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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달리의 새벽 [1999년 대한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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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햐! [1999년 중앙일보]
어디보자, 이게 피라민가 빙언가 속이 보여야 빙어이제. 어디 보자. 자리를 벌리고 비집고 들어와 냅다 겨울 햇빛 한 조각을 집어 들던 사람. 빵모자를 눌러쓰고 초집장에 한 번 찍어 소주잔을 걸치고 입술을 쓰윽 쓰다듬던 사람 어라! 햐!
그 겨울이 그립네. 겨울의 깊이를 웅크리고 웅크려서 얼음의 두께로 한 겨울을 보여주던 저수지. 손도끼로 곡괭이 내리쳐야 닿던 완강한 겨울의 복판.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얼음을 깨어내 내부로 닿던 적막. 속이 투명한 빙어가 어라! 햐! 얼음빛을 닮아 빛나고 있네.
얼음 밖이 딴 세상이라, 얼음 밑이 딴 세상이라 조심조심 겁 많은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않다가 안심이다 정말 안심이다 마음놓을 때 쩡쩡 갈라지며 울음 울던 물의 소리 저 검푸른 빛 구들장만하게 떼 오고 싶었네, 몸으로 뗄 수가 없어 엎드려 어쩔 줄 모르던, 어라! 햐! 그래서 더욱 첩첩 산중이던 상주 어디쯤에 아직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그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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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이시영 , 김명인
마지막까지 고려의 대상이 된 것은 전상범과 이희철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 모두 투명한 감수성의결을 세련되고 섬세한 언어의 피륙으로 엮어내는 형상력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잘 짜인 시편들을 빚어낸다. 굳이 그 차이를 말하자면 전자가 표현의 묘미에 기대고 시적 상상력을 펼쳐놓고 승부한다면, 후자는 삶의 음영 쪽으로 그 표현과 상상력을 좁혀간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선자들은 이희철의 시편 중'어라! 햐!'에 쉽게 의견을 모으면서도 몇가지 아쉬움을 함께 나눴다. 그것은 이 응모자가 시를 받아안으려고 애쓰기보다 제작하려고 너무 의욕한다는 것, 습작의 폭이 자나치게 협소하다는 점 등이다. 시의 다채로움과 깊이는 그 시인이 살아내는 삶의 총량과 등가일 것이리라. 작품이 옥이기에 아쉬움이란 티도 남는 것이다. 큰 시인으로 날 것임을 확신하며 당선작을 민다.
▶ 이희철
1962년 대구 출생, 88년 영남대학교 국문과 졸, 현 부산정보산업고 교사
어머니는 수국화였다 [1999년 국제신문]
그때 나는 세모시 저고리에서 달빛보다 더 선연한
바늘의 등뼈가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열 손가락
관절이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묵화처럼 가지런한
이마가 환한 빛을 내던 토방 쪽마루를 보았다
어머니 반짇고리 곁에는 내가 이름 지어준 별들이
내려와 집을 짓곤 했다 못에 찔려 피 흘리던 내
꿈들 우리집 추녀 끝에 밤마다 찾아드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한 채 섬이 된 우리집 마당으로 물방울처럼
별 하나, 별 둘 똑똑 떨어지는 기척이 있었다 옛날
이야기가 섬이 되어 떠다니고
푸른 슬레트 지붕이 녹스는 소리마저 정겨운
여름밤이었다 흑싸리 화투패 같은 빈 껍질의 어머니
가슴에서도 녹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쩜 그것은
내 가슴팍을 적시는 물살이었다 추깃물 같은 반딧불이
우리집 낮은 담장 너머에서 몇 번 어둠을 흔들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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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풀과 함께 [1999년 경향신문]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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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황동규, 이시영
이승희의 [씨앗론]은 응모작 전편에서 가장 뛰어나고 안정된 시적 역량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흠도 실수가 너무 없다는 점이고, 기존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빼닮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자들은 이번에 좀 모험심을 발휘하여 같은 작자의 소품인 [풀과 함께]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주저없이 합의 하였다.
[풀]은 60년대 김수영 이래로 너무나 많은 시인들이 불러온 흔한 시적 대상이며 이제 와 새로움을 추가하기엔 낡아버린 이미지인데도 이승희는 그런 터부에 과감히 도전하여 풀을 인간의 오랜 잠재력의 원천인 성애(性愛)의 차원에까지 확대해 놓았다.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는 표현은 얼핏보면 평범한 질술로도 보일지 모르나 거기엔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한한 상기(上氣)를 발견하는 시적 눈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요설의 언사(言辭)들을 과감히 생략하여 큰 여백을 남길 줄 아는 단순성의 시학이 빛난다.
▶ 이승희
1965년 경북 상주출생. 1988년 서울예전 문창과 졸
휠체어를 타고 [1999년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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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사진 [1999년 동아일보]
그가 문을 열었을 때
새들은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쪽으로 날아가고 있었지
붉게 꽃핀 담장 너머
멀리 공장의 굴뚝 다섯, 하늘을 이고 있었네
그는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을 들여다 보네
짧게 잘린 마디는 마치 촛농으로 덮어씌운 듯 했지
상처만이 고통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남아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세어보네
사진 속 친구들의 얼굴도 들여다 보네
붉은 철근 더미 위에 앉아
한순간 웃던 얼굴들이 사진 속에선 영원히 웃고 있네
또한 영원히 울고도 있네
눈을 들었을 때
키 큰 순서부터 공장의 굴뚝들은
어둠에 허리를 짤리우고 있었지
이제 그는 창문을 닫네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빈 새장 속으로 걸어들어가 보네
누군가 와서
그를 잊지 않았다고
모이를 주고 물을 주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석양의 집으로 날아갈 수 있을 텐데
부리를 다친 새처럼 그는
가슴에 얼굴을 묻네
문은 밖으로 잠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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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김혜순 , 이남호
최경민씨의 작품은 모두 인상적이고 안정된 수준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명징한 인상을 포착할 줄 아는 언어감각, 개성적이고 신뢰감이 가는 사유능력, 자신만의 시적공간을 형성시킬 줄 아는 힘을 지녔다. 특히 사물과 세상에 대한 명료하고도 정확한 사유가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증한다. [올림푸스 세탁소]와 [흑백사진] 가운데서 한 작품을 고르기 어려웠다.
[올림푸스 세탁소]에서 시인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었으나 전체적인 안정감과 주제의 선명함, 완성도 면에서 [흑백 사진]을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최경민씨의 당선을 결정하면서 주저됨이 없다. 그만큼 최씨의 능력은 돋보인다. 즐거운 심사였다.
▶ 당선소감 : 최경민
그날 밤 책갈피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을 때,
나는 어느새 항구의 저녁거리를 거닐고 있지 않는가.
드문드문 비가 선창위로 내리고 나는 갈매기보다 낮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미덕이다. 미덕을 배우기까지
많은 것들을 보내야 한다. 나는 청춘의 반을 덧없이 보내고
바다의 눈썹같은 방파제위에 서 있다.
어서오라! 나는 기다릴만큼 기다리다
안개와 바람에 묻혀 이 항구를 떠도는 무서운 이름이 될 것이다.
누구도 지워보지 못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처럼 뒤에서 내 문학을 든든히 잡아주던 고마운 손들이 있다. 어느 순간 그 손들 없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그만 손을 놓아달라고 말하려 하자 그들은 이미 저 뒤편에서부터 손을 놓은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겨울나무을 후려치는 채찍 " 이재무 선생님, 당선소식을 내 일처럼 기뻐해준 맏형같은 시인 이대의 선배, 외롭고 치열한 시정신을 일깨워주는 시인 함기석 형, 특히 처음으로 시를 가르쳐 주었던 `내가 그다지도 사랑하는' 뿐뿐이 美와 때론 싸우고 질투하며 함께 시를 공부했던 벗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따뜻하게 배려해주신 강소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 쓰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시는 부모님,
나의 모든 것은 그분들의 것이다.
시는 혼자 쓰는 일이지만 그 시가 한 사람에게 찾아오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의 힘이 필요하다. 국립서울산업대 문창과 교수님들과 주병율, 이위발 선배, `획을 긋는 문창과' 학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심사를 해주시고 뽑아주신 이남호 김혜순 선생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저에게 주어진 제 삶의 몫을 다 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아버지!
