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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 종사(1881-1921)
대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며 무장독립운동의 탁월한 영도자의 한 사람인 서일은, 독립운동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거성이다. 서일이 대종교에 입교한 것과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동시기였다. 대종교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고 독립운동가이면서 대종교인이었다. 이 양자는 서로 토대가 되고, 서로 받들고 밀어주는 힘으로 되었다. 서일은 입교한 지 불과 몇 해 사이에《삼일신고 도해강의(圖解講義)》《회삼경(會三經)》과 같은 대종교리론의 터전을 닦는 경전을 저술하여 금방 중광된 교리의 기둥으로 받들어졌고, 또 이로 하여 서일 본인이 대종교의 동량이 되었다. 또한 3·1운동 후엔 북로군정서의 총재,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서 출중한 조직능력과 군사재질을 충분히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서일에 대한 기록이 너무도 적은 것은 역사의 편견이라 할까. 부총재인 홍범도나 김좌진의 현란한 자료에 비해 너무도 가긍할 정도이다. 몇 년간 헤매던 끝에 서일의 손자와 외손자를 끝내 찾아보았다. 허나 부풀던 희망은 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손자나 외손자가 모두 서일이 사망한 후에 태어났고, 임오교변시에 일본경찰들의 수색에 의해 집에 있던 일체의 서적·자료·사진들, 무릇 종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면 글씨야 있건 없건 모조리 가져갔으니, 서일에 대한 자료의 가물도 이에 한 까닭이 있으리라고 본다. 본 논문에서 서일종사의 생애를 더듬어 봄과 동시에 그의 후손들인 아들 서윤제와 사위 최관에 대해서도 힘닿는 대로 기술해 보려 한다. 거성의 눈부신 활동에 비해 이 글이 무색함을 부끄러이 여기면서 미숙한 글이나마 펴내려는 것은 거성의 기념비를 세움에 한줌의 흙을 보태 주려는 소원에서이다.
청소년 시절의 서일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출생하였다.
서일의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고 호는 백포(白圃)이며,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고향에서 서당공부를 하며 한학에 남다른 취미를 붙였다. 서당에서 몇 년간 공부를 마치고 경성함일사범학교의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였다. 함경북도에서 근대화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운협 선생이 창설한 이 유지의숙은 몇 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었는데, 수많은 민족운동가를 길러낸 품이기도 하였다. 서일 외에도 간도대한국민회 사령 안무, 대한(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 김병철, 서대문감옥에서 처형된 김학섭 등 독립운동 골간(*편집자 주:핵심간부를 뜻함)과 투사들이 이 품에서 육성되었던 것이다. 서일은 1902년에 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일합방 전까지 본고장에서 10년간 계몽교육에 종사하다가 경술국치 후 1911년에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잡고 뿌리를 내렸다. 이때부터 서일은 독립운동에 참가하면서 대종교에 가입하여 대종교의 발전에 마멸할 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서일 한 사람이 대종교 활동을 하면서 또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통일된 혼합체이면서도 또한 부동한 특색이 진하므로 본문에서는 따로 검토해 보려고 시도한다.
대종교 종사로서의 서일
한일합방 전야에 구국일념으로 세 차례나 일본에 갔었고 5적암살계획까지 펴나가던 일대애국거장 나철 선생은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종지에서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일제에게 강점당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일이 1911년에 가정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 덕원리에 와서 자리잡을 때는 대종교도 화룡현 청호에 총본사를 두고 그 뿌리를 각 곳에 내리기 시작할 시기였다. 마침내 서일은 1912년 10월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3년 10월에 이르러 서일은 영계 및 참교(參敎)로 피선되어 시교사를 맡아 보았다. 이로부터 서일은 교서저술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여태껏 후대양성을 위해 교편을 잡고 여념 없이 분주하던 서일이 방향을 돌려 교리를 찬술하는 저술사업에 정력을 몰 붓자 막혔던 홍수라는 듯이 오묘하고 심각한 내용의 교서가 꼬리를 물고 태어났다. 짧디 짧은 몇 년 기간에《삼일신고 도해강의》·《회삼경》·《구변도설(九變圖說)》·《진리도설》·《신리주해(神理注解)》·《오대종지강연》·《삼문일답》상하편·《신사기》의 절안정 등을 저술하였는데, 특히《회삼경》은 홍암대종사의《신리대전》과 함께 대종교의 주요 경전으로 추대되었다. 《삼일신고 도해강의》는 전부 5장으로서〈한울에 대한 말씀〉〈한얼님에 대한 말씀〉〈한울집에 대한 말씀〉〈누리에 대한 말씀〉〈진리에 대한 말씀〉을 각 장에 담아 그 뜻을 밝혔다. 반안군왕(盤安郡王) 신 야발은《삼일신고》의 머리말에서 “이〈삼일신고〉는 진실로 머릿속에 보배로이 간직한 가장 높은 이치요 뭇사람들을〈밝은이〉가 되게 하는 둘도 없는 참 경전이니 그 깊고 오묘한 뜻과 밝고 빛나는 글이야말로 범인의 육안으로는 엿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절찬해 마지않았다.
《회삼경》은 전부 9장으로서〈세검(三神)〉,〈세밝은이(三哲)〉,〈세가달(三妄)〉,〈세길(三途)〉,〈세나(三我)〉,〈세윤리(三倫)〉,〈세누리(三戒)〉,〈세모음(三會)〉,〈하나로 돌아감(歸一)〉을 각 장에 담아 풀이하였다. 단애 윤세복은《회삼경》의 강해에서 그의 가치와 역할을 충분히 긍정하였다. “이 경전의 내용은《삼일신고》의 진리훈을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 볼지도 모르나《삼동계》는 그 방술 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전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서일이 아직 지교로 있으면서 방대한 경전을 저술하였음으로 하여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교리를 품고 있음에 탄복치 않은 이가 없었다. 이리하여 서일은 1916년 4월에 상교로 승질하였고 총본사 전강을 맡아 보았다. 경각의 특선사교로 뽑아 교통전수의 천궁영선식(天宮靈選式)을 행하였다. 이해 음 8월 15일에 대종사 나철이 조천 하자 9월 1일에 무원종사 김헌이 제2세 도사교로 승임하였다. 이 시기에 서일은 가경가를 지어 신형을 추모하였다.
