가운데 하나로 맞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이렇게 성모님을 바로 자신 안에 맞아들였는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젠가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을 우리의 사생활 안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내밀한 방 안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제는 본당일이 끝나면 자신의 방으로 갑니다. 자신의 방으로 가면 공개되지 않는 신부님의 사생활이 있습니다.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내밀한 방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께서 오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또 신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삶이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교회에서 활동하는 공개된 삶이 있고, 가정 안에서도 남편이나 아내로서, 부모로서의 공개된 삶이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 사생활 중의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만 아는 아주 내밀한 방안으로 예수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맞이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식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모님, 기꺼이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됩니다. 그건 곤란해요. 제 사생활입니다.’
이런 식이면 안 되겠지요.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신다는 것은 성모님께 제한 없이 모든 것을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여러분의 사생활 중의 사생활에로 모셔 들이십시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를 당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기도 하셨지요.
이런 질문을 해 볼까요?
성모님께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맡기신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런 말씀을 하세요.
『사실,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신이 모든 이들에 앞서 육화의 신비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나자렛의 동정녀에게 주면서 그녀에게 자신을 맡기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성모님을 우리 자신의 모든 내적인 삶 안에 제한없이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내어맡겨야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의 삶을 성모님의 영향 아래 두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해서 저는 콘스탄티노플의 성 제르마노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호흡이 몸이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징후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리아에 대한 잦은 기억과 사랑스러운 간구는 영혼이 죄로 인해 죽지 않았다는 확실한 표징이다』.
성모님을 자주 기억하고 성모님께 자주 청하는 것을 생활화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을 자주 기억하다보면, 성모님을 닮아가겠지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신 성모님의 삶을 모습을 우리도 살아가기를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성모님께 자주 청하다보면 성모님께서 우리의 전구자이심을,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주 기억하고 성모님께 자주 청하라는 이 말씀을 생활화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모님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느 날 한 소녀가 질문을 받았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얼마만큼 사랑하니?” 소녀는 팔을 벌리고 응답했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이만큼 좋아해요”. 그녀는 다시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는 얼마나 좋아하니?” 소녀는 창문으로 알프스 산맥을 보고 말했다: “나는 저 산만큼 엄마를 좋아해요”. 그녀는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너는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니?” 소녀는 잠깐 넋을 잃더니 이어서 대답했다: “나는 하느님을 하느님 자신만큼 사랑합니다!” 그 소녀가 젬마 갈가니 성녀였다.>
‘나는 하느님을 하느님 자신만큼 사랑합니다!’, 젬마 갈가니 성녀의 이 말씀은 우리가 성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힌트를 준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성모님을 성모님으로 합당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성인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성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해서, 모든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성모님을 통해서,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을 위하여 하는 것을 제안하는데, 이 중에서 모든 것을 성모님 안에서 하는 것에 대해 잠깐 이야기 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 있지요?
어떻게 이야기 하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너는 내 안에 있어!
둘째는 나는 네 안에 있어!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너는 내 안에 있어. 내가 마음대로 사랑해 줄게. 라는 표현의 줄임말이구요,
둘째는 나는 네 안에 있어. 네가 나 자신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를 너에게 맡길게. 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할 때 너희는 하느님께서 내 마음 안에 계시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느님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랑받는 사람을 향해 가게끔 합니다. 나에게가 아니라 너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를 마리아 안에서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성모님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위해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내가 성모님 안으로 들어가서 저를 당신 뜻대로 쓰라고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을 보면서 힌트도 얻고 실질적인 도움도 받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시작기도
좋으신 하느님, 저희를 이 자리에 불러 주시고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 이 시간을 통해서 저희가 당신께 좀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마침기도
저희에게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신 하느님, 저희 모두가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자주 바라보고 성모 마리아께 자주 간청하면서 더욱더 당신 마음에 드는 자녀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성모님처럼 저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저희 앞에 있는 일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찾으며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조급한 마음에 휘둘리지 않게 하시고, 저희에게 관대한 마음, 여유로운 마음을 더해주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