젊은날 시를 쓰시고 소월을 사랑하셨던 당신의 피가 제 시의 영혼에 흐릅니다.
▶ 최경민
1970년 전남 영암 출생
1997년 청구문화제 시부문 최우수상
1998년 의혈창작문학상 시부문 당선
현재 국립서울산업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가족사진 [1998년 전북일보]
1.
주연이 없었다 우리집에는
하릴없이 바쁜 아버지 운명 가끔 빨래처럼 펄럭였다
빈 수숫대 몸 비비며 자진모리로 쓰러지는 바람에
삼류극장 영화처럼 썰렁한 안방에 모여 쿨러쿨럭
희망의 아랫목에 발목을 묻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추억의 푸른곰팡이로 주린 배를 채우고
새벽 휘파람 소리에 골목길 빠져나가던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오래도록 기다렸다
2.
만화경 같은 세상 문득 멀미를 하고
어지러워, 회전목마는 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없는 것이 많아서 더욱 부끄러운 스무 살
남루를 걸치고 외출한 내 청춘은 귀가하지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않을 한 계절의 끝에서
식구들은 저마다 단역배우가 되어 서성거렸고
음정 박자 놓친 늙은 개구리 울음 같은
추억이 우울한 목청으로 우우우 노래 불렀다
아아, 잊고 사는 아름다움이 물결보다 고울까
오래 배고팠던 하루의 피곤함이
덜컹거리는 세월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아슬아슬 지나갔다
바람이 결석한 날은 추위가 때로 악수를 청하고
동상 걸린 손으로 어린 동생이 코스모스 같은 이웃들이
가슴에 지느러미를 달고 항해를 계속하였다
3.
제 몸짓에 어지러운 한 시절
소화불량에 걸린 꿈을 하역하며
빗물에도 얼룩져 흐르던 슬픈 나이를 다독였다
습관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별을 우러르고
추락하지 않기 위해 끼룩끼룩 끝없이 날갯짓하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물새떼 그림자
썰물 사이로 찢길 대로 찢긴 폐선이 보이고
희망의 소금밭을 찾아 집을 떠나 온
돛도 닻도 없는 작은 배들이 불안하였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포구에 정박하고 싶습니다
▶ 199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공터에서 찾다 [1998년 매일신문]
뭐 이렇게 질긴 고기가 다 있을까
좀체 속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뭉스런 애인같다
어딘가에 분명 뼈를 감추고 있을거야
고기의 진미 희망의 정수 아아,
뼈다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이란 대로에서
진종일 어미, 누이와 붙어있는 일보다
은밀하고도 겁게 느껴진다
피티병 한 개와 물고 뜯는 시간, 나는
이것을 단순해지기 위한 노력이라 부른다
썩은 고깃덩이로 던져진
이 도시에서 단단한 무기질의 희망
얻기가 그리 쉬운가
누르기만 하면 입발린 언약들
당장이라도 쏟아내는 자판기들아
웃을테면 웃어라
욕창이 번진 몸에 비명까지 지르는 이 물체는
이제 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은 더욱 식욕을 부풀리고 나는
이것을 기꺼이 먹기로 작정한다
완강하던 피티병에 드디어 금이 가고
텅빈 속살 들여다 본 순간, 나는
속았음을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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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오생근(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이성복(시인·계명대교수)
새로운 예술가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해 여지껏 눈치채지 못한 삶의 면목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번 신춘문예 시 응모작들을 대하면서 심사자들이 기대한 것은 바로 그 새로운 안목이었으며 우리의 기대는 과연 어긋나지 않았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시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시는 '메주'(이재춘)와 '공터에서 찾다'(문채인)였다. 조용한 목소리로 일상적 삶의 변두리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불러 내고 그것들로부터 의미와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메주'의 시인은 타고난 눈썰미와 오랜 연마를 짐작케 한다. 다만 그가 보여주는 안목이 크게 새롭지는 않다는 아쉬 움을 남긴다.
무엇보다 이번 심사의 큰 즐거움은 '공터에서 찾다'의 뛰어난 시인을 찾아냈다는데 있다. 또 한편의 수작 '지붕 바라보기'에서와 같이 이 시에서 시인은 범상치 않은 시선과 능숙한 어법으로 황폐한 세기말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현대 도시에서의 공 허한 삶을 피티병을 물어뜯는 개의 절망적이고 끈질긴 몸부림에 빗대어 표현하는 데, 그 표현방식이 또한 어찌나 절망적이고 끈질긴지 독자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의 행과 행사이에 스며있는 그 팽팽한 긴장은 단어 하나하나에 중층 적 의미를 부여하며, 자칫 도를 지나친 절망이 상투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제 한 뛰어난 예술가가 끝끝내 애초의 긴장을 유지하기를 기대하자. 한번 길들여 진 오리가 다시 들로 돌아가기란 꽤 어렵기 때문이다.
▶ 당선소감 : 문채인
산사를 내려 와 화북까지 걷는다. 무릎을 넘는 눈길 위로 한 뜸씩 경계선이 놓여진 다. 산사의 생활은 일주일만에 포기되었다. 애초부터 이 행로가 순수하지 않았던 탓 도 있었으리라. 자주 꿈결에 목이 메였고 자리끼에는 노오란 문장 한줄 담겨 핼쓱 해져 갔다. 어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참선이라는 것을 했다. 햇살 한 톨에도 몸을 떨며 탈색해 가는 문종이를 보며, 그동안 유리의 반사신경으로 세상이 주는 햇살을 되쏘아보냈던거나 아니었는지 반성한다. 마을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보면 상 처로 뒤척이는 길, 내가 남긴 경계선은 음지 양지로 갈라서서 오래 시위할 것이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면 내 검은 발자국들 소리 소문 없이 녹아 길과 길을 잇고, 종 래는 계절을 멈추지 않는 물관을 오래 장악할 것이다. 이대로 시의 혈관까지 흐를 수 있다면…
만년 응석받이인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에게 제일 먼저 고마움을 전합니다. 태어나 서 지금까지 눈물과 한숨으로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 뿔뿔이 흩어져 있는 나의 피 붙이들, 언제부턴가 내 졸작의 팬이 되어주신 사장님과 목요시 동인들 그리고 덜렁 대는 나의 글을 탓하시던 박윤배 시인께도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미천한 글을 뽑 아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앞으로 좋은 글로써 보답드릴 것을 약속드리 며 눈치보지 않는, 거침없는 시의 길로 맨발로 걸어가겠습니다.
▶ 문채인
1963년 문경출생(본명 문성해),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대구시인협회 부설 시인대학 수료
95년 대구일보문예 동화당선
나무에는 꽃이 피고 [1998년 경향신문] |
나비 [1998년 세계일보] |
대숲이 있는 작은마을 [1998년 문화일보] |
담 [1998년 국제신문]
너는 언제나 등을 돌리고
쓸쓸하게 서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는 한낮
잠시 그늘에 가리워 쉴 때에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만치서 누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듯하여
몸체가 기울어지고
행여 바람결에도 멈칫 돌아보곤 했다.
언제부터였던가 하염없이
토라앉은 등처럼 외로워 보였다.
나뭇잎 하나 둘 너의 모퉁이를
스쳐 지나갈 때면
말없이 지켜보던 시선
수없이 너의 곁을 거쳐가는
수척한 나그네의 한숨을 지켜보면서
너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하늘을 보았다.