가경가(嘉慶歌)
기승을 피려는 몹쓸 바람
온누리 빼앗아 가질 듯이
구름발 몰아서 어둠을 재촉
눈과 비 한번에 퍼붓더니
배달나무에 쪼이는 햇볕
따뜻해 부드런 그 솜씨에
한울은 깨끗 따는 잠잠타
아- 이것이 검의 뜻이라
어디서 빛기둥 우뚝솟아
한길을 가리켜 밝히더라
때마침 꽃바람 새노래있어
별들이 가지록 듣받더니
아사달메의 꽃다운 노을
한울집 그리로 연잇대어
이 누리 티끌 다 녹이도다
아- 이것이 새로움이라
1919년 초에 제2세 교주 김헌은 교통을 서일에게 전수하고 저 수차의 권고와 부탁이 간절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일은 당시에도 교주의 자격을 당당히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일은 무원종사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3·1운동이 폭발하였다. 서일은 기다려 10년만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북로군정서 총재로서 혈해의 전투 속에 뛰어들었다. 1921년 8월 27일에 서일이 때 이르게 조천한 후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하였다. 1922년 8월 15일 가경절 경축의식 절차를 마친 뒤 상해 서2도본사의 설비로 백포종사 서일의 1주기(一週朞)추도식을 거행하여 치제문과 추도문을 드렸다. 그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생략) 1923년 1월 15일에 동2도 제321사구 밀산현의 대일시교당에서 중광절 경축례식을 거행하고 이날 백포종사의 생전공적에 대한 찬송과 조천 후의 영원한 쾌락을 기원하는 뜻에서 무원종사는 교우들로 발기케 하여 대양(大洋) 150원을 헌납케 하고 밀산현 대흥동에 있는 백포종사묘소에 원방각(圓方角)나무배자를 건립하였고 또한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로 쓰도록 했다. 1924년 1월 22일에 영안현 남관에서 제3세 도사교로 승임한 단애종사 윤세복은 3월 16일에 서일에게 종사철형(宗師哲兄)의 교질을 추숭(追崇)하였다. 1927년 봄에 단애종사의 사회하에 백포종사 서일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고 화룡현 청호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청호는 신형 나철, 무원종사 김헌, 백포종사 서일, 이 삼종사의 신해(神骸)를 봉장한 백두산하 동북록의 성지로 되었다.
독립군 총재로서의 서일
망국의 통분 속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서일은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잡은 후 조선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수선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세우고 글을 가르치는 한편, 동지들을 규합하는 일들을 착착 진행해 나갔다. 마침내 1911년 3월에 서일은 대종교인들인 현천묵, 계화 등을 골간으로 독립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일은 이미 조직한 중광단의 토대 위에서 무장투쟁의 전개를 위한 ‘대한정의단’을 조직하고 단`
4대 강령
一.정대한 의리의 찬양
一.정당한 의무의 이행
一.정직한 의무의 장려
一.정순한 의리의 찬동
7대 규약
一.서약을 반드시 실천함
一.명령을 반드시 집행함
一.양민을 침범하지 말 것
一.다른 단(團)을 간섭말 것
一.규율을 반드시 준수할 것
一.역무를 반드시 부담할 것
一.망언을 하지 말 것
3대 부신(符信)
一.단장의 인증 또는 증권의 호수가 있지 않은 경우에는 복종하지 않을 것.
一.단장의 수집명령에 의하여 굴기(屈期) 집합할 것
一.서약서와 동호의 증권이 있지 않으면 단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 단 증권을 분실했을 때는 보증연서로서 청원함, 또한 본 증권의 호수를 비밀로 할 것.
‘대한정의단’은〈민보〉와〈신국보(新國報)〉를 순국문으로 발간하여 민간에 배포해서 동포들의 독립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대한정의단’의 취지에 기초하여 독립을 얻기 위한 대가는 오직 혈전뿐이라는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고취하였다. … ‘대한정의단’은 독립군편성을 위한 준비로 각지에서 결사대원 또는 단지결사대원을 모집하여 모두 1,037명이 명부에 등록한 결사대원을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 그 산하에 ‘대한군정회’란 독립군무장단체를 조직하면서 아래와 같은 창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위로 신성의 영광을 조종에게 돌리려거든, 아래로 노예의 욕됨을 자손에게 남겨주지 않으려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이 몸을 생각하지 말라. 한 몸을 순(殉)하여, 백 몸을 속죄함이 인도의 원훈(元勳)이니라.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를 살림은 정의의 공덕이니라. 누가 살려고 하지 않으리오만은 노예로 사는 것은 생의 치욕이요, 누가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리오만은 신성하게 죽는 것은 사(死)의 영광이니라.
본 단은 정의 광부(匡扶)를 강령으로 하여 조업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바 군책군력을 1단으로 결합하고 취인취재를 쌍방으로 진행하노니 우리 동포 대한의 남매여! 지모가 있는 자는 지모로 용기가 있는 자는 용기로 기예가 있는 자는 기예로 각자 능력을 다하여 나서며 무기가 있는 자는 무기로, 량미가 있는 자는 량미로, 금전이 있는 자는 금전으로 각자 힘을 다하여 내놓아서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하여 천하의 공분을 씻으며 우리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만세의 광명을 남기리…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에 출중한 군사가이며 신민회 계통의 무관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등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 보게 함으로서 임전태세를 갖춘 독립군편성을 마무리 짓도록 하였다. 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서’를 모두 합하여 전체를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를 창립한 주요인물은 서일·현천묵·김좌진·조성환·이장녕·계화·이범석·박성태·정신·박두회·이홍래·윤창현·나중소·김성 등이었다 한다.
