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계(武散階)
유형 : 제도
시대 : 고려
성격 : 위계제도, 행정제도
시행일시: 995년(성종 14)
정의
고려시대 무관의 위계제도.
개설
향리·노병(老兵), 탐라의 왕족, 여진의 추장, 공장(工匠)·악인(樂人) 등에게 수여되었다. 문무 양반에게 수여된 문산계와 대비되는 위계였다.
연원 및 변천
고려시대의 위계제도는 문·무산계 두 계통의 체계를 세워 문산계에 속하는 문무관료층과 그 밖의 계층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문·무산계가 제정된 995년(성종 14) 이전에는 양자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았으며 위계제도에 있어서는 공통이었다. 무산계가 성립되면서 얼마간 종래의 관행이 존속되었으나 그 이전에 비하면 양자의 구별은 매우 명확하게 되었다. 이는 그 후신인 향리 및 기타의 것과 구별하려는 데 있었다.
무산계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단순한 허직(虛職)에 불과했으며, 관직과 관계되는 검교직(檢校職)·동정직(同正職)과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무산계 수여자에게는 전시과(田柴科)에 의하여 일정한 토지가 지급되었다.
무산계와 전시과를 대조해 보면, 무산계라는 명목으로 지급되는 토지의 액수는 6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무산계 중에서 제1등급에서 제3등급에 해당하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진국대장군(鎭國大將軍)이 무산계 전시과의 토지지급대상에서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제1등급으로부터 제5등급에 이르기까지의 지급대상은 제4등급의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이하 제29등급의 배융부위(陪戎副尉)까지로 되어 있다. 이들이 무산계를 받고 무산계라는 명목의 급전규정에 따라서 토지의 지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무산계 전시과 제6등급에 들어 있는 대장(大匠)·부장(副匠)·잡장인(雜匠人)·어전부악건악인(御前部樂件樂人)·지리업(地理業)·승려(僧侶)들이 무산계라는 명목의 토지를 받은 것은 이해가 안 된다.
특히, 이 가운데 지리업·승려의 경우 『고려사』 무산계 기사에 계속되는 별사과(別賜科)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무산계는 그 명칭과 내용의 변화를 수반하면서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내용
무산계의 수여대상은 향리·노병사·탐라 왕족·여진 추장·공장·악인 등 매우 다양한 계층이었다. 특히 탐라 왕족과 여진 추장의 경우에는 그들의 왕족이나 추장으로서의 지위를 고려 왕실이 보증하는 구실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들로서는 영예로운 무산계를 받음으로써 그들 집단에 대해 권력을 과시하게 하는 작용도 하였을 것이다.
한편, 고려로서는 탐라나 여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 왕족이나 추장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으며, 반면에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 동시에 고려의 지배력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병사·공장·악인 등에게 수여된 경우는 다른 것이었다. 80세 이상 노병사에게의 수여는 그들에게 영예를 줌으로써, 군역을 부담하는 많은 병사에게 사기를 북돋우어주는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하층민에 속한 공장·악인의 경우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수신분의 공장·악인들이 무산계를 받더라도 결코 특권계급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일종의 회유책에 불과하였다.
향리에 대한 무산계의 수여는 보다 다른 의미가 있었다. 즉, 신라 말기에 나타난 지방호족의 후신으로서 각 군현의 실력자인 향리를 통제하고 그들을 국가의 지배기구에 끌어들이는 것은 고려 초기에 있어 중요한 정책의 하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향리의 세력을 인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로부터 역(役)을 징발하기 위함이었다.
고려 초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향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지방을 지배할 수가 없었는데, 여기에 향리를 우대하는 정책의 하나로 무산계가 수여된 것이다.
그런데 무신이 아닌 이들에게 무자(武字)가 든 무산계를 수여한 이유는 이들이 군인 또는 군역의 부담자였기 때문이었다. 무산계를 받은 자 중 노병은 노령의 군인이었으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보겠으며, 향리도 군인 또는 작은 부대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사』 병지(兵志)에 의하면, 향리는 일품군(一品軍)의 별장(別將)·대정(隊正)이었다. 별장·교위·대정은 중앙군의 육위(六衛)에 있어서는 장교였다. 향리는 육위의 장교가 될 수 없었으나, 일품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노역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향리가 노역부대라고 하는 군역집단의 지휘관이 되어 이군육위(二軍六衛)의 장교와 같은 명칭을 띠었다고 하면, 향리에게 무산계를 수여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공장·악인도 일품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그들은 기술을 가지고 역에 복무하는 일종의 기술군인과 같은 처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 왕족, 여진 추장은 본래 그 지역의 지배자로서 정치와 아울러 군사에 있어서도 지휘자였을 것이다. 고려의 지배 아래 들어와서도 아마도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종래의 지배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무산계의 수급자가 무반은 아니었으나 군인 또는 군인에 준하는 부류들이었는데, 이것은 고려의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에 관한 가장 큰 문제였다. 문무관을 문산계로 편성하고 그 밖에 광범위한 계층을 무산계로서 통할한 이면에는, 국가가 민중을 군사적 편성에 의해서 지배하려고 하였던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
『고려토지제도사연구(高麗土地制度史硏究)』(강진철, 고려대학교출판부, 1983)
「高麗の武散階」(旗田巍, 『朝鮮學報』 21·22合倂特輯號, 1961 ;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1972)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