총총히 옷자락 날리며 기웃거리다가
오늘 하루 꽃 상여에 실려가는
외로운 인간의 뒷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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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망해사(望海寺) [1998년 서울신문]
대나무 잎새 몸 부비는 소리 등에 업고
바다를 바라보는 망해사,
파도가 읊어대는 경전 소리에
처마끝 종소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절간을 지나는 동자스님의
발걸음이 바람에 떠밀리는 마른 잎 같다
파도소리, 묵묵한 바위의 등을 내리칠 때마다
허공을 떠다니는 낮은 소리들
단청 없는 대웅전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걸음도 대웅전 앞으로 밀려간다
낮은 숨소리 웅웅대는 절터를 비추며
조용히 내려앉는 서녘해,
노을빛 단청을 그린다
내 얼굴엔 단청이 그려졌을까
바다로 발을 옮겨 얼굴을 비추면
이내 얼굴을 삼키는 허연 물거품
귓가에 파도의 일렁거림만 맴돌고
바다의 들숨에 석양마저 빨려 들어간다
법구경 읊는 소리도 바다 밑으로 묻혀진 걸까
쉴새없이 어둠을 내뿜는 잔주름 깊은 바다
잔불 소리도 없이 내 속을 비워내고
바닷바람 소리없이 범종을 흔드는 망해사,
아무 말없이 바다 위로 단청을 털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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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김종길 , 정현종
이병욱의 상상력은 드넓은 공간으로 열려 있으면서, 그 공간을 조용한 인간적 숨결로 채우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점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당선작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사한 두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았다.
'망해사'는 바다와 절을 불꽃 튀는 긴장속에 놓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대웅전 근처에서만 맴돌아 좀 맥빠진 평범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보다는 '겨울 공터', '노을 속에서', '밤' 같은 작품이 더 좋아 보이는데 가령 '밤'에서 "지평선을 지우는 밤, 멀리 등불 하나로/ 서 있는 집은 하늘에 걸려 있었다/ 길 끝은 집 주위를 서성이다 흩어졌고/ 내 마음속 알 수 없는 문장들은/ 별 끝에 매달렸다// 달이 모든 길을 끌어다 둥글게 엮고 있었다" 같은 대목은 우주적 쓸쓸함에 물들어 있지 않은가.
▶ 이병욱
1968년 수원 출생, 수원대 서양화과,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북극성 [1998년 세계일보] |
세탁 [1998년 영남일보]
세탁기 안에서는 세탁기보다 넓은 세상이 돌아간다
자전거를 타던 흙먼지와,
저녁밥을 짓던 양념 자국과,
넥타이 속에 갇힌 양심의 속때들이
세탁기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 어지럽다
속속들이 박힌 시간의 찌꺼기가 덜어져나가고
참을 수 없었던 오욕의 시간이 떨어지고,
잡다한 일상의 흔적이 떨어진다
떨어졌다 다시 엉겨붙는 악연의 오물들이
헹굼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떨어져나가고
주체할 수 없었던 몇 방울의 눈물까지도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파고든 미세한 세균들이
깨끗한 어디에서 엄청난 음모의 집을 짓고
세상과 당신 사이에 정전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럴 땐 강력살균제로 소독하라
그래도 세상 역겨운 냄새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때엔
마무리 단계에서 당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줄
비앙카향 유연제를 몇 방울 떨어뜨려보라
햇빛 가까운 옥상 어디에서 부드러운 빛으로 건조되는 동안
보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축축한 과거들도 건조될 것이다
떨어질 것, 지워질 것, 묻힐 것
그렇게 모두 세탁되고 건조되어
가장 투명한 빛깔로 당신의 그대들 앞에 서보라
이렇게 깔끔한 아침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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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수리재 [1998년 강원일보] |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1998년 한국일보] |
자모의 검 [1998년 동아일보]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위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닫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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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최승자 , 이남호
여정의 시들은 강렬하다. 그 강렬함은 아마도 체험의 강렬함에서 오는 듯하다. 여정의 시들은 형식이 오히려 서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익은 내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언어나 형식에 대한 성실한 천착이 부족한 듯하면서도 내용과 상상력이 언어나 형식을 압도해버리는 측면이 있다.
여정이 당선된 이유의 대부분은 '자모의 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모의 검' 한 편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여정의 다른 작품 또는 앞으로의 활동을 지켜봐주기를 부탁드린다. 당선자의 문운을 빈다.
▶ 당선소감 : 크고 헐렁한 옷, 그 뜻을 헤아려 - 여정
막상, 당선 소식을 듣고 나니, 내 옷이 너무 커져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이렇게 큰 옷을 마련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뜻을 헤아려 앞으로 살찌우기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언젠가 그 옷에 잘 어울리는 모습 으로 그 분들을 뵙고 싶다.
지난 몇년을 돌이켜 보면, 현실과 부대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투병이 벌어 준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책을 읽고 동인 활동을 하는 게 전부였다. 시에 가까이 가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시란 놈은 늘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더 멀리 달아나 버리곤 했다. 혼란과 좌절이 거듭됐다.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이끌어준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시나인 동인,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혼란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내 시가 너무 미흡하다는 것, 그리고 갈 길이 너무 멀다는 것, 그래서일까? 그동안 쓴 시들을 다듬어 신춘문예에 응모하면 서도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았다. 뜻밖의 소식을 듣고, 솔직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이었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갔고, 아버지의 모습이,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올랐었던 형님, 그리고 형수님, 누나, 조카인 효민이 소희까지.
많은 분들께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그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특히 시작에 많은 도움을 주신 시와반시 문예대학의 강현국, 구석본, 박재열, 세 분 선생님과 문인수, 송종규 선생님, 앞선 기수의 선배님들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여정
1970년 대구출생, 계명전문대 경영학과
장닭공화국 [1998년 조선일보]
새벽녘 목청을 다듬으며
칠성무당벌레마냥 높은 곳에 오른다
누구나 아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잠깐 벼슬을 쭈뼛거리다가
길게 한 소리 뽑는다
높은 곳에 올라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처럼 멍청해 보인다
폐계 천원 폐계 천원 한다는 양계장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튀김닭으로 팔려 가고 닭도리탕감으로 팔려가는
저 수백 단으로 쌓인 유통의 나라를 굽어보며
그레코로만 선수처럼 발바닥을 닦아본다
아침이 온다고 다 같은 아침이 아닌데
아침만 질러놓고 보면 이 나라 모두
아침 빗자루질 같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을 하며
지난밤 닭장 횃대에서 자다
쥐들에게 뜯겨 살이 다 드러난 암탉들을
거느리고 한껏 목을 꼿꼿이 세운다.
양계장에서 팔려온 암탉들 끌고 운동도 시켜야지
그래야 살이 맛있어지지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 볼까
존경하는 주인 아저씨,
벌써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 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받는 줄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 생각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리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 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쓰는 날갯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계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하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재미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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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정현종 , 김주연
당선작인 이종수씨의 '장닭공화국'은 닭으로 비유된 현실, 특히 정치현실을 다룬 일종의 알레고리 시인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재미와 고급 유머의 세계가 눈부시다.
그것은 고발이나 풍자, 난해한 상징과는 또다른 방법 위에 서서, 섬세한 관찰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현실비판의 시이다. 이씨의 다른 응모작들도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 젊음의 패기가 첨가된다면 아주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이종수
1966년 전남벌교 출생, 청주대 국문과 졸업
저녁 [1998년 대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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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1998년 부산일보] |
3월 [1998년 중앙일보]
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뽀오얀 수중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
3월 구석구석마다 젖내가...... 어머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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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최동호 , 이시영
조은길씨의 '3월'은 우리네 삶의 신산을 어느 정도 겪어낸 사람의 체험과 생활의 따뜻한 정서가 뭉클하게 배어있는 시다. 상상의 폭이 좁고 너무 여성적인 것이 흠이지만 언어들이 시 전체를 향해 꽉 짜인 밀도를 얻고 있으며 무엇보다 일관된 시적 절정을 향해 고개를 넘고 또한 적절히 가파른 숨을 몰아쉴 줄 아는 그 리듬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거기 묘사된 생활의 세목들은 또 얼마나 친숙하며 따사로운가.
3월의 배냇잠 구석구석까지를 훑어내는 그 시적 촉각이 예민하면서도 신선하다. "나뭇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를 맡을 줄 아는 이 시인의 건강한 서정을 당선작으로 민다.
▶ 조은길
1955년 경남 마산출생, 방송대 국문과 졸업
가족일기 [1997년 중앙일보]
발가락이 가려웠다. 노을 밑으로 낙엽들이
서둘러 떨어질 때, 국문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들이
허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밟아 보았다.