‘대한군정서‘는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12월 발표한 ‘국무원 제205호’ 정신에 입각하여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고쳤다. 또한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대칭으로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지어 애용하였는데, 그 간부진영을 보면 아래와 같다.
총 재: 서일
부 총 재: 현천묵
참 모 장: 이장녕
사 단 장: 김규식
여 단 장: 최해
연 대 장: 정훈
연성대장: 이범석
경 리: 계화
군기감독: 양회
길림분서고문: 윤복영
사관연성소 소장: 김좌진
교 관: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북로군정서는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두었다. 여기에 스치고 지나지 못할 지점과 지명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일부자료에 따르면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 밀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후세사람들이 알 바 없는 막연한 정보이다. 20년대 당시에 마반산으로부터 십리평에 이르는 50여리 계곡을 통칭 서대파골이라 불렀고, 이 서대파골에 속하는 마을로 보아도 마반산·하서대파·상서대파(본부락)·만하·백암 십리평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이라고 기록된 자료들이 많은데, 이도 북로군정서 본부의 소재지를 찍는데 접근했을 뿐 준확하지는 않다. 가장 준확한 대답이라면, 다시 말해 “북로군정서 본부의 집터가 어느 곳에 있었느냐?”하는 물음에 해답한다면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현 태평촌)의 북쪽 산기슭’이라고 대답해야 후세의 연구가들도 시름없이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잣덕이란 지명은 본세기 20년대에 많이 부르던 이름으로서 십리평에서 동쪽으로 약 2리 가량 들어가 있다. ‘잣’이란 잣나무를 의미하고, ‘덕’이란 ‘더기’의 준말로서 다른 곳보다 지세가 높으면서도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함경북도 방언으로는 더기를 데기라고 발음하므로 용정의 영국데기, 십리평의 잣데기라 부르기 일쑤였다. 지세를 보아도 잣덕은 십리평보다 좀 높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잣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수림을 북로군정서가 앉으면서부터 개척한 곳이므로 잣덕이란 형상적인 지명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토착노인들은 ‘잣데기’라고 부르고 있다. 잣덕은 9·18사변 후 일본인 소송(小松)이란 자가 이곳에 박혀 있으면서부터 ‘소송툰’이라 불렀고, 광복 후엔 지금까지 ‘태평촌’이라 부른다. 1990년 4월 9일 필자가 현지답사를 하면서 왕청으로부터 잣덕에 이르기까지의 20년대에 있었던 마을과 그 거리를 상세히 요해 측정하였으니 아래와 같다(그림1 참조).
왕 청 - 소 왕 청 14리
소 왕 청 - 마 반 산 10리
마 반 산 - 하서대파 12리 ───┐
하서대파 - 상서대파 8리 │
상서대파 - 만 하 12리 │ 서대파골 총 52리
만 하 - 백 암 4리 │
백 암 - 십 리 평 14리 │
십 리 평 - 잣덕(태평촌) 2리 ───┘
이성규 노인(86세)-1905년 9월 22일생. 함북 경원 출신.
4세에 왕청 양수천자로 왔다. 1937년에 마반산, 1938년에 십리평에 이사왔다. 북로군정서 본부와 사관연성소 지소(속칭 예비훈련소) 지점을 확증해 주었다. 현 왕청진에 거주. 1990년 4월 9일 글쓴이 찍음.
북로군정서는 잣덕의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에 자리잡았고, 사관연성소 예비훈련반(사관연성소 지소)은 북로군정서와 약 300미터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넓은 운동장을 닦고 훈련하였다. 사관연성소는 잣덕에서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15리 들어가 건립하였는데, 수백명의 청소년을 받아들여 군사골간을 양성하였다. 1920년 7월초의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조직과 간부는 다음과 같았다.
소 장: 김좌진(사령관 겸임)
교수부장: 나중소(참모부장 겸임)
본부교사: 이범석
체육교사: 김관(러시아 사관학교 출신)
제1학도대장:최준형
제1구대장: 한건원
제2구대장: 강화린
제3구대장: 이교성(강화린으로 교체)
제2학도대장:오상세(서리)
제1구대장: 김훈
제2구대장: 백종렬
제3구대장: 허활(백종렬로 교체)
사관연성소에서 설치한 과목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① 정신교육
② 역사(세계 각국 독립사와 한일관계사)
③ 군사학(러시아 사관학교 사용의 교재를 번역한 것)
④ 술과(術科 병기의 사용법, 부대의 지휘운용법)
⑤ 교령법 등이다.
1920년 9월 9일에 첫기 졸업생 298명을 내보내어 북로군정서의 독립군 대오에 편입시킴으로써 10월에 있은 청산리전투에서 중견역량으로 되게 하였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의 독립군 무장역량을 눈에 든 가시로 벼르던 조선총독부는 몇 달간의 계획하에 대토벌을 준비한 끝에 수만 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강적이 압란지세로 박근해오자 그 예기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백두산 밀림으로 이행하던 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피치 못할 대결을 벌였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호상 배합하며 병력과 장비상 몇 갑절이나 우세한 일본 토벌군과 싸운 단병상접의 백열전이었다. 의복과 식량까지도 막대한 곤란으로 조성된 조건하에서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어랑촌전투·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거쳐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야말로 독립운동사상 가장 눈부신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청산리전투가 있은 후 여러 독립군 단체들은 밀산에 모여들었다.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국민회·신민단·도독부·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단체들의 3천 5백여명 독립군들이 대회합을 이루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으니 그 중요부서를 보면 아래와 같다.
