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병원 은미희 적십자 병원(현 서남대 부속병원)은 구 전남 도청(현 문화의 전당)에서 광주공원 쪽으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종합병원치고는 규모가 작은 병원으로, 서민들을 위한 병원을 표방해온 곳이다. 바로 앞에는 영산강의 지류인 광주천이 흐르고 있고, 번화가가 가까이 있는 탓에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지만 정작 병원 안은 번잡하지는 않다.
3층의 낮은 건물. 소독약 냄새가 고여 있는 조용한 복도와 광주천을 거슬러 온 부드러운 햇볕, 그리고 상냥한 병원 사람들. 여느 다른 병원들이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 없는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낮은 건물이 주는 부드러움 때문인지, 차분하고, 한가한 적십자병원은 어딘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만 같은 로맨틱한 분위기마저 배어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적십자병원도 어김없이 5.18의 잔혹함은 비켜갈 수 없었다. 18일이 되자 두 시경에 최초의 주검이 리어카에 실려 들어왔다. 그 리어카 안의 시신은 이제 중학교 2학년 된 남자아이였다. 뉘 집의 귀한 아들일 텐데, 고추가 태어났다며 막 몸을 푼 산모는 힘든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을 쳐다보며 그 아이가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기를 소망했을 텐데, 이렇게 비명에 죽어갈 줄 그때는 생각이나 했을까. 아직 여물지 못한 풋것의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채 세상을 떠버린 어린 주검을 수습하며 직원들은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직원들 가운데는 그만한 또래의 자식을 둔 사람도 있었고, 그만한 동생을 둔 사람도 있었다.
그 주검을 시작으로 적십자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찢겨지고, 깨지고, 몸에 총알이 박힌 환자들이 들어오면서 적십자병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병원 마당에 점점이 떨어져 노닐던 햇볕도 극악한 세상을 감지했던지 그때부터 불안하게 흔들렸다. 처음 19일과 20일에는 진압봉에 의한 타박상과 골절상이 대부분이었지만 21일부터는 총상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총상환자는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 파편이나 탄환을 제거했지만 골절환자의 경우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일주일 후에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의료진들은 밀려드는 환자들을 두고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잠도 잘 수 없었다. 자는 시간을 아껴 한 명의 환자들을 더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피가 부족했다. 이들이 흘린 피만큼 피가 부족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홍희담(소설가) 씨는 적십자병원 마크가 새겨진 차량을 타고 시내를 돌며 헌혈을 권유하는 방송을 했고, 학생들은 버스를 몰고 가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에 다니는 여공들을 실어오기 시작했다. 버스 한 대당 3,40명씩, 두 대. 80여명의 여공들이 귀한 피를 헌혈하러 병원으로 와주면서 꺼져가던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헌혈을 하겠다고 병원을 찾는 바람에 병원에는 더 이상 피를 보관할 데가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의 피를 뽑으라며 팔을 걷어 부치고 줄을 서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거나 전대병원과 기독병원으로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피를 뽑아 갈 것을 요구하며 거칠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십자 병원은 부상이 심한 환자를 수술하기가 여의치 못했다. 의료장비나, 도구, 인력 등,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실려 온 중환자들은 당장에 필요한 응급조치를 한 뒤, 인근의 전남대 병원이나 기독병원으로 후송했고, 그나마 상태가 웬만한 사람들은 간단한 처치 뒤에 돌려보냈다. 그리고 적십자 병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환자들은 병실에 수용했다. 병원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의 인적사항을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비명과 신음에 병원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 환자들 개개인의 부상과 인적사항을 기록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선 급한 치료부터 해야 했다.
부상이 심한 환자들을 전대병원과 기독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동안에도 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곳곳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언제 어떻게 계엄군들이 환자가 타고 있는 차량을 덮칠지 몰랐다.
게다가 계엄군들은 환자로 입원해 있는 학생들을 잡으러 병원으로 들이닥치기까지 했다. 핏발이 서 있는 눈, 손에는 총이 들려있고, 금방이라도 총부리를 겨눌 것처럼 그들은 포악하게 굴었지만 적십자병원 의료진들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며 끝까지 학생들을 내주지 않았다. 학생들을 내주는 일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시보다도 더한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광기에 뒤집힌 세상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차에 하얀 페인트로 적십자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그려 넣고, 살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살육의 도시를 달렸다. 그랬다. 십자가를 그려 넣은 차에 일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을 싣고 전남대 병원으로, 기독병원으로, 또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십자가. 차에 그려진 십자가는 그들이 유일하게 목숨을 연장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호였고, 또 기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피 맛을 본 공수부대원들이 그 십자가에 대고 총을 쏘지 않는다는 장담을 하지 못했다. 김남주 시인은 광주의 참상을 이렇게 시에 묘파했다.
……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 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 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 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낮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김남주 詩, 학살2>
정말 시인의 시대로 거리에는 피가 용암처럼 흘렀고,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렸으며, 그들은 어딘가로 시체의 산을 옮겼다. 그러니 병원으로 실려 온 환자들이나 사망자들은 그나마 다행일 수밖에. 아직 찾지 못한 시신들은 어느 곳에 묻혀 오늘을 원망할는지.
하지만 그 같은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었다. 부상자를 실어 나르고, 굶주린 이리의 얼굴을 한 계엄군들에게 대항하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제 몸 아끼지 않았다. 계엄군의, 아니, 정권찬탈에 눈이 먼 군 수뇌부가 파놓은 함정이 무서워 쥐처럼 숨고, 맥없이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분연히 일어나 물길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게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신분이 다르다고 그 소명도 다르지 않았다. 학생들은 말할 것 없이 산업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근로자들, 회사원들, 어머니, 아버지도 다 똑같았다.
