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광평대군(廣平大君) 묘역이다.
광평대군묘역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그의 부인 영가부부인 신씨(申氏)의 묘를 비롯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그리고 광평대군의 아들인 영순군(永順君)을 비롯한 종문 700여기의
묘소가 같이 있다. 또한 이 곳은 종가 재실(齋室)의 오랜 가옥이 있는 공동묘역이다.
총면적 124,820평(412,627m²), 현존하는 서울 근교의 왕손 묘역 중 오랜 세월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조용헌 원광대 교수의 '조용헌칼럼'을 통해 이 묘역의 특징을 살펴 보려고 한다.
"풍수(風水)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우리나라 여러 집안들의 선산(先山)을 답사할 기회가 많았다.
그 집안 조상들의 묘들을 둘러보다 보면, 묘비(墓碑)에 쓰인 한문도 배우고, 주변 산세가 어떤 모양으로 되어 있는가,
과거에 그 집안의 선조들이 위기 상황에서 보여주었던 결단력과 인내력 등을 공부하게 된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광평대군(廣平大君) 묘역은 이런 공부를 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비롯하여 그 후손들의 묘 700여 기(基)가 있다. 묘역의 넓이는 13만 평.
다른 집안들의 선산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광평대군의 묘역은 한 집안의 묘 700여 기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효율적으로 묘지를 조성한 셈이다.
이곳은 전국에서 예장(禮葬)이 잘 된 묘역으로 손꼽힌다.
그 사람의 신분에 맞게 묘의 규모가 교과서적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대군에서부터 판서, 참판, 한성판윤, 승지, 군수, 진사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묘의 규모와 석물(石物)이 다르다.
예를 들면 왕자인 광평대군의 묘역에는 돌로 만든 장명등(長明燈) 2기가 좌우에 있고, 우측에 신도비(神道碑),
그 아래에 문인석(文人石) 2구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영의정을 지낸 녹천(鹿川) 이유(李濡)의 묘에는 장명등이 없다.
영의정의 묘에도 장명등은 설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대신 신도비는 규모가 아주 크다. 사각형의 형태로서 높이가
387cm에 달한다. 또 묘를 둘러싼 둘레석은 영의정만 있고 참판은 없다. 둘레석은 정1품 이상만 쓰도록 되어 있었다.
문무석은 참판도 있지만, 그 규모와 복식이 영의정에 비해 간단하다. 참판은 문인석이 있지만, 군수는 문인석이 없다.
현재 이 묘역을 관리하는 사람은 녹천 이유의 11대 종손인 이병무(64)씨이다. 필경재(必敬齋)의 주인이다.
폭우가 쏟아질 때면 혹시 묘가 유실될까 봐 새벽 2~3시라도 비닐천막을 들고 묘역에 달려간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조상 묘에 가서 하소연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화장(火葬)이 대세인 요즘에 광평대군 묘역은 조선시대 묘지 풍습을 알려주는 ‘묘지 박물관’이 되었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묘지박물관(2006년 10월 3일자)에서
광평대군 이여의 묘는 묘역 중에서 가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모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으로 한강을 등지고 있다.
마을 뒷산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조선왕릉만이 자랑하는 사초지(沙草地) 강(岡)이 돋보이는 광평대군 묘이다.
광평대군과 부인 신씨의 묘소는 높은 언덕 위에 각각의 무덤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 묘비와 낮은 받침돌을 둔 혼유석(魂遊石)이 갖춰져 있다.
하단에는 2기의 장명등(長明燈)과 우측에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또 한 단 아래 좌우로 문인석(文人石) 2구가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단을 쌓은 위에 봉분이 있는 양식은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의 묘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선 초기 대군묘(大君墓)의 규모나 규범을 참고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신도비는 명종 7년(1574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심의겸(沈義謙)이 짓고, 두전(頭篆)은 박렴(朴簾)이 썼다.
성군 세종은 그의 정비 손인 8대군(문종 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과 후궁 손 10군(·화의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한남 수춘 영풍) 왕자 가운데 자신을 빼닮아 학문에 열중하고 언행이 조신한 광평을 가장 총애했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여는 8세 때 광평대군에 봉해지고 12세에 평산 신씨 신자수(동지중추부사)의 딸과 혼인한 후 그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세종 20년(1438) 북방 경비강화와 풍속교화를 위해 서울 경재소(京在所)를 두었다. 이때 광평은 함경도 종성을 관장했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민했던 그는 종실 관리부서인 종부시(宗簿寺)를 맡아 종친과 신료들로부터 능력과 덕망을 인정받기도 했다.
광평대군은 스무살 때 창진을 앓다 죽었다. 호환마마라 불리던 천연두가 바로 창진이다.
광평대군에게는 부인 신씨와 태어난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갓난 아들 영순이 있었다.