총 재 : 서일
부 총 재 :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 사 령 : 김규식
참 모 장 : 이장녕
여 단 장 : 지청천
대종교의 교통(敎統)을 전수하겠다는 청구도 마다하고 무장독립운동의 불바다에 뛰어든 서일로 말하면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된 것이 그 최고점을 이룬 시기였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 대한독립군단은 만주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1921년 1월에 소련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이때 서일은 대한독립군단의 군사적 지휘를 부총재들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이 군단의 장구한 생명력을 위해 당벽진에 남아서 경제적 뒷받침을 할 어려운 임무를 떠메었다. 둔병제를 실시할 설계도를 그리면서 실천해 나갔다. 그후 반년이 지난 1921년 6월 28일에 흑하사변이 일어났다. 미증유의 좌절이었다. 다시는 독립군단의 기력을 회복하기 어려운 절경에 이르렀다. 서일은 실망 속에 빠졌다. 조각난 ‘대한독립군단’, 몇백, 몇천을 헤아리는 희생자, 부상자, 행방불명……. 이 청천벽력에 서일은 낙망하였고, 자기의 책임이 너무도 중하다는 자책으로 하여 환멸의 어둠 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훼멸이냐, 소생이냐? 양자의 대결에 판가름이 나지 않은 때인 1921년 8월 26일(‘흑하사변’ 후 두 달만에) 수백 명의 토비들이 급작스레 당벽진에 덮쳐 들어서일과 함께 둔병제를 행하고 있던 마지막 한 부분의 자그마한 역량마저 피바다에 쓰러졌고 발붙이고 있던 마을과 백성들까지 참화를 당하였으니 설상가상이라 이 치명적 타격은 서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궁지에 밀어넣었다. 서일은 대종사 나철의 “귀신이 수파람하고 도깨비 뛰노는 천지에 정기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겨레의 피고기가 즐벅하도다. 날 저물고 길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데메뇨?”를 크게 읊조리며 당벽진 뒷산 숲속에서 영원히 잠드니 때는 1921년 8월 27일이었다.
서일종사의 후예들
徐一 ─ 부인 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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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某(長女) 徐竹靑(次女) ─ 崔寬(남편) 徐允濟(長男)-①권씨 ②허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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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雄(長男) 崔今山(長女) 徐京燮(長男) 徐万燮(次男)
경술국치 이듬해(1911년)에 서일은 가족과 함께 정든 고향 땅 그러면서도 숨막히는 고향 땅을 떠나 간도 땅에 들어섰다. 처음으로 발붙인 곳은 왕청현 덕원리였다. 당시의 가솔로는 서일의 부친(명함은 후손들도 모르고 있음), 서일, 서일의 부인 채씨, 서일의 맏딸 서 모(출가 후 병고해 이름조차 알 수 없음, 당시 10세), 둘째딸 서죽청(6세), 아들 서윤제(4세) 모두 여섯 식속이었다. 서일은 3대 독자였다. 서일의 조부가 독자였고 서일의 부친도 독자였고, 서일 역시 독자였으니 후대가 단촐한 내력이었다. 서일의 아들 서윤제도 독자였으니 4대 독자로 내려오다가 서윤제에게 아들 형제가 있게 되어 바로 현재 생존하고 있는 서경섭과 서만섭으로서 독자에서 근근히 벗어났을 뿐이다. 1921년 8월 서일이 밀산현 당벽진에서 조천하자 부고를 듣고 달려온 대종교 요인들과 독립군 두령들은 후사처리에서 두 가지를 토론 결정하였다. 그 하나는 서일의 유해를 먼저 당벽진에 모신 후 몇 년 후라도 시기가 적당한 때에 다시 화장하여 대종교의 본거였던 화룡현 청파호에 봉장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일이 당벽진에서 권씨 성을 가진 집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늘 “내 이 집 딸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말하였으니, 이 말을 이미 저 세상으로 간 고인의 유언으로 치부하여 서일의 아들 서윤제와 권씨의 딸을 성사시켜 주는 일이었다. 이 혼사는 3년 후인 1924년에 간난신고를 겪으며 거행되었다. 당시 동북의 산봉우리마다 토비들이 도사리고 있어 신랑이 왕청에서 밀산으로 가거나 신부가 밀산에서 왕청으로 오거나 모두 운명의 희롱을 당할 모험을 겪어야 하므로 아예 소련 땅을 거쳐서 왕래했던 것이다. 1925년 12월 25일에 서윤제의 맏아들 서경섭이 태어났다. 노소 4대에 다섯 식솔인 바 서윤제의 조부(서일의 부친), 서윤제의 어머니 채씨(서일의 부인), 서윤제, 서윤제의 부인 권씨, 서윤제의 아들 경섭이었다. 새 생명의 탄생, 울리는 고고성으로 하여 서일의 별세로 인한 이 가정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려 놓았고 화기와 웃음을 가져다 주었다. 사회란 복사광선이 교차되기 마련이다. 대종교 활동이 1926년의 금지령에 의하여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조선공산당 민주총국이 영안에 건립되어 동만구역국을 중심으로 활기를 쭉쭉 펴나갔다. 1930년을 전후하여 조선공산당 당원이 중국공산당에 개인신분으로 가입하자 중국공산당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전 동만을 삽시에 휘감았다. 1930년 5월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 성세호대한 대중적 반제반봉건의 격파를 일으킨 붉은 5월이었다. 중국공산당 연변특별지부에서는 4월 24일에 벌써 ‘5·1투쟁행동위원회’를 성립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자”, “지주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 농민에게 나누어 주자”란 투쟁구호를 제출하였다. 5월 1일, 용정의 대시위를 뒤이어 화룡현·왕청현·연길현·돈화현·액목현·영안현에 폭동이 파급되어 파죽지세를 이루었다. 