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轉移) Transference>
소아기의 정신적 체계가 성인기까지 지속된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에 반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이’라는 핵심적 정신역동적 개념이 가장 강한 흥미를 돋우는 예일 것이다. 환자는 전이를 통하여 치료자를 과거의 중요한 사람으로 경험한다. 치료자는 그 과거의 인물의 특성을 불러일으키고 환자는 치료자를 통하여 그 과거인물에 관련된 느낌들을 그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경험한다. 환자는 과거를 기억하는 대신에 과거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재작동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관계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치료 상황에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전이라는 개념은 정신분석이나 정신치료와 관계되지만 치료상황에서의 전이관계는 더 일반적 현상 중의 하나의 예일 뿐이다. Brenner(1982)가 지적했듯이, “모든 대상관계는 소아기의 최초의 분명한 애착(attachments)의 새로운 반복이다.....전이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타인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하였던 모든 상황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모든 정신분석적 상황에서 전이관계가 발달하게 된다.”
치료자의 실제적인 특성들이 항상 전이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기여한다는 주장은 최근 전이를 이해하는 시각을 더 넓혀 주었다(Hoffman 1998 ; Renic 1993). 다시 말해서, 한 치료자가 말없이 조용하게 앉아서 환자로부터 초연한 채로 있다면 이 치료자를 차갑고 냉담하며 무관심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 관련되어 전이가 발생할 것이다. 전이는 부분적으로는 환자의 소아기의 초기 애착으로부터 발생하는 한편, 치료자의 실제적인 행동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임상적 상황에서의 모든 관계는 실제적인 관계와 전이적 현상의 혼합물인 것이다.
어떤 정신분석가들은 전이에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 하나는 반복의 차원으로, 환자는 분석가가 자신의 부모들이 하였던 것과 유사한 행동을 할 것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기대상의 차원으로, 환자는 소아기에 이루지 못하였던 치유적이고 교정적인 경험을 갈망한다는 것이다(Stolorow 1995). 전이의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은 환자의 경험의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 사이에서 반복된다.
역동정신의학자는 전이현상의 광범위함을 인식해야 하며 환자가 호소하는 관계의 문제가 결국 환자와 치료자의 관계에서 드러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치료자-환자관계에 있어서 역동정신의학에서 독특한 점은 전이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치료적 재료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동정신의학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으로 전이에 반응하지 않는다. 환자로부터 증오에 찬 욕설의 대상이 될 때 다른 사람이 했을 것처럼 화를 내거나 환자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과거의 어떤 관계가 현재에 반복되는 것인가를 밝히려고 한다. 이러한 면에서 역동정신의학자는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지 않느냐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있다.
<역전이(逆轉移) Countertransference>
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은 역동정신의학자와 환자 사이에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병적 상태에서의 심리적 기전은 정상 발달기능에 관여하는 원칙들의 연장일 뿐이다. 치료자나 환자 모두 인간이다. 따라서 환자가 전이를 보이는 것과 똑같이 치료자도 역전이를 보인다. 모든 현재의 관계가 이전의 관계를 새롭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므로 정신과치료자의 역전이나 환자의 전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어떤 사람으로 경험하는 동일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치료적 상황에서 그 느낌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Brenner 1982). 전이가 치료적 과정의 한 부분으로 토의되고 분석되는 반면, 역전이는 치료자 자신의 지속적인 내적 성찰에 의하여 감시되어야 한다.
역전이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Hamilton 1988 ; Kernberg 1965). Freud(1912)의 협의적 정의로는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전이 혹은 환자의 전이에 대한 분석가의 반응을 의미하였다. 이 개념에는 해결되지 않은 분석가의 갈등이 무의식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Winnicott(1949)는 정신병환자와 심한 인격장애자들을 치료하면서 다른 형태의 역전이가 있음을 주시하였다. 이것은 치료자의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적 갈등으로부터의 반응이 아니라 환자의 난폭한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느낌을 객관적 혐오(客觀的 嫌惡, objective hate)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객관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환자의 이러한 도발적인 행동에 대하여 비슷하게 반응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근간에는 환자에 대한 치료자의 의식적인 혹은 적절한 모든 감정반응을 역전이로 보는 Kernberg(1965)의 넓은 의미의 정의가 보다 더 많은 동의를 얻고 있다. 특히 역동정신의학자들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그 빈도가 증가되고 있는 심한 인격장애 환자들과의 작업을 특징지우는 데는 이러한 정의가 더 도움이 된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모든 역전이는 무조건 치료자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기인하므로 치료자 자신이 더 많은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보는 경향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었으며, 치료자를 환자의 내적 세계에 대한 좋은 도구로 보는, 즉 역전이를 진단적 및 치료적 수단으로 보는 쪽으로 개념을 대치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협의의 역전이 개념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광의의 개념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며 그때그때 그 이유를 분명이 밝힐 것이다.
역전이의 개념이 변천되어 옴에 따라 현재는 협의의 특성과 전체적인 혹은 광의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치료자의 과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환자의 행동에 의해서 생겨난 느낌으로부터, 통합적으로 치료자에게 발생한 반응들을 역전이라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이론적인 시각이다(Gabbard 1995), 어떤 증례들에서는 환자 쪽 보다는 치료자 쪽의 기여가 크게 강조되고, 다른 증례들에서는 이 반대인 것이 사실이다. 역전이는 환자의 내적 세계에 관한 가치있는 정보의 근원임과 동시에 치료에 대한 장애물이다.
