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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꽃이 나풀거리니
낙엽도 더불어 진다
“독한 놈이 결국 하루아침에 나자빠지는 거여.”
꼬마 작가의 소개로, 자칭 단골(한 달에 한 번꼴?)이 된 영등포시장 입구 국숫집 주인 할머니의 말씀이다. 아시다시피 지난 여름 날씨는 너무 지독했었다. 6월부터 시작하여 8월 말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폭염과 습기가 도심을 달구었다. 호주의 어느 사막에 서식한다는 목도리도마뱀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그러다가 어느 날 비가 한바탕 쏟아지더니 신통방통하게도 금세 습기가 사라져 하늘이 뽀송뽀송, 날이 선선해졌다.
보양식도 아닌 멸치국수를 한 그릇 먹으려고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며 영등포시장을 찾을 일은 없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그제야 뜨끈한 국물과 할머니 안부가 궁금했다. “올 여름 정말 지독했죠?” “말도 말어. 하도 더워서 멸치국수는 아예 안했어. 비빔국수만 했어.” “하루아침에 가을이 됐어요.” “세상살이가 다 그려. 독한 놈이 결국 하루아침에 나자빠지는 거여.”
감동! 남해안의 숭어 떼마냥 펄펄 살아 뛰는 생활 철학이다. 날씨뿐이랴? 독하게 설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철학이란 게 세상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 아닌가? 현학적 용어나 늘어놓아 봐야 감동 못 준다. 오래 살다보면 골치 아픈 단어 안 쓰고도 은유로 다 해결된다.
가을이 깊어가니 지난 폭염 따위는 금세 잊게 된다. 호수공원에도 은빛 꽃이 만발했다. 호수 서쪽 끝부분, 동쪽의 인공호수 쪽이 아닌 예부터 있었던 늪지대이다. 이젠 꽃이 아니라 마른 열매 상태이지만 우리는 꽃이라 부른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9월경에 피는 보라색 꽃이 열매를 품고 말라 있는 게 지금의 은빛 억새꽃이다.
석양 무렵 역광으로 바라보면 더욱 장관이다. 포천 명성산이나 창녕 화왕산 억새군락에는 비할 바는 못 되나, 자동차 품 발품 돈 품 시간 품 들이지 않고 소박하게 즐기기엔 무난하다. ‘으악새 슬피 울어 가을인가요’라는 구절의 노래가 있다. 억새가 만발한 가을을 멋지게 표현한 노랫말이다. 여기서 으악새는 새가 아니다. 으악새는 억새의 경기도 방언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종에 따라 나뭇잎도 서둘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억새꽃은 고우나 낙엽은 사람 마음을 심란케 한다. 삶이 덧없다는 감정이 이입 된 탓이다. 무성했던 잎이 떨어져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그러하고, 쪼글쪼글 볼품없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몰골이 그러하다.
뭐, 흔히들 인생을 그렇게 비유하지 않는가? 봄날의 연둣빛 어린 새싹이 유년기라면 여름철 무성한 녹음은 청년기로 말이다. 하늘이 맑고 높아지면 잎들은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어 노년기의 무르익은 삶을 나타내지만,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낙엽은 삶의 마감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불규칙적인 변화의 의미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련을 맺는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인因과 연緣이 서로 결합하여 생겨난 모든 현상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게 마련이다. 무상이란 단순하게 비관적이거나 덧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상하기에 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내가 지난 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裸木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도록 절실하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경은 처음 화가 옥희도의 작품 <나무와 여인>을 보고 그 나무를 삶을 다한 고사목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화가의 유작전에서 이경은 그 나무가 ‘봄에의 믿음을 간직한 나목’으로 보게 된다. 성숙해지니 비로소 잎이 떨어진 나목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게 된 거다.
‘락落’은 ‘마침’ ‘마감’만을 뜻하지 않는다. 낙엽落葉, 일락서산日落西山, 파락破落 등등의 단어에서 보듯 ‘떨어지다’, ‘죽다’, ‘버리다’ 같은 쇠락의 이미지만 떠올리기 쉽지만, 자전을 찾아보면 ‘처음’이라는 뜻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건물을 다 지은 다음 치르는 ‘낙성식落成式’이 좋은 예이다. 집짓기를 끝냈으니[落], 새로 시작한다는 뜻 아닌가?
그래봐야 낙엽에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애수라는 감정이입의 유혹에 정말 쉽게 빠지는 존재이니까. 비가 오면 비 온다고 우울해하고, 눈 오면 눈 온다고 쓸쓸해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인생길에는 본디 아픈 과정이 많기 때문이다.