저명한 5·30 폭동과 8·1 길동폭동의 뒤를 이어 폭동은 무시로 폭발하는 화산마냥 동만 각지에서 비일비재로 터졌다. 1930년 10월 왕청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켜 친일주구를 처단하고 민회를 불사르고 지주의 양곡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폭동에 왕청 주변의 다수 농민들이 참가하였는 바 당시 덕원리의 대부분 군중들도 적극 호응한 주력이었다. 당시 서윤제와 그의 부인 권씨, 서윤제의 누님 서죽청과 그의 남편 최관 등이 모두 이 폭동에 참가하였다. 농민운동은 드디어 동북군의 진압을 받게 되었다. 기병과 보병들이 마을마다 ‘참빗질’하며 무릇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서는 무자비한 고문을 들이대며 영도자를 찾아내려고 날뛰었다. 진압군들이 닥치기 전에 소식을 들은 청장년들은 많이 피난을 떠났는데, 서윤제와 최관도 피난 갔다. 이날, 서윤제의 가정에는 처참한 횡액이 떨어졌다. 명령을 받고 진압하러 온 군대들은 집집이 수색하며 남녀를 불문하고 마을에 남아 있는 청장년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서윤제의 조부는 윗집 영감의 생일 술을 마시다가 수색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수색군들은 문을 차고 들어서서 총칼을 휘두르며 술상을 던지고 마구 때리려 덤비었다. 이에 격분한 서윤제의 조부는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불꽃이 튕기는 그 눈길과 마주치자 놈들은 무작정 총을 쏘아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피못에 쓰러졌다. 이와 같은 시각에 등에 돌도 차지 않은 만섭이(서윤제의 둘째아들)를 업은 부인 권씨도 마당에 끌려나왔다. 시어머니(서일의 부인) 채씨가 업힌 만섭이나 받아 오려고 달려나갔다가 놈들이 내리치는 총대에 손목을 상하였다. 서죽청도 놈들에게 끌려나왔다. 구들에서 돌도 차지 않은 서죽청의 딸 금순이가 자지러지게 울어대자 서죽청을 끌어내 가던 한 병졸이 금순이를 발로 찬 것이 부엌바닥에 떨어졌다. 허망공중 떨어진 금순이는 심한 타박상에 울지도 못하고 새파랗게 변해가던 것이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후 금순이는 4살 먹고 끝내 요절하였다. 서윤제의 조부는 놈들이 쏜 총에 복부를 맞고 혼미상태에 빠졌다. 구급치료대책이란 고작해야 호박을 얻어다(늦가을이어서 호박도 귀했다) 붙이는 등의 토방법뿐이었다. 어린 경섭이는 호박을 얻어 오느라고 줄 땀을 흘렸다. 심한 출혈로 하여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을 볼 때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가슴을 뜯을 뿐 더 어찌할 방도가 없는 사회환경이며 농촌실정이었다. 서윤제의 조부는 피난 간 손자 서윤제와 손서 최관, 잡혀간 손부 권씨, 손녀 서죽청의 가슴에 재가 앉는 것도 아랑곳없이 이튿날 새벽에 며느리 채씨(서일의 부인)와 증손자 경섭(당시 6세)의 손에 받들리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였다. 며칠 후 권씨, 서죽청 등 잡혀갔던 마을사람들이 속속 풀려 나왔다. 피난 갔던 서윤제와 최관도 돌아왔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산소에 가서 제를 지냈다. 서윤제는 더는 덕원리에 있을 기분이 없어 어머니와 처자를 데리고 왕청시가(街)에 내려와서 1930년도 겨울을 보내고 31년 봄에 고향인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 가서 3년간 농사질하다가 또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이 기간에 서윤제의 부인 권씨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급병으로 별세했으니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서윤제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경원군을 떠나 또다시 중국 땅을 밟을 때에 두 번째 고향으로 불리는 왕청 덕원리가 일제의 만행에 훼멸적 재화를 입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독립운동이 맹렬하던 곳일수록 항일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일찍 서일·현천묵·계화를 중진으로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벌여 나가던 덕원리에 1930년 말에는 중공 덕원리지부가 건립되어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덕원리 인민들은 가열한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서일이 건립한 명동학교는 이때에 와서 백명에 가까운 학생을 가진 큰 학교로 발전했고, 7, 8명의 선생이 소학과 중학반을 오전오후로 나누어 가르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일제의 날이 선 주시를 받아 오던 덕원리는 1931년 초의 어느 하루 백초구 일본영사분관에서 파견한 10여명의 일경에 의해 포위되었다. 일경은 사전에 장악한 명단에 따라 최관·정일광·한하윤·한창일 등 4명의 선생을 체포해 갔다. 이 급작스런 사태로 하여 학교는 부득불 문을 닫게 되었다. 한 달 후에 4명의 선생들이 돌아오긴 하였으나 명동학교에서 선생질을 못한다는 통첩을 받고 나왔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덕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관은 동경성으로 이사갔다. 4명의 골간 선생이 줄어들자 명동학교는 중학반을 더는 설치할 수 없어 해산되었고 외지의 학생들도 돌아갔다. 그후 한성묵 선생이 혼자서 본지학생을 위주로 소학교만 꾸리었는데, 그나마 7,8개월후 9·18사변과 더불어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초가로 된 학교는 몇 달간 텅빈 채로 있다가 덕원리 마을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더욱 아쉬운 것은 학교를 새로 건축하려고 다듬어 놓은 짚더미 같은 재목도 몽땅 타버린 것이다.