<전이와 역전이>
전이가 모든 의미있는 관계에서 능동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전이요소들이 이미 환자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이는 첫 만남 이전에 이미 생길 수도 있다(Thomä와 Kächele 1987). 첫 번째 면담약속을 한 후, 환자가 될 사람은 곧 몇 가지 사실적 정보들이나 정신과의사에 대한 이전의 경험들, 정신과의사에 대한 대중매체들에서의 묘사, 과거에 겪었던 타과 의사와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경험들, 혹은 권위상(權威像)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등에 기초한 여러 가지 특성들을 정신과의사에게 부여하기 시작한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정신과의사를 처음 만난 한 젊은 남자는 “아니, 왜 선생님은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인가요?”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의사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을 청하자 그 젊은 남자는 의사의 이름이 더 출중한, 나이든 남성일 것이라는 연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의사가 생각보다 젊어서 충격을 받았노라고 설명하였다.
전이는 환자가 의사와 협조하는데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평가 상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면 환자가 의사를 엄격하고 동의를 잘 해주지 않는 부모로 볼 때, 환자는 자신의 병력에서 당황스러운 측면들에 대하여는 잘 진행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면담초기에 전이왜곡을 맞닥뜨리게 된 정신과의사는 효과적인 병력조사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한 정신과의사와의 자문면담에서 첫 몇 분간 환자는 이야기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그 무엇인가를 극복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었다. 정신과의사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의 어떤 부분이 환자로 하여금 이야기하기 어렵게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환자는 정신과의사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으니까 정신과의사 앞에서는 말과 행동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는데, 어떻게 하죠?”라고 의사는 재치있게 답변하였다. 함께 웃고 나서 환자는 나머지 면담시간 동안 훨씬 더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정의로 보면 전이는 하나의 반복이다. 과거의 한 인물과 연관된 느낌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정신과의사에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한 임상적 면담에서 전이의 양식들이 환자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의미있는 관계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여간 면담자를 보는 환자의 시각과 면담자를 향한 환자의 느낌들은 일종의 반복인 셈이다. 더욱이 이러한 반복들은 환자의 현재의 의미있는 관계들도 상당부분 나타내어 주고 있다. 전이가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과거로부터의 동일한 양식들이 환자의 모든 관계에서 되풀이하여 반복된다. 예를 들어 한 여성 환자가 정신과의사를 찾아와서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호소하였다.
의사의 질문들에 대한 반응으로 환자는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아버지가 그녀를 무시하였던 어렸을 때의 인식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 의사가 면담을 마칠 즈음 시계를 보자 환자는 의사도 다른 모든 남자들처럼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정신과의사는 환자가 의사에게 보이는 반응들 모두를 전이라고 규정짓지 않기 위해서 환자-의사 관계가 항상 전이와 현실적 관계의 혼합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시계를 봄으로써 또 다른 남자인 의사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다는 환자의 전이 공포에 실제적 요체를 제공한 셈이다. 정신역동적 평가를 위해서는 진단과정 내내 지속적인 자기감시를 하여야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은 이 정신과의사는 실제로 권태로운 기분을 느껴 이를 환자에게 알게끔 하였는지, 아니면 환자가 그 상황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만일 권태가 문제였다면 그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흥미를 잃게 된 것인지 아니면 환자의 어떤 면이 태만을 일으켰는지, 혹은 그 둘 모두인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들은 물론 역전이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동적 면담의 기본개념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감히 두 사람 대신 두 환자라고 할 수도 있을까? 그들 각자가 자신의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들어오며 내적인 자기표상과 대상표상의 어떤 면모들을 현재의 타인에게 투사한다(Langs 1976). 역동정신과의는 마치 환자가 치료자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어떤 사람인 것처럼 그 환자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매우 흔히 발견한다. 그 정신과의사는 환자가 과거의 그 어떤 사람과 신체적으로 매우 유사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결국 그 정신과의사는 과거의 인물의 성품들이 그 환자에게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역동정신과의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은 환자와의 면담 중에 일어나는 그들 스스로의 역전이적인 행동이나 감정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역전이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치료자 자신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인가? 얼마나 많이 치료자를 향한 환자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제 2장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역전이란 본래 양쪽 구성원 모두로부터 기인하는, 연합에 의한 산물이다. 환자에 의해서 유발된 것이니 아니면 치료자 자신의 무의식적 갈등들에 의해서 현재의 상황으로 떠오른 역전이인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이 둘을 구별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의사가 자신의 내적 세계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역동정신과의들은 정신분석이든 정신치료이든 간에 교육분석의 경험을 가지려 하며, 이것이 역전이를 이해하고 감시하는데 매우 큰 가치를 갖는다.
자기 자신의 전형적인 반응들에 친숙한 것이 자기 스스로가 기여한 바를 추려내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한 소아정신과의사는 자기 스스로가 ‘지금 아동학대의 희생자를 다루고 있구나’하고 알 수 있음을 관찰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런 경우 불합리하게도 이 아이를 학대하고 싶은 충동과 함께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학대하는 내적 대상이 정신과의사에게 투사되고, 따라서 의사는 소아의 밉살스럽고도 도발적인 행동 때문에 그 내적 대상과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실제로 정신과의사들은 자신들이 평소에 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환자에 대하여 느끼거나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투사적 동일시의 과정에 있음을 진단할 수 있다. 이러한 느낌들을 알아내는 것이 정신과의사로 하여금 환자의 내적 대상세계의 성격을 이해하고 환자의 대인관계에서 전형적인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