길은 덜 자란 마늘밭 하나 건너지 못하고 내려갔고, 그날 밤
법성포로 떠난 아버지의 굵은 손끝에 매달린 굴비 한 두름
짜게 절여두겠지. 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쉰 밥풀 같은 하루, 밑으로 가볍게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유채꽃같이 찾아오는 봄.
풀어지겠지, 개울에 갇힌 은어 몇 마리쯤.
언덕부터 고추꽃들이 매운 바람으로 불고, 아직 덜 꺼낸
유품 같은 우물을 왔다. 그날 돌아가신 할머니 팔까지 올라오던
물결, 씻고 행구는 나의 발자국 멀리 흘러갔다.
자취방은 어머니 근심이 기어나오던 그날 같은 배고픔.
신문배달을 했다. 셔터 밑으로 자꾸만 쑤셔넣던 체첸반군들.
군에 입대한 형으로부터 엽서가 오고
가지런히 기댄 등교길이 즐거웠다.
일몰은 눈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들은 하나씩의 풍경들을
들고 들어가 꿈을 만들고, 껌 씹는 낙엽을 밟으며
술집 누이가 들어왔다. 그날 밤,
기도의 형식으로 버려진 수난들이 일기장 속에 접혀 들어갔고,
이유를 몰랐다.
신발을 신지 않은 개들이 고향을 향해 떳떳하게 짖어대고
기쁜 꽃들로 나가 계절을 바꿀 수 있는 이유를.
세월은 넘지 못하는 것일까. 누이의 이마 하나,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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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가작 입선작
▶ 심사평 : 정현종 , 황동규
선자들이 흔쾌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새로운 당선작을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적 풍요 속의 질적 평준화 현상이라고 할까, 남다르게 자신의 개성을 보여준 투고자를 선별하는 어려움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모자 수와 응모작품이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엇비슷하게 높낮이를 겨루고 있어서 선뜻 당선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이용규의 '가족일기'는 삶의 경험들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아직 거칠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이성일의 '안개바다'는 섬세하기는 하 지만 종래의 신춘문예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두 분을 함께 가작으로 결정한 것은 양자의 장단점이 서로 엇갈리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시의 전개방향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개성 시대라고 볼 수 있는 현시단의 긴장 이완 현상을 타개해 나갈 것을 이들에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 이용규
1965년 전남 영광출생, 서울예전 문창과졸업
길에서 길까지 [1997년 강원일보]
자동차에 오르자 곧 내 숨통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푹신한 의자와 안전벨트의 포옹 속에서
부디 즐거울 수 있기를 내 여행에 시동을 걸며 나직이 중얼거리면
벌써 나는 행복해진다
창 밖으론 흥겹게 눈이 내리고 있고
사람들 또르르 미끄러져 백미러 뒤로 사라지는
거리는 돌아가는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추억을 상영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너무 어렸거나 너무 몰랐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눈처럼 맑은 음으로 나를 허물고 지나간
내 인생의 곧은 발자취가 되어준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라디오에서 듣는 흘러간 노래의 리듬처럼 익숙하지만 더러는 잊혀진
그러나 삶의 창가에 문득문득 하얗고 깨끗한 성에처럼 어리는
그들을 통해서 나는 부드러운 커브의 곡선처럼 완만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 나는 급제동을 걸지 않고도 그 옛날의 자리에 멈추어 서서
지금의 내 속도를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삶의 이유를 안다
길은 금방 미끄러워져 세상은 느린 춤곡으로 움직이고 있고
쌓인 눈 속에서 투명한 얼음의 눈이 내다보고 있을 세상엔
길 위에서 만나는 얼굴 익은 사람들 깔깔깔 엉덩방아 찧는 사람들의
풍경들이 한 화면에 슬로로 천천히 지나가고 약속이나 한 듯
길 위의 발자국들이 어깨동무로 하나 둘씩 일어나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저렇게 이웃처럼 살다가 가야 할 곳 거리에서
힐끗 돌아본 그들 속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아예 핸드브레이크를 당겨놓고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나는 노래한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인생에 도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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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1997년 동아일보]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 (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 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러자 앙상한 뼈와 해골을 뒤집어쓴 내가 뒤척인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보트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를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채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 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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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정진규 , 정과리
시가 다시 부활을 꿈꾸는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시를 당선작으로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경임의 시는 무심코 읽으면 시의 전언을 자칫 놓쳐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적요하다. 그 어투가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거위로 변한 오빠들을 위해 베를 짜는 소녀처럼 언어의 직물을 한 뜸 한 뜸 수놓아 간다. 그 직물에 성긴 데가 없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지만, 때때로 좀더 리듬감 있게 벼려질 수도 있었을 구절들이 산문적으로 늘어나 버린 것은 시의 흠이다.
그에 비해, 배용제의 시는 선명하다. 텔레포트라는 가상현실을 제재로 하여 미래에 대한 환상, 거듭 꺾이는 희망들, 헛된 희망의 반복 속에 갇혀 버린 자아의 '견고한 공포'를 썩 화려하게 합성하고 있다. 그 화려함이 지옥같은 의식의 고뇌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지옥 속의 투쟁을 좀더 치열하게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동아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 가운데는 워낙 우수작이 많아 주최측의 양해 아래 가작 한 편을 더 고를 수 있었다. 배용제의 시를 당선작으로, 이경임의 시를 가작으로 민다.
▶ 배용제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 신방과 졸업
맨 가장자리의 중심 [1997년 대전일보]
훌륭한 비유 다 놔두고
당당하게 직선적으로 말하는 점성술의 그 별들
쏟아져 흩어져
내려와 박혀
언 땅 위가 죄다
중심의 기쁨으로 들떠
소설(小雪)날 잔디밭
그 맨 가장자리의 개나리
노오랗게
꽃
피워, 수줍어서 활짝
얼어 시들어져 꽃잎 떨어져
이 시각 명운(命運)들의 중심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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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먼 집 [1997년 부산일보]
문 밖엔 늦은 저녁이 서 있다 폐타이어가 엮어진 지붕 위 설익은 꿈이 자주 바람에 들춰져 도 마음들은 꼭꼭 여미고 산다 가파른 골목을 밀고 온 지친 눈들 불빛을 당기고 부엌으로 들어간 식욕은 세간을 달그락거린다 시렁 위엔 칸칸이 달빛이 포개져 있고 간고등어 한 마 리 온 식구들을 구워낸다 오순도순 둘러앉은 눈빛들 한 그릇씩 비워내는 얘기에 아랫목 온 기가 올라온다 식구들 한 이불의 별빛을 덮고 자면 어둠이 풀풀 새어나오는 집집이 몇 채의 꿈을 꾼다
신발들 저희끼리 내일을 쓰윽 신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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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방패연 [1997년 국제신문]
내 갈비뼈가 다듬어질 때부터
나는 한낱 광대로 운명지어졌다
남사당 같은 분장을 하고
하늘에다 광댓줄을 걸쳐서
신명나게 줄타기를 시켰다
바람이 곱지 않게 부는 날
힘겹게 전신을 비틀면
구경꾼들은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나는 두려움 하나 없이
익숙하게 하늘을 잡아당겼다
무든 내려다보면 관객이 빈 초가와
용이 되려는 샛강의 몸부림이 보였다
샛강의 거뭇한 피부는 굳어 있고
허공에서 외줄을 타는 질긴 순간
텅 빈 가슴은 시리기만 하였다
매서운 북풍이 몰아칠 때는
둥글게 뚫린 구멍으로
하염없이 잡념을 쏟아 버려라
호통치는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와
매를 휘두르는 모습에 겁을 먹었다
끝없는 하늘을 나느 새가 되는 등판 위에
묵인 생명줄이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었다
가슴이 없는 삶으로 치솟다가
아득히 북 치는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으면
긴 그림자로 하늘을 우러르면
이무기가 된 버드나무 가지에 걸린
슬픈 친구들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한사코 앙칼진 대추나무 손끝을 비켜가면서
바람이 부는 먼 나라를 갈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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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부드러운 감옥 [1997년 동아일보]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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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가작 입선작
▶ 심사평 : 정진규 , 정과리
시가 다시 부활을 꿈꾸는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시를 당선작으로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경임의 시는 무심코 읽으면 시의 전언을 자칫 놓쳐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적요하다. 그 어투가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거위로 변한 오빠들을 위해 베를 짜는 소녀처럼 언어의 직물을 한 뜸 한 뜸 수놓아 간다. 그 직물에 성긴 데가 없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지만, 때때로 좀더 리듬감 있게 벼려질 수도 있었을 구절들이 산문적으로 늘어나 버린 것은 시의 흠이다.