일제는 날로 세차게 번져 가는 항일 불길을 꺼 버리기 위해 1932년 4월 6일과 7일 이틀간에 왕청현의 대감자·덕원리·동일촌 이 세 마을을 훼멸시키는 폭행을 감행했다. 6월 아침 40여기의 기병과 보병까지 배합된 일제 토벌대는 대감자에서 마구 불을 지르고 혁명자를 체포하고 무고한 백성을 넷이나 학살한 다음 7일 아침에는 덕원리에 덮쳐 들었다. 벌써 전날밤(6일 밤)에 소식을 들은 덕원리 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일제는 건넛산에 대포를 걸어 놓고 마을에 마구 쏘아댔다. 미처 피난 못한 사람들은 일제히 학교 가산이었던 마을 동산수림에 올랐다. 하늘에 돌던 비행기는 이것을 발견하고 기총소사를 해댔고 보병들이 달려들어 명동학교 가산인 동산수림에 불을 질렀다. 백성들은 불에 밀리어 류수하로, 곰골로 피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왜놈들은 오전 10시부터 덕원리 마을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앓아서 미처 피난가지 못한 김낙언의 처와 조희문의 모친이 불 속에서 생명을 잃었다. 같은 날 이 토벌대들은 계속 동진(東進)하여 소왕청골 어귀에 있는 동일촌까지 몽땅 태워 버렸던 것이다. 김준흠(金俊欽) 노인(1915년 6월 7일 왕청 덕원리 출생). 덕원리의 명동학교 대종교 활동 등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노인이 선 자리가 1932년 불타 버린 33호 덕원리 마을 터이다. 1990년 4월 20일 글쓴이 찍음. 덕원리 마을의 옛터. 파란 풀이 돋아나는 밭과 마른 풀이 자란 언덕에 33호 농가가 오붓이 자리잡고 있었다. 6세에 떠나 꼬박 60년만에 다시 고향 덕원리에 찾아온 서일의 손자 서경섭(우2), 그의 부인 문미야(文美野)(좌2) 서경섭의 장자 서진우(우)와 장녀 서옥란(좌) 이때부터 대감자를 제외하고 덕원리와 동일촌은 완전한 페허로 되었으니,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근절되어가고 있다.
(그림1,2를 참조. 그림2는 덕원리에서 출생하고 명동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김준흠(76세), 김윤식(71세) 등의 공동제공에 의해 제작했음)
이 참화를 잊지 못해 유전된 노래가 있으니 바로 ‘대감자전가’이다.
천9백32년 4월 6일에 대감자의 반일전은 시작되었네.
무죄량민 주검은 들에 널리고
피는 흘러 만주들에 물들었나니
대포알은 앞뒤산에 뜰뜰 울리고
기관총과 류산탄은 빗발같도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폭탄 던지니
무산대중 학살을 능사로 한다.
대두천의 화염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잿터뿐이다.
리난민은 사오방에 널려 있고요
왕청들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만주들에 잠겨 있는 무산대중아
일치하게 단결하여 일어나거라
악마 같은 일본제국 강도놈들을
우리들의 주먹으로 때려눕히자
농가에다 불지르고 민중학살은
최후발악 야수행동 그것 아니냐
우리들의 끓는 피는 전쟁장에서
승리의 붉은 기로 휘날리리라.
덕원리 마을이 훼멸되기 전야에 전 촌에 33호가 있었는데, 그 호주들의 이름을 적어보는것도 서일·현천묵 등의 개척으로 이루어진 유서 깊은 덕원리에 대한 마지막 기념이 아니겠는가. 최학삼, 엄노규, 이대홍, 최두봉, 김동환, 김춘일, 이주봉, 최익현, 김기인, 최세일, 이○○(이서방), 박학준, 이홍렬, 최동권, 김창환, 김문명, 조권순, 조신순, 김문약, 최수향, 채기철, 김영환, 엄정남, 최선생(한의), 김이흠, 방창준, 김병흠, 김관세, 한승묵, 이응세, 정공예, 정공순, 최두빈 서윤제는 누님 서죽청과 매부 최관이 동경성에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향했다. 동경성에 와서 봇짐을 풀 때는 1933년 말이요 식솔로는 어머니 채씨, 서윤제, 아들 경섭(9세)과 만섭(4세) 넷뿐이었다. 서윤제 일가가 동경성에 자리잡자 당년의 독립운동가들과 대종교 교우들이 서일의 부인인 채씨에게 문안을 드리러 오는 일이 끊이는 날 없었다. 당년에 독립군 무장을 메던 사람들이 후에는 농사도 짓고 훈장질, 의사질 등등 별별 일을 다하고 있었다. 매년 8월 27일에는 제사모임이 성대하기도 하였다. 1938년 서일의 부인 채씨는 64세를 일기로 동경성에서 별세하였다. 서윤제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두 아들을 데리고 고독하고 적적하게 살아가다가 권고에 못 이겨 1939년에 재처하였으니, 이름은 허정숙이었다. 허정숙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므로 아들형제를 키우는데 모성애를 쏟았다. 동경성, 발해왕궁의 뿌리가 박힌 곳에 또 한 차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강점한 지 옹근 10년이 넘어 소위 저들의 ‘왕도낙토’를 건설하고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들어 동북인민을 겉으로부터 속까지 ‘황민화’하려고 발광할 때 저들의 후방기지에서 ‘대종교사건’이 일어났으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임오교변이었다. 대종교의 제3세 교주 윤세복은 발해왕터에 천전과 교당을 짓고 대종학원을 세워 훌륭한 일군을 양성하려는 계획이 목단강성공서의 허가를 얻게 되자 ‘천전건축주비사무협의회’를 내오고 그 준비에 여념 없이 바삐 돌았다. 이것이 일제 놈들의 간교한 계책인 줄을 몰랐다. 감쪽같이 속았다. 일제는 갖은 수단으로 대종교의 내막을 손금보듯 장악한 후 1942년 11월 19일 하루 동안에 신안진·하얼빈·영안현·목릉현·밀산현·돈화현·연길현·충북 제천군·경남 의령군·경북 김천읍 등지에서 25명의 대종교 골간들을 체포하였다. 서윤제도, 최관도 동경성에서 체포되었다. 이날 일경들은 서윤제와 최관의 집을 발칵 뒤집고 눈에 보이는 종이쪼가리나 사진들을 몽땅 가지고 갔다. 이로 하여 서일의 부친, 서일·서윤제·최관 등의 친필기록과 많던 사진들도 절단나서 후세에 물려 내려온 것이 없었다. 서윤제는 영안현 경무과 목단강경찰처 목단강고등검찰청을 돌면서 취조받다가, 1944년 1월 2일에 김진호·김두천·이성빈과 함께 교무무책이라 하여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서윤제는 1년 가량 농사를 짓다가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자 향토를 보위하고 인민정권을 보위하기 위하여 발벗고 나섰는 바 동경성 12중대를 창립하고 중대장직을 맡았다. 1946년 초에 안사령이 나와서 독립1탄을 조직할 때 서윤제의 12중대는 3영에 가입하였다. 