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계몽시대의 예술
1. 18세기 계몽주의가 예술에 끼친 영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분야는 연극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비극에서 연극의 주인공은 귀족이나 영웅과 같은 특별한 존재들이었고 이들 운명의 급작스러운 전환은 핵심적인 연극적 주제였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의 성장은 연극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차츰 중산층의 인물이 고상하고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의 운명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진 시민극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귀족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시민계급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18세기가 보통의 시민들을 진지하고 극적 행위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비극적 운명의 희생자이자 높은 도덕적 이념의 대변자로 등장하도록 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2. 시민극은 고전비극과는 운명과 사건 그리고 인물에 대하여 다른 접근 태도를 보였다. 고전비극의 주역들이 고립적인 존재로서 물질적 현실과는 외면적으로 접촉할 뿐 내면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은 고립되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그려진 반면에, 시민극은 인간을 사회적 환경의 일부로 설정하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는 존재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시민극이 진정으로 새로운 점은 이제 극적 갈등이 개별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사회제도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 일정한 사회적 집단의 대표자인 주인공이 어떤 정체모를 비개인적인 힘과 싸우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 입장을 하나의 추상적인 이념으로 기성의 사회질서에 대한 고발로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과거의 비극에서 비극적인 행위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해 진행되었고 운명의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면, 시민극에서의 비극적인 행위는 심리학적 동기가 부여됨으로써 관객들은 사건과 행위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와 공감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러한 변화는 무대 위에 인물들과의 동조를 더욱 확대시켰다.
4.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의 가능성을 신뢰하였고 변화의 힘을 확신하였던 시기였으며, 새로운 시민계급의 장악력을 중명하였던 시기였다. 시민계급은 보편적인 도덕관념의 수호자이자 실천자로서 스스로를 자부하였다. 하지만 시민계급의 성장은 이들에 대한 또 다른 반대 세력을 형성시켰다. 시민계급의 허위와 허상을 공격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반부르주아지’ 또는 ‘초부르주아지’적 세계관을 표명하며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제기하였다. “(지식인들은) 일종의 반부르주아 내지 초부르주아적인 생활감정을, 즉 시민계급은 본연의 자기 이념을 배반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보편타당한 인류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식을 만들었다. (.....) (이러한) 경향들은 대부분 반시민적이고 반민주적인 원천에서 나온 것이었다.”
5. 계몽주의가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서구권에서 확산되고 있는 상황과는 달리 독일의 계몽주의적 이념은 고립되어 있었다. 16세기 독일은 상업의 발달로 인해 시민계급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지만, 그 후 벌어진 30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수많은 영주 국가로 분열되는 ‘소국분립주의’로 전환되었고 시민계급이 몰락한 대신에 세습귀족들과 토지귀족(융커)들이 정치사회적 지배력을 장악하였다. 시민계급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빼앗긴 채, 기껏해야 하급관리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위상은 독일의 독특한 문화, 철학, 사상의 성격을 만들어냈다.
정치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은 정치적 발언이나 사회적 개혁의 목소리 대신에 비현실적이고 정관적이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의 아닌 수동성으로부터 목가적인 사생활의 이상을, 속박된 외부적 삶의 강제로부터 내면적 자유의 이념을, 범속한 경험적 현실에 대한 정신의 절대적 우월성이라는 이념을 발전시켰다.”
6. 유독 지독하게 난해하고 관념적이며 모호하고 암시적인 그들의 사고표현을 독일인들은 ‘독일식 사고’ 또는 ‘독일의 표현방식’이라고 강조하며 그들 사상의 이상주의이며 정신적인 성격을 긍정하였다. 하지만 하우저는 그들의 정신적 경향은 정치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이 자신의 현재적 지위를 옹호하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다만 독일 정신사의 어느 일정한 시기, 즉 18세기 후반에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계층 즉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현실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린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사고양식 및 언어양식일뿐인 것이다.”
7. 독일에서 인기가 높았던 외국의 철학자들은 프랑스의 루소와 영국의 샤프츠베리였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성이나 자연적인 요소를 중시하였고 신비스러운 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볼테르는 인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당시 독일의 사상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당시 문화적으로 영향력있던 스딸부인은 독일인이 강조한 개인적 자유나 ‘문학적 과격공화주의’과 같은 주장이 실제 정치생활에서 배제된 것에 대한 심리적 위축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을 거라고 추측하였다. “(독일인들의) 비의적 언어와 ‘심오함’, 난해성과 복잡성에 대한 숭배는 동일한 근원에서 거래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독일 지식인층에게 거부되었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정신적 고고성과 독자성을 통해 보상하고 더 높은 차원의 정신생활에 의해 정치적 특권에 상응하는 엘리트로서의 예외적 위치를 홝보하려는 노력의 표현이었다.”
8. 하우저의 18세기 계몽시대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정신적, 문화적 사조가 반드시 동일한 시대에 작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18세기 독일은 전혀 ‘계몽주의’적 시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사회가 처한 정치사회적 조건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회적 통로가 막혀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변화에 힘을 상실했을 때, 더욱 정신적으로 현란하고 난해한 사고로 발전되었다는 점은 사상의 난해함이 진리의 발견과는 관계없다는 점을 알려주며, 관념 속으로 전이된 사고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어떤 변화도 추동할 수 없는 무력한 지적 유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념의 강조는 결국 현실을 왜곡하거나 현실의 무력함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현실을 지배하거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해 권력자의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념과 현실과의 함수적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일의 이상주의는 소외된 지식인들의 지적표현이었다면, 나치의 인종적 이상주의는 권력을 강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첫댓글 - "이념의 강조는 결국 현실을 왜곡하거나 현실의 무력함을 방증하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