그에 비해, 배용제의 시는 선명하다. 텔레포트라는 가상현실을 제재로 하여 미래에 대한 환상, 거듭 꺾이는 희망들, 헛된 희망의 반복 속에 갇혀 버린 자아의 '견고한 공포'를 썩 화려하게 합성하고 있다. 그 화려함이 지옥같은 의식의 고뇌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지옥 속의 투쟁을 좀더 치열하게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동아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 가운데는 워낙 우수작이 많아 주최측의 양해 아래 가작 한 편을 더 고를 수 있었다. 배용제의 시를 당선작으로, 이경임의 시를 가작으로 민다.
▶ 이경임
1963년 서울출생, 서강대 영문과 졸업
빨랫줄과 사계 [1997년 영남일보]
장마
며칠째 빨랫줄은 그냥 쉬고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빗방울들만
빨랫줄 끝에 옹기종기 앉아서
생각의 뿌리를 키우고 잘라내고 키우고....
그래도 하루는 쉬 저물고, 굴뚝연기들은
어디론가 자꾸 달아나려 합니다
젖은 머리카락 끌고 허우적대며
세상 끝 어디쯤 화살처럼 박혀 버리고 싶은지
입추
지난밤 몰래 마을까지 내려왔던 산길이 개울을 거너 제 자릴 돌아가는 아침, 빨랫줄마다 햇살은 가지런히 널리고 나무들은 꽃과 열매를 바꾸어 달고 있습니다. 산불 같은 울음은 산등성이마다 고여서 도무지 흐를 줄 모르고 단풍잎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로 소란스럽습니다 억새꽃 속의 바람과 바람이 서로 악수할 때 강을 따라 흐르던 풀들이 낡아가는 손수건 흔들며 달리고요, 꿋꿋한 바지랑대 위에서 날개 쉬던 새들도 제 그림자 떨치며 제일 높은 하늘의 층계로 날아갑니다
겨울 편지
거칠 것 없어 잘도 달려옵니다 무거웠던 이름들 다 떼어내고 생선가시처럼 잘 발려진 숲 지나, 숨어버린 풀꽃들이 모가지 딛고 달려온 바람의 발목은 이때쯤 더욱 실합니다 빨랫줄 아래 서성대던 넝쿨 식물들은 입동 지나자 바지랑대 동여매고 서서 잘 여문 꽃씨들을 못다한 말처럼 뱉어내고 있습니다 꾹 다문 입술의 빨래집게들은 사람들의 구겨진 팔과 다리를 후후 불고 있지만 처음부터 얼어 버린 그들의 기억은 저녁이 되어도 쉽게 녹을 것 같지 않습니다 지붕 하나 없어도 언 몸 서로 부벼가며 녹이는 강물의 이야기를 아시는지, 깊은 곳일수록 따뜻한 입김 불어 가라앉히는 물길은 왼통 붉은 발자국들 뿐일 테지요
기일 (忌日)
무덤 하나 더 생기고
그렇게 몸은 왔습니다
갈래갈래 찢긴 길들은 지워진 손 흔들며
언덕을 넘고, 절벽을 곤두박질 치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빈 빨랫줄에는
바람의 빈 발자국만 제 무게를 가늠해 보곤
종소리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서녘 하늘엔 실신한 구름들
빨래마냥 야위어가고 기다림의 빨랫줄에는
한 가닥씩 두 가닥씩 저녁 노을이 와서 걸립니다
제비꽃 얹힌 무덤 하나 더 만들며
그렇게 봄은 와서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
▶ 1997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안개바다 [1997년 중앙일보]
1
바다 근처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이 마을의 집들이
유리창을 번뜩이며
바다를 보고 있다 서로
다르게 비어 있는 창 속에서
조금씩 바다가 증발하고
있다 불빛만이 가려진
커튼 사이로 안개를
흘릴뿐
2
한지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생을 탁본하는 밤이면
그대가
너무 깊게 박고 간 내 가슴속
못 하나가 쉼표처럼, 그대의
죽음 밖으로 삐져나와
바다로 간다. 아직,
행간을 건너가 보지 못한 생각들이
몇 척 배로 찍혀 정박해 있는
바다. 안개 속이다
고동에서 고동으로
생을 탁본하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바다를 떠다닌다. 난파선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바다를 끌고 와
고동, 그 빈 먹통 속으로 확,
죽음을 펼쳐 보이는 안개. 멀리서
안개 경보 울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로 풀어진 자들의 신음,
................................................................
▶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가작 입선작
▶ 심사평 : 정현종 , 황동규
선자들이 흔쾌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새로운 당선작을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적 풍요 속의 질적 평준화 현상이라고 할까, 남다르게 자신의 개성을 보여준 투고자를 선별하는 어려움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모자 수와 응모작품이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엇비슷하게 높낮이를 겨루고 있어서 선뜻 당선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이용규의 '가족일기'는 삶의 경험들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아직 거칠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이성일의 '안개바다'는 섬세하기는 하 지만 종래의 신춘문예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두 분을 함께 가작으로 결정한 것은 양자의 장단점이 서로 엇갈리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시의 전개방향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개성 시대라고 볼 수 있는 현시단의 긴장 이완 현상을 타개해 나갈 것을 이들에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 이성일
1967년 주문진 출생, 강릉대 국문과 졸업
야경 [1997년 한국일보]
자정이 넘은 밤길.
눈발은 그치고
마실꾼들 이야기를 밝히는 불빛은
차가운 바람을 달랜다.
불꺼진 방에, 사람은
잠들었을까
조용하다.
개짖는 소리도 잠 못드는 이 밤
우리들은, 마실방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남겨두고
야경을 돈다.
북을 두드리며 마을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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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김종길 , 신경림 , 김광규
엄청난 양의 응모작품을 읽고 선자들이 받은 첫인상은 응모자들이 전반적으로 우리의 시를 폭넓게 읽지 않고, 일부 기성 시인의 작품을 모방하는데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점이었다. 특히 비속어를 남용하면서 무정부 상태의 수다를 늘어놓는 경향은 서정시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한 편의 시에 우주를 담을 수도 있지만, 모든 시에서 인생과 세계의 전부를 노래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대의 씨의 '야경' 외 5편은 대체로 "먼 곳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만큼 고적하게 버려진 고향 마을의 이미지가 지배적인 작품이다. 그 중에서 표제 작품은 적은 말수로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하여 깔끔한 완결미를 이룩했다. 불꺼진 방에서 잠든 사람과 마실방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들, 차가운 바람을 달래며 밤을 밝히는 불빛이 개인과 공동체의 복합적 존재로서 시골을 그리면서 동시에 현실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진실을 과장하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은유적 내용을 형상화함으로써 서정시 본연의 모습을 보여 준 점을 높이 여겨 당선작으로 뽑았다.
▶ 이대의
1960년 평택출생, 방송대 국문과 졸업
예당기행 [1997년 전남일보]
기차에 오르며
멀리 흰 종이꽃 눈물처럼 달고 가는
아침 상여를 보았다.
아직 길 떠나기에는 이른 새벽,
서둘러 길으 f나선 저 서운 생애는
또 무엇이 되려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강물처럼 출렁이는 기차,
기차처럼 흔들리는 강물에
늦가을 마른 풀잎 같은 나를 싣고 예당 가는 길
남평, 앵남, 증주 그리고 삭정, 이양 …
들꽃 이름을 닳은 마을들을 스쳐
덩치 큰 미루나무 줄지어 선 보성을 지나
예당에 이르면
빗장 풀린 그리움들 확 쏟아져
흐린 안개되어 길을 막는다.