이 시기(46년)에 서윤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서윤제는 중국해방전쟁에 참가하였고, 항미원조전선(*편집자 주:6·25동란)에도 나갔다가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에야 중국으로 돌아왔다. 제대 후 목단강병기공장에도 있었고, 목단강22창합작사 경리일도 하였고, 목단강시 농기계공장 당지부서기로도 근무하였다. 1956년도에 서윤제는 퇴직한 후 가정을 이끌고 목단강에서 하얼빈으로 이사갔다. 1960년에 서윤제는 부인 허정숙과 함께 흑룡강성 해림현에 가서 노년에 휴식도 할겸 양봉을 하다가 전례 없는 ‘동란의 연대’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쟁 맞다가 1969년에 62세로 세상을 떴다. 서윤제의 두 번째 부인 허정숙은 1984년에 연길현 조양천진에서 74세로 병사하였다. 서일의 사위 최관은 1900년에 조선 함경북도 종성군 용계면 석산동의 청빈한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8살에 부모를 따라 만주의 훈춘현 남별리로 왔다. 1914년에 남별리에 설립된 사립춘동소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를 하고 가정의 이주와 함께 왕청현 덕원리의 사립명동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3·1운동 후 최관은 왕청현의 여러 소학교를 다니며 선생을 하다가 1926년경에 덕원리로 돌아와 명동소학의 선생으로 4,5년간 근무하였다. 최관은 서일 선생의 교육을 직접 받아 학생시절에 벌써 독립사상이 움텄고, 자신이 교직에 있는 기간에 학생들에게 그 맥락을 이어놓아 일경의 주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되었다. 1931년 봄에 최관은 다른 3명의 선생과 함께 백초구영사분관에 잡혀가 한 달간 시달림을 받은 후 더는 교직에 있지 못한다는 통령을 받자 해림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1934년 정월에 최관은 동경성으로 이주한 후 대종교의 제3세 교주 윤세복의 감화 하에 대종교에 가입하였다. 동년 3월 9일 동경성에 경일시교당이 설치되었는데, 설립자는 최관이었다. 1934년 6월에 대종교 총본사가 밀산 당벽진에서의 6년간 동면을 종말 짓고 동경성에 전이해와 최관은 직접 총본사의 사무를 보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총본사는 동경성역에서 내려 서쪽 방향으로 곧추 가다가 발해소학교로 가는 길을 꺾어 들어 동쪽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에도 자금난으로 하여 총본사는 기와건물에 들지 못하고 조선사람들의 전통적인 8칸집 두배만큼한 초가집을 총본사의 본거로 삼았다. 집은 모두 9칸인데 제일 동쪽에는 4~50명이 앉을 수 있는 통칸 교실이(예당으로도 쓰임) 있었다. 교실 서쪽으로 중간을 갈라서 남북으로 각각 4칸씩 8칸이 있었다. 남쪽의 두 칸은 온돌을 앉힌 사무실이고 그 다음 한 칸엔 서적을, 마지막 한 칸은 객실로 썼다. 북쪽의 첫 칸은 부엌 칸이고, 두 번째 칸은 천진을 모셔 놓고 윤세복 종사가 주숙하였다. 세 번째 칸은 윤세복의 딸(곱사등이)이 들어 있었고, 마지막 칸은 창고 삼아 썼다. 평면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그림3은 총본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서일의 손자 서경섭의 제공에 의해 제작했음.
그림3. 대종교 총본사 평면도(임오교변 직전)
①교당 겸 교실 ②사무실(온돌) ③사무실(온돌) ④서재 ⑤객실(客室) ⑥주방 ⑦천진, 윤세복 거실(온돌) ⑧윤세복의 딸 거실(온돌) ⑨창고
총본사는 경제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매일 편지가 한 묶음씩 오고 또 한 묶음씩 부치는데 때때로 그 우편료를 보장할 수 없어 좌중의 닫장거리는 사재(私財)를 털어 내기도 했다 한다.
대종교의 4대 경절인 개천절·어천절·중광절·가경절의 경축행사를 준비할 때에는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기념카드를 쓰는 기묘한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하였다. 액틀 안에 흰 종이를 바른 다음 풀로 경절 이름과 개천년월일을 쓴다. 그 위에다 여러 가지 색깔의 유리병을 깨서 체로 친 콩알만큼씩 한 것들을 뿌리면 풀이 있는 곳에 유리가 묻어 마른 다음엔 햇빛에 아롱다롱 반짝이는 것이 돈푼을 적게 쓰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워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최관은 이런 경제적 어려움의 숨막히는 고비에서도 총본사의 사무를 적극 도왔고 호주머니를 털어 성의를 다했다. 1939년 8월 대종교서적간행위원회가 건립될 때 최관은 8명 발기인중의 한 사람이었고, 동간행회에 10고(股)의 출자금을 납부함으로써 최고액수 10고를 납부한 10명중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최관은 총본사에서 개최한 직원회의에 출식하여 각종 행사를 협의 결정하는 사무에 직접 참가하였으며, 1942년 3월 16일과 10월 3일에 열린 총본사협의회에서 천전과 학교건축에 관한 사항, 전리·전범·전강 개선에 관한 사항, 조선총독부에 향해 포교(布敎) 허가신청을 제기할 사항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로 하여 최관도 1942년 11월 19일(임오교변 때) 영안현 동경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최관은 대종교 제3세 교주 윤세복 이하 20여명의 대종교 골간들과 함께 영안현 경무과의 특별취조본부로부터 목단강성 경무청 특무과, 목단강고등검찰청을 거쳐 혹독한 고문과 견디기 어려운 기한의 협박, 잔혹한 정신적 유린을 겪어냈다. 목단강고등검찰청에서는 치안유지법 제1조를 위반했다는 죄명으로 1944년 5월 7일에 최관을 포괄한 7명에게 아래와 같은 판결서를 내렸다.
