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대문1
탐라포정사 진해루(鎭海樓)라 불리던 관아의 관문.

탐라포정사 현판(진해루)2

하마비(下馬碑)3
수령이하계하마는
수령(목사, 현감) 이외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 새겨져 있는 비석.

중대문4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

우련당(友蓮堂)5
우련당은 1526년(중종21년)에 이수동 목사가 성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가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후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
라는 속담이 유래되었으며, 1694년(숙종20년) 9월에는 이익태 목사가 중건하였다.
영조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못가운데
석대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이라 개명하여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본건물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평)이다.

관아의 연회실(우련당)6

홍화각(弘化閣)7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사직)가 사무를 보던 곳으로 1435년(세종17년) 최해산 안무사가
창건한 뒤 1648년(인조26년) 김여수 목사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39년)에 방어영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이 되었다.
그뒤 1772년(영조48년) 양세현 방어사가 중수하였고, 1829년(순조29년)에 이행교 방어사가 개건하였다.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로서는 가장 웅장하였다.
기문으로는 고득종기, 김진용중수기, 이원조중수기 등이 전한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훼철되었으며, 현재 고득종이 쓴 편액과 홍화각기가
새겨진 현판은 고양부 삼성사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본 현판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본건물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연희각(延曦閣)8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 등으로도 불렀다.
상이라 한 것은 판관의 집무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이원조 목사의
연희각기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이 없어서 건치 연월일을 상세히 알수가 없었다.
그 이름을 연희라 한 것은 외신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탐라기에 의하면
심연(1638년 6월-1640년 9월의 시가 부기되어 있고 이 때 목사의 겸직인 절제사가 방어사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에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건물은
1884년(고종21년) 홍규 목사가 중수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36.6㎡(41.33.평)이다.

귤림당(橘林堂)9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이원조 목사의 귤림당중수기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으로 된 국과원은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만이 연희각 가까이에 있다.
입추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공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연대는 알 수가 없다.
1743년(영조19년) 안경운 목사가 개건하였고, 1769년(영조45년) 다시 중수한 뒤 건물이 노후하여
이원조 목사가 1842년(헌종8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1칸, 측면1칸, 공포는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면적은 9㎡(2.72평)이다.

망경루(望京樓)10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중요한 제주목 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11년) 김수문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숙종9년) 이인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순조6년) 박종주 목사가 중수하였다.
1861(철종12년)에는 신종익 목사가 이 누대에 좌탑을 설치했으며, 오점과 김양수의 상량문이 전해온다.

송덕비11

연못12

기간지주(旗竿支柱)13
기간지주는 기를 달아두는 기구인 기간을 받치는 기둥이다.
이 기간지주는 제주목방어사의 황수기를 게양하는 깃대의 받침기둥이었다.

관덕정(觀德亭)(보322호)14
관덕정은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안무사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운 제주도의 대표적 건물로 제주목 관아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관덕이란 명칭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예기의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내부에는 고려 관원들의 사냥모습인
대수렵도와 십장생도 2점, 그리고 두보의 고시를 그린 취과양주귤만헌 등 중국의
고사를그린 5점 등 모두 7점이다. 누가 그린 것이지는 모르나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다.

관덕정 내부(호남제일정)15

돌하르방(민2호)16

돌하르방 표지판17

잠수해녀촌에서 간단하게 회를 먹은 후에18
KE1816편 항공기내(스튜어디스)(동영상)19

제주 국제공항20
2박3일의 멋진 여행을 마무리하고 KE816편을 타고 대구로...
(2011.07.28)
첫댓글 김종태 11.08.24. 09:37 내 오래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는 관덕정만 덩그러니 혼자 있었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이제 제주도에도 요즘 다시 세웠지만 옛날 관아 모습들을 볼 수 있다니 아주 다행이구나
여욱환 11.08.24. 10:22 관덕정만 있던 곳을 이렇게 잘 단장을 해놓으니, 정말 볼만했다네. 역시 국력이 높아지니 자꾸 옛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어 보기가 좋고, 또한 어디를 가나 발전된 모습을 실감하게 되니 기분이 참 좋았단다.
여행매니아 22:02 김종태 11.08.24. 09:37 내 오래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는 관덕정만 덩그러니 혼자 있었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이제 제주도에도 요즘 다시 세웠지만 옛날 관아 모습들을 볼 수 있다니 아주 다행이구나
여행매니아 22:02 여욱환 11.08.24. 10:22 관덕정만 있던 곳을 이렇게 잘 단장을 해놓으니, 정말 볼만했다네. 역시 국력이 높아지니 자꾸 옛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어 보기가 좋고, 또한 어디를 가나 발전된 모습을 실감하게 되니 기분이 참 좋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