기차는
철길을 놓으며 떠나고
말없이 먼 길 따라오던 산맥들 바라보며
나는 문득,
산 같고 강물 같던 그 사내,
찔레꽃처럼 수줍고 아린
스무살 어귀의 내 첫사랑을 생각했다
그리움은 언제나
제 가슴 태우며 번지는 들불처럼
먼 길 떠나와 이젠 아득해져 버린 벌판 위에
나를 혼자 세워두곤 하고,
키 작은 옥수수밭 지나
찬찬히 길 내어주며 이루는 숲 위로
소쩍새며 뻐꾸기들
손풍금 소리처럼 쓸쓸하게 울며 날아가는데,
지독한 안개로도 다 지우지 못한 지나간 시간들
나는 작은 배에 실어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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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외출 [1997년 경향신문]
이른봄, 나는 외출을 하였다
겨울에 익숙한 외투로
아직 한쪽은 겨울로 남은 몸을 감추고
봄 길로 나서면 봄 햇살에
큰크리트 벽들도 금세 싹을 틔울 것만 같다.
내 몸의 어디에서도 살갗을 뚫고 무엇인가 돋는 듯하다.
길가엔 동시상영 포스터와 선거 벽보들이
나란히 봄볕을 피해 긴 담을 따라
월장을 한참 준비중이다.
신축성 없는 마분지 같은 얼굴들이
고민 끝에 모조하는 근엄한 미소들은
깨알같은 자신의 약력 밑에 한 줄의 그것들을 더하기 위해
이 낯선 곳으로 애마부인 7과 외유를 나왔다.
난 그 앞에서 문맹이 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귀중하다는 나의 한 표 행사를 고민해야 할 걱정에 싸였다가
딴전 피듯 파란 하늘을 본다.
봄볕을 받고
개나리와 아지랑이가 출마를 하였으면
노랑나비가 빨리 봄을 노래하였으면
나도 아직 일부가 차가운 몸을 안고 봄으로 간다.
봄이 공천하는 많은 새 생명이 돋는 곳으로
나는 외출을 한다.
봄날은 우리에게 공약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햇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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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유종호 , 신경림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 중에는 산문체의 시가 많았는데 대체로 읽기에 지루하고 답답했다. 리듬이 없는 것이 그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현대시가 노래하는 데서 사고하는 데로, 영탄하는 데서 추구하고 발견하는 쪽으로 변화해 온 것만은 사실이지만, 시에 있어 리듬은 힘이요, 재미의 원천이라는 점이 간과될 수는 없는 것이다.
김창진의 시들은 도시 변두리의 일상인들에게 보편적인 정서를 형상화한 것들이다. 얼핏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요, 누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다듬은 데서 이 시인의 솜씨가 돋보이는데,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어, 가장 잘 다듬어진 '외출'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시장'이나 '귀순열차에서'같은 장황해서 압축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시들까지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더욱이 '외출'의 "고민 끝에 모조하는 근엄한 미소들"이나 "딴전 피듯 파란 하늘을 본다" 혹은 '귀순열차에서'의 "이 열차 안의 이렇게 아는 것 없고 힘없이 지친 삶들은 어느 정부로 귀순해야 하나요?" 같은 대목은 세상을 보는 만만찮은 눈과 재간 없이는 얻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김창진의 '외출'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이 시인이 시에서 빼고 압축하는 법을 조금만 익히면 빼어난 시인이 되리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 김창진
1967년 봉화출생, 서울예전 광고창작과 졸
의자 · 계단 · 창문 [1997년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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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역 [1997년 세계일보]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 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 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장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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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유종호 , 신경림
응모작들의 수도 많았지만 수준도 높았다. 당선권이라고 생각되는 새얼굴도 서넛을 웃돌았다. 문학의 위기를 거론하는 시정의 소동과는 달리 씩씩하게 자기세계를 세우고 있는 재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눈에 뜨이는 것은 터놓고 산문을 지향하는 성향이 무자각적으로 퍼져 있다는 것이다. 산문은 짤막하다고 해서 산문임을 그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별장을 지을 수 있다' 외 5편을 보여준 김영남 씨를 당 선자로 정하기로 생각을 같이했으나 무엇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약간 망설였다. 시적 개성도 뚜렷하고 시행도 당당하게 직설적이다. 신춘당선시의 뼈대를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독자를 갖는 신문에 실림을 참작하여 작자로서는 모험성이 엷은 '정동진 역'을 당선작으로 하였다. 정감도 있고 재미도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건다.
▶ 김영남
1957년 전남 장흥출생, 중앙대 경제학과 대학원 졸업
지하역 [1997년 문화일보]
지하 30미터,
한때는 만개한 꽃처럼
구김 없는 선명한 모양의 화석들이 이곳 어디엔가
오랜 비밀로 박혀 있었음직도 한,
수천 수만 년 동안 지하 어둠의 사슬에 묶여
미동도 없던 영혼들이
길이 뚫리고 빛이 스며들면서 하나 둘
마법에서 푸려나 지금은 내가 서 있는 언저리를
휙휙 날아다닐 것도 같은,
지하역, 아직 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시간이
벽과 천장의 구석진 곳에 은밀히 흐르고 있다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육체 없이 영혼만 타고 내리는 열차도 있을까?
요즘 들어 내 영혼보다 비대해진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다
공복의 허전함으로 비롯된 심약한 생각의 끈을 자르고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충족되지 못한 뱃속의 허기처럼
보호구역 안에서도 늘 불안함을 느끼는,
206개의 뼈마디로는 지탱하기 힘든 지상의 무게가
선로 위에 앉은 빛 한줌까지 파르르 떨게 한다
희끗희끗 색이 바랜 벽화의 인물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승차구에 모여든다
어쩌다 땅 속까지 추방당한 아침
거추장스러운 그림자를 하나씩 끌고,
언젠가 화석으로 남을 시간들을 등에 지고,
깜깜한 터널 속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저 눈동자들
어두의 틈새로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는 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동공이 환히 열린다
언젠가는 출구 없는 지하역에서 영원히 맴돌지라도
아직은 살아 지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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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차장 근처 [1997년 서울신문]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 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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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유종호 , 정현종
신춘문예 작품이 읽는 사람을 그야말로 신나게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썩 탐탁지 않지만 뽑는 일이 많다고 해야겠는데, 박남희의 작품을 읽는 일은 그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하는 것이었다.
'은지화의 꿈'의 '하늘이여 너무 쉽게 어두워지는/ 저녁하늘이여 새를 숨기고/ 나를 숨기고 내 안의 그리움을 숨기고/ 동짓달 소나무 숲을 헤치고 떠오르는/ 달이여 달 속의 아내여'도 일품이지만 당선작으로 고른 '폐차장 근처'는 이른바 문명 세계의 황폐 - 경쟁과 속도와 소유욕과 자동성 따위가 만드는 저 신경증적 질곡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느낌을, 어떤 희생과 지복의 느낌에 흠뻑 젖게 할 만큼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원천인 저 자연의 그야말로 유장한 리듬 속에 있는 사람의 행복은 동시에 도시, 과학기술, 경제 따위들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생활의 황폐와 불건강한 징후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배가되는 것이기도 하다.