<Autumn Leaves>. 1945년에 초연된 롤랑 프티의 발레 작품 <랑데부>를 위해 만들었는데, 1946년 이브 몽탕이 영화 <밤의 문>에 출연하여 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다. 이후 냇킹 콜, 에디트 피아프, 앤디 윌리엄스, 프랭크 시나트라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앞 다투어 취입했다. 프랑스 가사는 이렇다.
오 기억해주오/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날들을/ 그 시절 삶은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뜨겁게 타올랐다네/ 죽은 잎들은 하염없이 쌓이고/ 너도 알리라, 내가 잊지 못하는 걸/ (중략) 나를 사랑했던 너, 너를 사랑했던 나/ 하지만 인생은 사랑했던 두 사람을 갈라놓는 법/ 너무나 부드럽게, 아무 소리조차 내지 않고서/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를 지우지/ 하나였던 연인들의 발자국들을….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든 가수는 전세계적으로 무려 2천 명이 넘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가수들이 취입했지만, 10여 년 전쯤 신은성이란 가수가 랩을 피처링하고 현대적 리듬을 입혀 취입한 것이 참 괜찮다.
하지만 나는 당대의 최고 재즈 연주가 캐논볼 애들리Cannonball Adderley(앨토색소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트럼핏), 빌 에번스Bill Evans(피아노), 행크 존스Hank Jones(리듬 피아노), 샘 존스Sam Jones(베이스), 아트 블래키Art Blakey(드럼)가 규합하여 마치 ‘잼’하듯 취입한 <Autumn Leaves>를 꼽는다. 간결하고 절제된 진행이 제행무상과 쿨재즈의 표본이다. 마치 최영미의 시를 읽는 느낌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곡은 샘과 블래키가 들릴 듯 말 듯 스윙리듬을 깔아주면, 행크 존스가 피아노를 짧게 연주하면서 시작된다. 아차하는 순간 갑자기 블래키의 비트가 살짝 강해지면서 브라스(색소폰, 트럼핏)가 짧고 강하게 본격적인 연주를 예고하고, 이어 마일즈의 간결하고 절제된 트럼핏이 멜로디 위주로 연주된다. 뒤를 이어 캐논볼의 화려한 색소폰 즉흥연주가 한동안 이어지는가 하더니 곧 마일즈가 받아 즉흥 연주를 한다. 그 동안 샘과 블래키, 행크는 숨은 듯 약하게 리듬 연주를 계속한다.
마일즈의 연주가 끝나면 빌의 피아노 즉흥연주가 이어지고 마일즈가 멜로디를 연주한다. 다시 빌의 피아노가 느리게 진행되더니 마일즈가 이어받아 피날레를 이룬다. 아! 아트 블래키의 독주 부분이 있었더라면 하는 점만 아쉽다. 그가 어찌 그 긴 시간을 참아냈을까? 모르긴 해도 마일즈 데이비스의 카리스마에 눌렸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 곡에서 스틱 대신 브러시를 사용, 드럼 소리를 최소화 함으로써 철저하게 자신이 맡은 리듬 파트에만 충실했다.
신은성 AUTUMN LEAVES
(이하는 관심 있는 분들만 읽으시길, 내용이 따분하니까)
역대 재즈 명반 100선에도 언제나 이름을 올리는 캐논볼 애들리의 <Somethin' Else>
첫댓글 대박! 대박! 이곳 LA는 가을이 느끼지 않았는데, 표의글을 읽고 음악을 들으니 가을을 느끼네.오늘 주일 아침에 "기러기 울어데는 하늘 구만리.... " 내가 좋아하던 가을노래도 흥얼거려보았네.
조만간에 권표로부터 걸작이 나올것 같구만.. 성제 카페에 첫 주인공이 누구일지 인제 알거 같다.
큰 그림을 그려보기 바란다.
음악은 원체 문외한이라 잘 이해를 하지 못해도
표의 글을 읽으면 감미롭고 매끄러움이 어릴 때
술독에 위에 앉은 맑은 술을 어른 몰래 한 종지
입에 부으면 혀를 한 바퀴 돌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맛 같다고나 할까!
표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자주 글을 올려 즐겁게 해 주기 바란다.
지금 손자 손여 3명이 고3인데 하나가 음대 트럼펫과를 지망하고
수시 모집 두 곳을 시험을 쳤는데 3명 모짐에 70명이 왔다고 하니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지만
좌우간 그 길로 나갈 모양이니 표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아재요. 과찬에 몸둘바 모르겠습니다. 트럼핏이 관악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악기라고들 하는데 대단한 손주 두셨습니다. 감히 조언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관심있게 지켜보겠습니다.
항상 관심을 가져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종손아재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분발하여 참으로 아재께서 기대하시는 경지의 근처에나마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