세종 내외는 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였다 한다. 젖먹이 아들과 함께 남겨진 스무 살의 청상과부를 세종내외가
돌봤다고 전한다.광평의 부인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비구니가 되었다.
영순군은 궁궐 안에서 세종과 소헌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여 과거에도 급제하고 유능한 관료가 되었다.
광평의 유일한 핏줄 영순군마저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영순군의 부인 최씨 또한 시어머니를
따라 비구니가 되었다.비구니가 된 고부는 광평대군 묘(필경재 뒤편 산)에 있던 견성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원당으로 삼고,
하사받았던 광대한 토지(강남 수서 일대)와 노비 절반을 희사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광평의 초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서촌 학당리(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이다.
연산군 1년(1495) 광평의 묘역에 성종의 선릉이 들어서고 아들 영순군 묘가 있던 현재 묘역으로 천장된다.
광평대군 묘역은 500년이 넘는 조선 초기 묘제 전통을 지켜 오고 있으며 문화재 전문위원과 각 성씨 문중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용맥을 타고 치고 달려온 생기(生氣)는 잠시 잉(孕)에 숨을 고르고 봉분으로 들어간다.
광평의 묘 역시 생기의 흐름을 촉진하는 잉(孕)이 제법 실(實)한게 명당임을 확인해준다.
광평 묘역은 서울 강남의 대모산을 조산(朝山)으로 앉힌 북동쪽 기슭에 정남향(자좌오향) 혈처를 찾아 왕릉처럼 자리하고 있다.
천년 학이 커다란 날개로 알을 품는 형상의 학익포란형(鶴翼抱卵形)의 산세가 안정감을 준다. 묘와 사당 사이에는 명당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천심수(天心水)가 혹독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샘솟고 있다. 이런 명당에서는 굳이 나경으로
측정 안 해도 풍수법수에 딱 맞아떨어진다.
야사에서 전하기로는 광평대군 후손들은 바다 생선 준치를 먹지 않는다.
파시조 광평이 20세 되던 해 식사 도중 목에 걸린 준치 가시가 화근이 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야사는 전한다.
광평대군은 영순군(永順君)을 두었다. 영순군은 남천군(南川君) · 청안군(淸安君) · 회원군(會原君)을 두었다.
영순군은 광주군 이을언리 수토산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光秀山)에 영면한다. 광평대군 묘역의 시작이다.
그 산 아래 영순군의 아들 남천군(南川君) · 청안군(淸安君) · 회원군(會原君) 3형제의 집을 지어 3궁(三宮)이라 일컬었으며,
이 때부터 이 마을을 `궁말'이라 불렀다. 이 곳이 광평대군손의 근원지가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광평대군과 평산 신씨 사이의 독자이다. 휘는 부(溥)이다. 아명은 복(福)이고 자는 준지(俊之)이며 호는 명신당(明新堂)이다.
시호는 공소공(恭昭公)이며 18세에 중등시에서 상급 5인중에 급제하고 1468년 세조대왕이 온양에 거둥하여 행재소에서
온양 중시를 보게 하였다. 그는 또 응시하여 장원으로 제하니 세조가 기뻐하여 문에는 영순군, 무에는 구성군으로 문무양현이라
칭하다. 그는 천성이 순수 단아 총명하여 사리에 밝았으며 교만한 기색이 없이 항상 겸손하고 온공하여 억울한 일을 처리하는
기밀사의 일을 관장하면서도 경우와 사리에 밝게 죄 없는 사람을 많이 보살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에 책정되어 현록대부에 제수되고 1469년에 보사정난익재공신이내려지고 1470년 감기로 악화되어
돌아가시니 향년27세이다.
이름은 이방번(李芳蕃).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부인은 개성왕씨(開城王氏) 정양대군(定陽大君) 왕우(王瑀)의 딸이다.이성계(李成桂)의 공로로 어려서 고려로부터
고공좌랑(考功佐郎)에 제수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8월 무안군에 책봉되면서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고, 1393년 10월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節制使)로 개수되었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이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하여 세자 자리를 동모제(同母第) 이방석(李芳碩)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이 이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주동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공순군(恭順君)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를 후사(後嗣)로 정하면서 입묘봉사(立廟奉祀)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추성(楸城)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祀宇)가 건립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문종의 시호를 피하여
장혜(章惠)로 개시(改諡)되었다.1680년(숙종 6) 7월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김수환(金壽桓) 등이 “이방번·이방석은 신덕왕후의 부묘(祔廟: 현종 10년 1월 신주를 종묘에 안치) 후 법으로써 마땅히 대군으로 증작(贈爵)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빠뜨렸으니 진실로 법에 어그러진다.”라고 상언하여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처음에 도진릉동(道津陵洞)에 소재했으나, 그 뒤 광주(廣州) 학당리산(學堂里山)으로 이장되었다. 1474년(성종 5)에 그 지역이 성종의 능침(陵寢)으로 결정되자 다시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