▶ 박남희
1956년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역에 대하여 [1997년 경인일보]
하필 그 일쯤으로 생각하는 어드렛일감에 패를 건다
끈으로 봉해진 속내까지 감이 잡힐 나이에도
정한 시간에 닿기 위해선 피 말리나 오히려 호기롭다
욕망의 길이가 넓이로 그런 삶의 부피가 무게로
나름의 요령으로 환산되던 방편들
이름 석 자가 이씨 김씨로 끝내는 이봐 저봐로
악수하고 ㅌ옹서명 나누며 행선지별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얼얼하도록 후회의 지문처럼 남아
짐 부린 후의 배처럼 생생하다
실어놓기만 하면 제 갈길 알아 떠나는 짐짝처럼
고삐 풀린 가슴에
기항지가 풋풋한 바람으로 떠돌기라도 하면
일이 밴 손마저 늘상 대함에 낯설게 하듯
세상 사는 거 별건가, 딴 곳이라고 이만 못할까 싶으다가도
다시금 몸푸는 일이 사려질 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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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호롱불을 켜고 [1997년 광주일보]
유황냄새 실 같은 연기를 따라 피어오르는 성냥개비 푸르스름한 등잔 밑에 내려놓습니다 우 물가에선 아버지의 물 푸는 소리 허름한 부엌의 무쇠솥 여닫는 소리 뒤이어 들리고 방문 밖 내 고무신에는 벌써 어둠이 가득 고여 잇습니다 토방 아래에선 작은 별 두서넛이 내려와 놀 고 아버지는 땀내 나는 잠방이 탈탈 털어 들며 허리 쭉 펴고 긴 숨 뱉어내는 하루를 감나무 에 겁니다 물 담긴 흰 고무신 벗는 기척에 방문을 열면 저수지 건너 마을에서 대답처럼 켜 지는 호롱불빛 아궁이 펄펄 끓도록 타던 생솔가지는 몇 알 묻어놓은 고구마 위로 사위고 심 지 돋운 가을 저녁 창호지 바른 문 위로 아른거립니다 그러면 바람이 살그머니 마실 나오는 고샅길로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다가앉는 산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호롱 등잔을 사서 형광등 아래 동그랗게 앉혀놓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먼 길 밖에서 가슴에 호롱불을 켜고 가까이 다가오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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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220번지 첫 번째 길가 7호 [조선일보]
안에서는 도무지 날씨를 짐작할 수
없었다 창틀에는 평행한 세로줄 위에 하트 모양이 붙어 있는 쇠창살이
있었고 먼지들 안쪽에 난시의 창문이
자기 눈알의 크기만큼 위로 오르는 철계단을 사선으로 잘라
보여주었다 그것들 사이로 그을 수 있는 몇 개의 직선 위에 시신경을
올려놓고 우산이 지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언제나
한 개의 형광등과 두 개의 백열등과 또 한 개의 할로겐 등을
같은 채널의 라디오와 함께 켜 놓았고 그것들은 밤새
흰색 벽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가내수공업으로 거미줄을 짰지만 감각은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 있었다 아랫쪽에서 발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졌다 천정에서 당황한 발자국이 자정의 정수리를
가로질러갔다 한달에 한번쯤 등이 구부정한 사내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살충제라고 흰 마스크가
말했다 분무기를 짊어진 사내는 구둣발로 걸어들어와 후미진 곳 곳곳에
살색의 약을 뿌렸다 생각날 때마다
벤자민 화분에 반 컵의 수돗물을 주었다 그것은 천천히
어린 잎들부터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물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화분이
놓인 창틀은 내내 축축했고 그곳으로 잠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예리한 각도로 쓰러졌다 멀리 갔다온 날이면
썩는 냄새에 빨리 잠들었다 인기척에 깨어 나가보면
낯익은 벌레의 알들이 문가에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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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마지막으로 두 편의 작품이 남았다. 손필영의 '동소문 동'과 박균수의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인데, 이 두 작품은 각 각 전통적 서정과 그 와해라는 서로 반대되는 자리에 앉아서 그들 나름의 필연성을 조용히 주장하고 있는, 주목할만한 시들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는 이 시인의 다른 작품 '관찰' 등과 함께 더 이상 서정성의 세계가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 중심부에 대한 예리한 묘사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
섬세한 관찰력과 구체적인 사물의 장악은 시인의 저력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절제된 주관과 감정은 그것이 불가피해진 세계를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와 달리 '동서문동'은 도시문명의 그늘과 그 안에 가늘게 잠복해 있는 인간들의 온기를 서정적으로 감싸고 있는 예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계의 구조적 본질을 스치는 보다 은밀한 시선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응모작 대부분이 이 두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데, 지양과 통합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 박균수
1968년 경남 울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부의 [1996년 조선일보]
봉투를 꺼내어
부의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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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신춘문예 응모를 포함, 최근 시들의 동향이 사뭇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꽤 부지런한 관찰을 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쇄말주의로 흐르는 느낌이 그것이다. 시가 중심을 향해 긴장된 응집력을 보이는 대신, 어디론가 풀풀 날아가 버리는 듯한 인상이 이즈음 쓰여지고, 발표되는 시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영규씨의 '부의'를 만나고 이를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문상 가기 위해 꺼낸 부의 봉투지에서 쏟아져 나온 꽃씨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대비시킨 솜씨는 얼핏 보아 평범하되, 마치 씨앗 속에 숨어 있는 꽃처럼 깊은 지혜와 섬세한 분석을 숨기고 있는 대단한 경지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자의 역량은 다른 작품 '메기 낚시'로도 입증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색과 퇴고를 거듭한다면 꽤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최영규
강원도 강릉출생,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비상을 꿈꾸며 [1996년 영남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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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대한 우상 [1996년 전북일보] | |
성당부근 [1996년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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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1996년 강원일보]
장마로 불어난 강은 둑을 넘고 텃밭을 지나 마을까지 걸어와 사람들의 눈물로 더욱 큰 물을 만들고 계곡의 발치를 간지럽히던 나뭇잎과 풀들을 바다까지 옮겨놓곤 하늘에 닿는다
강은 뿌리가 약하거나 배후가 없는 것들을 쉽게 가슴 넓혀 안고 흐른다 그리고 수십년, 수백년 뿌리내린 고집도 결국 강에게 꺾이고 만다는 사실, 장마로 엄청나게 불어난 강을 보고 알았다
장마철에는 강이 빨리 흐른다
하늘과 땅속으로 흐르고 산천의 안부를 두루 물으며 흐르는 강은 강에 분해된 나뭇잎과 풀들의 이름은 바다에서는 간이 섞인 짭짤한 이름으로 다시 불려지곤 한다
강에 몸을 풀어 바다로 갈거나
바다에 모인 나뭇잎, 풀들과 춤이나 출거나
강은 바다에서 어떻게 깨어날까?
장마철에는 모든 것이 강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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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씨옥수수전 [1996년 전남일보] |
안개의 도시 [1996년 한국일보]
전망 좋은 방이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노랗게 물든 길을 새벽 안개가 지우고 간다
더러는 바람과 어우러져, 빌딩과 숲 사이
좁다란 골목까지 슬그머니 점령한다
가로등 불빛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워버린다
밤새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후미진 골목에 아픔으로 쌓이고
몰래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몸을 섞는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국물들
외롭게 뛰쳐나와 와와 소리치는 술병들
안개는 그 위에도 군림한다. 이 도시의
가장 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싸고 돈다
안개 속에 좀처럼 잠 깨지 못하는 도시
도청지붕에서 아침햇살은
젖은 안개를 하나썩 꺼내 말린다
요선동의 허름한 집에서는 해장국이 펄펄 끓고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간밤의 숙취를 푸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한결 든든해져가고
가을의 피가 마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잎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에 쌓이고
환경미화원들의 새벽이 더욱 바빠진다
청소차에 실려나가는 푸른 꿈의 잔해들
첫눈이 오면서 다시 도시는 얼어붙을 것이다
겨울 안개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도시, 안개는
이 도시의 전유물이다 한낮이 되도록 가시지 않는다
쿨룩쿨룩 누구나 겨울에 한번쯤 기관지를 않는다
댐이 생기면서 깊어진 질환이다
나는 곤혹스럽다. 겨울에 더욱 살아서 꿈틀대는 것이
물이 얼면 가장 늦게 풀리는 도시
그래서 여기 사는사람들은 누구나 얼음을 즐긴다
스케이트를 못 타는 사람은 여기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안개는 자욱하고 한낮이 될 때까지
모든 사물을 몸에 가둔다
그래서 몸에서는 짙은 우유냄새가 난다
겨울 내내 도시는 안개 속에 취해 있고
자동차도 전조등을 켜고 다녀야 한다
더러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낮이 되고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비로소 나도 바빠진다. 햇살이 벽을 타고
방바닥에 깊이 박힌 후에야 거리로 나선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에서 사람들은
씽씽 바람을 가르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신나게 하늘에다 연을 날리고 있다
민망하다 너무 초라하고 연약하여 나는 부끄럽다
재빨리 빙판을 벗어난다
에메랄드에서 뜨거운 한잔의 커피로 몸을 푼다
땅거미가 깃들면 전망 좋은 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스멀거리며 안개는 기어들 것이다
어둠과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안개와 속삭이며
잠들 것이다. 잠들기 전 닭갈비와 막국수
몇 잔의 소주와도 친화할 것이다
쿨룩쿨룩 오랜 천식을 잃으며 나는 기다린다
창문도 최대한 크게 열어 놓는다
그러나 아직 안개는 침입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면서 자동차의 소음도 낮아지고
도시는 조금씩 기울어지며 호수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새벽쯤에야 슬그머니 방문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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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신경림 , 김광규 , 김인환
투고작품들의 수준이 대체로 비슷하고 실패한 작품이 적었는데, 그러한 현상을 심사위원들은 우리 현대시의 형태가 안정된 증거로 이해하였다. 50년대와 60년대의 시는 소월과 이상의 압력을 받았고 70년대와 80년대의 시는 서정주와 신동엽과 김춘수와 김수영의 압력을 받았으나 90년대의 시는 영향이나 압력의 흔적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다. 투고 작품들의 대부분이 개인에 관계되는 문제를 편안한 운율에 의존하여 시로 풀어내고 있었다.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변화를 빠른 속도로 연결하는데 무리가 없고 경험에 근거하여 낯선 도시의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결함이 적은 임동윤씨의 '안개의 도시'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결정하였다.
