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완창 - <수궁가>
1. 판소리 <수궁가>는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해학적 작품이다.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려는 별주부(자라)의 충직함도 주목할 내용이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무엇보다 ‘토끼’의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묘할 정도의 실천력이라 할 수 있다. 토끼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토끼는 욕망이라는 허망에 의해 끊임없이 배신당하면서도 자신의 생존이라는 최고의 욕망을 끊임없이 지켜나간다. 때론 어리석은 면도 보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위협에 대응하는 토끼의 용기와 지혜는 <수궁가>를 관통하는 최고의 재미라 할 수 있다.
2. 토끼는 용궁에 끌려간 후 ‘간’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기괴하면서도 나름 고개가 끄덕이는 논리로 용왕을 설복한다. 토끼의 허무맹랑한 변명에 넘어가는 용왕의 절박함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맹목적인 사고를 여실히 보여준다. ‘간’을 넣어다 뺏다 한다는 토끼의 허황된 말도 오직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죽어가는 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수많은 사기적 행위들이 판치는 것이다. 과거 S가 병을 고칠 수 있다하던 2000만원이 넘던 치료주사에 매달린 것처럼 토끼 또한 목숨에 간절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용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토끼는 용궁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계속 넘긴다. 그때마다 절묘한 방법과 교묘한 화술을 통해 위기를 탈출한다. 위기에 맞서는 토끼의 행위는 고통과 압제 속에서 살아가던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특별한 쾌감을 선사했을 것이다. 토끼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한다. 힘이 없는 존재가 험난한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비록 남을 속이고 거짓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배짱과 실천적 지혜라는 점을 토끼를 통해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닥치는 죽음의 공포는 ‘토끼’로 상징되는 힘없는 민중이 감내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점에서 토끼의 생존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비극적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3. <수궁가>의 묘미는 단지 별주부와 토끼의 두뇌싸움 뿐 아니라 그 사이에 끼워 넣어진 흥미로운 에피소드의 해학적 재미이다. 별주부의 소리에 내려온 호랑이가 별주부의 기괴한 모습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수많은 동물들이 상좌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인정욕구의 현장, 육지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토끼의 위기는 ‘별주부’와 ‘토끼’로 상징되는 <수궁가>의 핵심적 갈등보다도 더 흥미를 자아낸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즐기면서도 그 속에 담긴 신난하고 슬픈 인생의 수많은 난제들의 펼쳐짐은 웃음의 페이소스라는 모순을 만들어낸다. 고통 속에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실존을 웃음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4. <수궁가>를 비롯하여 판소리는 음악이 핵심이다. 하지만 공연을 관람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음악보다는 문학적인 면이 더 강한 예술적 장르라는 점이다. 아직 판소리의 소리에 대한 매력에 빠지지 못해서인지 한자성어로 도배된 대사들의 이어짐은 소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때 사설집을 통해 그 소리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만이 소리의 정체가 파악되고 소리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의미가 없이 울리는 소리는 비슷한 음조의 반복에 그치지만, 그 의미의 핵심에 도달했을 때 소리는 힘을 얻고 거기에 담긴 심오한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판소리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 음악은 ‘선율’이 중심이다. 그럼에도 선율이 실어내는 소리가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 수많은 장벽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직까지 판소리는 나에게 음악적 요소보다는 문학적 요소가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2024년 노벨문학상에 한국의 ‘한강’ 작가가 수상했다. 그에 대한 수상이유에 ‘시적인 산문’이라는 내용에 주목한다. ‘시’는 음악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한 시적 요소를 의미와 내용을 적확하게 구성하는 산문으로 표현됨은 두 가지 상반되면서도 종합적인 선율과 문자의 아름다운 결합이다. 판소리의 신비로움도 음악과 문자의 종합적인 융합에서 시작된다. 아직은 문자적 의미을 통해 판소리의 매력으로 들어가지만, 언젠가 소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누적된 경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기대해본다.
첫댓글 ^^^ 누적된 경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