윤세복 도형 무기
김영숙 도형 15년
윤정현 도형 8년
이용태 도형 8년
최관 도형 8년
이현익 도형 7년
이재유 도형 5년
최관 등은 목단강의 액하감옥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감금고역에 시달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결속을 고하는 일본 파시스트의 멸망과 더불어 판결 후의 1년 3개월 5일 만인 1945년 8월 12일 오후 2시경에 소련홍군에 의해 액하감옥 대문이 분쇄되면서 전원 7명이 다시 눈부신 해를 보게 되었다. 차디찬 철창 속의 희망 없던 감금생활이 일조의 뇌성으로 꿈같이 사라지자 부서진 옥문으로 뛰쳐나온 윤세복 이하 6명은 영안현 해남촌의 최창진 댁에서 2일간 휴식하고 8월 14일에 탄압 속에 문이 닫혔던 대종교총본사를 다시 부활시켰으니 그 직원은 다음과 같다.
전리(典理) 김영숙/ 전범(典範) 이현익/ 전강(典講) 윤정현/
경의원장(經議院長) 이용태/ 경각봉선(經閣奉宣) 최관/
드디어 8월 22일에 총본사 직원들이 해남촌으로부터 동경성으로 귀환하여 총본사간판까지 걸고 본격적인 사무를 개시하였다. 1946년 1월에 대종교총본사가 만주로 들어온 지 35년만에 귀국하여 서울로 갈 때 최관은 동행하지 않고 동경성에 남아 있었다. 광복 후 사회질서가 잡히면서 최관은 영안현 고려인민회장, 영안현 선정과장 등으로 봉직하다가 신안진 조선족학교장으로 근무하였다. 정년퇴직 후 목단강에 와서 만년을 보내다가 1980년에 80세를 일기로 병고 하였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점 당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반일단체를 꾸릴 수 있고 반일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온상인 만주와 연해주에로 자리를 옮겼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 마냥 속출하였는 바, 북간도에만 하여도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군무독군부·국민회군·의민단·신민단·광복단·의단·의군부·흥업단·야단·혈성단 등 20여개 반일단체가 산생하였다. 그 중에서 병력이 많고 무장이 비교적 충족하며 훈련이 잘되고 전투경험이 풍부하며 항전성과가 뛰어난 무장단체로는 홍범도가 영도하는 대한독립군과 서일·김좌진이 영도하는 북로군정서를 들어야 할 것이다. 북로군정서는 1911년의 중광단을 기점으로 하여 정의단 군정부를 걸쳐 흘러내린 반일격류로서 이 전반과정의 벅찬 기수는 서일이었다. 시작이 절반이란 말이 만사에 개척의 힘겨움을 가르쳐주듯, 서일은 망국으로 인한 탄식과 혼란 속에서 반일대열을 각이 나게 지었으니 그 주요실천은 세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는 민족종교를 고수하는《회삼경》등 대종교 교리를 저술한 것이고, 두 번째로는 분산된 의병과 애국청년들로 중광단을 조직한 것이고, 세 번째로는 미래의 장구지책으로 명동학교를 꾸려 많은 반일용사(反日勇士, 명동학교 중학부의 졸업생 대부분이 10리평에 있는 사관연성소에 입학하였음)들을 키운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중한 짐을 한 몸에 떠메고 나가는 속에 서일의 고금에 통한 박식, 탁월한 조직능력과 뛰어난 재질을 나타낸 것이다. 서일은 10년간의 심혈을 몰부어 마침내 막강의 군사력을 가진 반일무장력(북로군정서)을 키워 기타 독립군 무력과 함께 일제가 떠벌리던 불가전승이 탄 황금투구를 청산리계곡에 처박아 넣고 뭉개고 짓밟아 버렸다. 장하고 통쾌한 기적, 무장항전사상의 가장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애석한 것은 서일의 일생이 너무나도 짧았다는 점이다. 정력의 왕성기에 41세로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원래 할 수 있던 많은 일들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하건만 서일의 이름은 사책에 적힌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명칭과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본문에서 서일의 후예들인 서윤제와 최관의 일생도 더듬어 보았다. 그들이 겪은 일련의 경난에서 날로 가심해진 일제의 탄압을 보아낼 수 있으며, 반일정신의 끊이지 않는 물림을 보아낼 수 있다. 해방 후 서일의 후예들은 처절했던 항일전쟁의 승리과실을 보위하고 미만한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혹은 무장을 들고 혹은 교육현장에서 공산당의 기치 아래 열렬한 혁명전사로 분투를 아끼지 않았다. 혁명이란 열차는 바로 이러한 연결 속에서 전진을 멈추지 않고 내달린다.
附記
1. ‘청산리대첩’이란 역사적으로 보면 ‘어랑촌대첩’이여야 했을 것인데 이미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굳어 버렸고 또한 첫 싸움이 그곳에서 났고 ‘청산리’ 그 지명 역시 듣기 좋아서 뭇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그 이름을 좇았습니다. 2. 연변지구의 여러 반일무장부대들 가운데서 ‘독립군’ 명칭을 가진 부대는 홍범도의 부대밖에 없었음을 염두에 두고 홍범도의 부대와 다른 독립군부대를 구분하기 위하여 모든 독립군부대를 일컬을 때는 ‘반일무장부대’ 혹은 ‘반일무장단체’로, 홍범도가 지휘하는 부대를 일컬을 경우에는 ‘독립군부대’ 또는 ‘독립군[연합부대]’로 확정했습니다. 이는 다른 뜻이 없고 단지 불필요한 혼돈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