▶ 임동윤
1948년 경북 울진 출생
알고 말고, 네 얼굴 [세계일보]
옛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를 들추어내고
그때 가까이서 어울렸던 친구의 이름도 떠올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개라며
나에게 묻는다
기억이 나느냐고
이것저것 지난 세월에 묻은 흔적을 증거삼아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는 이 낯선 절차
그래, 물 같은 세월 흘렀으나 거기에
비추듯 남아 있는 우리들의 코 묻은 얼굴과
남루했던 시절
흑백사진처럼, 아니 아니 눌눌하게 빛바랜
창호지처럼 다소 낡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무렵의 일을 이제는 옛날이라고 싸잡아
네 이름처럼 불러야 되는구나
친구야, 오랜만이다 애들이 몇이고?
그래, 나랑 똑같구나 딸 하나 아들 하나라니 !
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려야만 했단 말이냐
서로 연락도 하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우리들의 기약은 다시 아득해지고
무슨 꿈결처럼 잊혀져서 나는 또
가물가물한 너의 얼굴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
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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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유종호 , 신경림
임찬일의 '먼지 같은 뉴스', '공지천에서', '알고 말고, 네 얼굴' 등은 꽤 연륜이 느껴지는 시들이다. '알고 말고, 네 얼굴'은 일상적 삶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회의와 체념을 주제로 하고 있다 하겠지만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로 이을 날이 있겠지"와 같은 구절은 작자가 가진 긍정적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호감이 간다. '공지천에서'도 그의 세상을 보는 눈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 임찬일
1955년 전남 나주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오월 [1996년 동아일보]
중세의 가을 4 [1996년 경향신문]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깡통을 위하여 [1996년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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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즈가 나간 숲 [1996년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 마다 넘치는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 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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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정현종 , 황지우
'퓨즈가 나간 숲'을 시인 한혜영의 처녀림으로 기록하는 기쁨을 우리는 함께 나눈다.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우리는 그가 맑고 섬세한 시혼을 타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섬세함은 "쌈지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와 같은 미세화의 무늬를 그린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슬하슬하다. 감상주의의 반점들이 그 무늬 위에 번져 있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이런 류의 시를 몇 편 더 쓰다 말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한 우리의 우려에 반격을 가하는 것은 앞으로 순전히 그의 몫이다.
▶ 한혜영
충남 서산 출생, 1996년 현재 미국 거주
해묵음에 대하여 [1996년 문화일보]
원래의 길이 지워진 녹슨 나사를 풀다가
나는 보았다. 녹이 벗겨지고 잇몸만 남은 수나사에 비해
아직은 생생히 남아 있는 암나사의 해묵은 틈,
이가 주저앉은 자리마다 세월의 꽃이 피어 원래의
청춘을 버리고 그리움의 뒤안길로 견뎌온 우리들의
녹슨 골목길도 함께 보인다.
빠진 못자리처럼 녹슬고 지친 눈빛을 닦으며 돌아오는 길
나무 아래 작은 벌레들의 울음에도 헐거운 발길을
곧추세우는, 평생 샛길 한번 내지 못한
골목과 골목 사이 우리들의 작은 풍경.
문패가 바뀌고 늦은 귀가의 흐느적한 노랫소리 지워졌어도
그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텅 빈 정적을 흔들어 깨우는
습관의 해묵은 자리는 깊은 밤 떠난 사람 아닌
우리들의 몫이다.
밤새 서성이던 골목도 잠들어 이제는 눈 좀 붙여야지, 하며
혼자만의 일상에 머리를 낮추는 짧고 나른한 잠의
담장 너머…한 폭 수채화처럼 걸리는 아침 햇살.
긴 잠에서 풀려나는 심장의 박동과 눈곱에 매달린
하루의 무게를 다스리기 위해 몇몇은 수돗가로 혹은
십분만 더, 하며 쥐죽은 듯 물러나는 해목은 틈, 닦고 털어내도
녹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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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계란말이 [1995년 매일신문]
도마와 칼 사이에 잘려지는 야채의 중간음
가벼운 가락에 파, 당근, 양파, 풋고추, 백설햄은
속성을 버리지 않아도 될 만큼 썰려
풀어둔 계란 속으로 푹 몸을 담그고 서로를 굴려본다
도무지 엉킬 것 같지 않던 야채들이
끈끈이주걱풀에 달라붙는 날벌레처럼 계란에 엉켜 허우적대다가
심심한 소금기를 입고는 마침내 계란말이가 되기 위하여
기름으로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쭈욱 배를 깔고 눕는다
안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듯이
앞쪽을 지지면 돌아눕는 속 보이는 여유
등짝과 뱃살에 도는 노르스름한 달관의 빛이 부럽다
계란말이가 필요한, 상기된 얼굴들이 들어온다
이불장 속에 개어둔 이불처럼 맞닿아 산다지만 충분히
아픔을 관찰하는 일 없이 서로의 곁방살이로 살고
콜록콜록 색다른 의성어를 뱉으며 앓아도
왔던 길로 나가기만을 오랜만에 온 감기에게 바랄 수 있을 뿐
이제 내 몸에 엉키는 것은 회충과 같은 몸 안 벌레들뿐이다
사랑하고픈 것들은 등 보일 것조차 남아 있지 않은 밤
계란말이는 입에 넣기조차 민망한
위대한 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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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날엔 [1995년 한국일보]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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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김광규 , 김훈 , 황지우
무엇이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말로 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된' 시들과 '덜 되었거나 안 된' 시들의 차이에 대해서 느낄 수는 있다. '된' 시들은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치 자석 부근에 쇠붙이들을 일정하게 몰려있게 하는 자성처럼, 우리의 눈을 자기쪽으로 이끌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가면 좀체 내려오기 힘든 시의 제단에 이병률이라는 낯선 이름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축하한다. 그가 제시한 시들이 어느 수위 위에서 고르다는 것, 이미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 뭔가 자꾸 드러내려 하는 데서 오는 邪됨이 없다는 것. 흔한 말로 상상력이 새롭다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했다. 적어도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임을 본 그의 시선은 남다르고, 또한 따뜻하다. 그 따뜻함에 녹아나는 세계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 이병률
1967년 충북 제원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그해의 기억은 밤나무 아래서 끝나다 [1995년 강원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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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타클라마칸 [1995년 부산일보] |
목재소에서 [1995년 조선일보]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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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박미란씨의 '목재소에서'를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으로 뽑는다. 목재소의 생목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깨달아가는 생명의 환희와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해놓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아름다움 속에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진한 사랑이 숨어 있다. 부분적으로 너무 많이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나무의 생애를 통해 삶의 교훈을 얻어내는 알레고리적 상황제시가 신선하고, 그 앞날에 신뢰가 간다. 생목을 슬그머니 시적 자아로 만들어가는 동화적 분위기도 호감이 간다. 시인의 인생관과 언어적 표현 사이에 보다 구체적인 힘을 기른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 박미란
1964년 강원 출생, 계명대 간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