계엄군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총칼은 시민들에게 더 큰 분노만 지폈을 뿐, 그들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광주천변에서 우우하는 사람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적십자병원의 직원들은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거기에 계엄군 한 명이 대열에서 이탈해서는 중학생인 듯한 남학생을 쫓아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남중생의 누나는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사망했었고, 남중생은 누나를 죽인 계엄군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중생은 대열에 끼어있는 누나의 원수를 바로 알아보고 돌멩이를 던지며 대들었다. 그 계엄군이었다. 시민들은 곧바로 대열에서 이탈한 계엄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계엄군은 도망치다가 3미터 아래 광주천으로 떨어졌고, 돌멩이를 던지던 시민들은 계엄군이 사망한 줄 알고 겁이 나 도망쳤다. 적십자 병원 의료진들은 곧바로 광주천변에 방치돼 있는 계엄군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는 잠시 기절했을 뿐, 살아있었다. 즉시 병원으로 후송해온 의료진들은 계엄군에게 시민과 똑같이 치료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시킨 뒤 적십자기를 꽂은 차에 싣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통합병원에는 계엄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터라 환자를 태우고 통합병원으로 후송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차에 꽂힌 적십자기 때문에 통합병원 앞에 설치돼 있던 바리케이드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 동료를 찾는다며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핏발선 눈은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고, 그들은 금방이라도 직원들을 향해 총을 난사할 듯한 기세로 그들은 병원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환자들은 물론 영안실까지 뒤지며 병원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응급치료를 끝내고 국군통합병원으로 보냈다는 직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직원들이 숨겨놓은 군복을 보고서야 돌아갔다.
19일에는 전투경찰 20여명이 병원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적십자 병원은 이들을 병원 지하에 숨기고, 사복을 구해 모두 옷을 바꿔 입게 한 뒤 무사히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안실에 안치된 주검들이 문제였다. 당시 적십자 병원에는 23구의 주검이 안치돼 있었는데 냉동시설이 안 돼 있던 탓에 기온이 올라가면서 주검은 급격하게 부패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관도 부족한 상태였다. 얼음이나 드라이아이스도 없었다. 병원 곳곳이 피비린내는 물론 주검이 부패해 들어가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 한명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약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마지막 가는 길을 편하게 가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철저히 광주를 유린하던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쫓겨 화순으로 퇴각하자 병원은 들어오지 않은 자식과 형제자매를 찾는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부패해가기 시작한 주검들은 퉁퉁 부어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 측에서는 치안을 담당하던 시민군에게 얼음과 드라이아이스를 구해다 줄 것을 부탁했다. 주검들이 부패해가는 속도를 늦추고, 고약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병원 측의 배려였다. 시민군은 30분도 안 돼 시내 가게에서 얼음과 드라이아이스를 가져왔다.
그러는 와중에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사망자들을 도청 앞에 있는 상무관으로 이송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을 한데 모으고 장례절차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적십자 병원은 그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비록 개처럼 죽어갔지만 가는 자리만큼은 사람들의 위로 속에 보내고 싶었다. 관에 태극기를 덮어 주는 것. 태극기 한 장으로 이들의 죽음을 보상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는 길만큼은 예우를 해주고 싶었다.
23개의 태극기는 금방 모아졌다. 23구의 시체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을 한 뒤 한 구씩 한 구씩 리어카에 실어 상무관으로 이송할 때는 직원들 모두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정말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죽어야 했나. 왜 이들이 죽어야 했을까. 울음은 만가처럼 유장했다.
23구의 시체가운데 유난히 눈에 뜨는 시체가 한 구 있었다. 다른 주검들하고는 다른. 그는 군인이었다. 쑥색 군복은 유난히 슬퍼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그 주검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군인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시민․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들과 똑같은 예우를 해줄 수 없다는 쪽과 그래도 같은 대한의 아들이라는 쪽과의 심한 의견 차이였다.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 상명하복을 따라야 하는 군인의 신분으로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군복을 입은 주검 또한 얼음과 드라이아이스로 채워진 뒤 태극기로 덮어져 리어카에 실려 상무관으로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적십자병원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너무 바빠 차트조차 작성할 여유가 없었던 탓에 환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입원환자만도 250여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적십자병원 역시 후일의 박해가 두려워 차트를 작성하지 않은 환자가 많았다. 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간호사와 의사들은 모두 병원으로 달려 나와야 했고,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빨간 와이셔츠, 노란 티셔츠 등으로 환자를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
악몽 같았던 열흘간의 시간이 지나고, 핍박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부상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해있던 환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환자는 물론 보호자들 또한 계엄군들로부터 강제로 각서를 써야했다. 조사기간 중 자신이 체험한 사실과 조사받은 사항을 절대 외부로 알리지 않겠다는 내용이었고, 보호자들 또한 이 같은 내용의 각서를 써야만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으로 항거했지만 돌아온 건 정부의 적대적 조치였다. 그저 폭도였고, 북한 간첩의 사주를 받아 부린 난동이었으며, 폭동이었고, 이들의 사실 증언은 유언비어 날포였다. 이들은 철저히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했고, 입을 열어서도 안됐다. 이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다.
적십자 병원은 그 뒤, 5월이면 해마다 헌혈캠페인을 벌이며 5.18당시의 한 마음, 한 몸이 된 광주를 기렸다. |
출처: 노란장미의 환경이야기와 80518 원문보기 글쓴이: 黃薔(이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