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전차] 대표선수는 무엇을 위해 달리나?
이 영화는 1981년 아카데미 작품상 등을 탄 명작 스포츠영화이다. 그리고 '영국' 영화이고 말이다. 제작자 데이빗 푸트남은 꽤 유명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킬링필드> <미션>같은 영화말이다. 왜 갑자기 스포츠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그 전해 1980년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 직전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소련이라는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들어갔고, 우리의 '대표'민주국가인 미국(당시 도덕주의 국가영도철학을 가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동이 되어)이 올림픽 참가를 보이코트를 했었다. 원래 올림픽이란 것이 순수 아마추어리즘이 출발점인데 아마 그때부터 올림픽은 또다른 국가경쟁의 이전(泥田:진흙밭^^)투구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올림픽 위원회 사람들도 똑같이 타락했고 말이다.(음. 표현을 좀더 조심하기 위해선...타락 안한 사람도 있을 것임) 그럼 갑자기 되돌아본 1924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은 어땠을까? 그들은 왜 참가하고, 왜 달리고, 왜 기쁘하고, 왜 그랬을까? 당시 목에 걸어주던 금메달은 도금된 게 아니라 정말 금덩이였을까? 아님 금메달 따면 평생 연금을 펑펑 주기라도 했을까? 그러니, 이런 명작을 난 우습게도 색안경을 쓰고 보고말았다. 영화가 주는 감동보단, 영화가 주는 어떤 사실을 볼려고 했으니 말이다. 참, 나란 놈은 한심한 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둘이다. 한 사람은 곱상하게 순종적으로 생긴 Eric Lidell (Ian Charleson)이고, 또 한 사람은 아주 반항적이며 도전적인 이미지의 Harold Abrahams (Ben Cross)이다. 이들이 처음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캠브리지 대학의 신입생 등록처이다. 캠프리지하면 옥스프드와 더불어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엄청 유명한 대학이다. 아직도 지성의 전당으로 우러러보고 말이다. 캠프리지는 더 유명하고 더 내실있는 많은 단과대들로 이루어졌다. 여기 Trinity College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을 보라. 앞날의 영국의 영광과 개인의 영달을 보장받은 새싹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네 이 둘이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의 사람임을 보게 된다. 에릭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느님에 바친 사람이다. 그리고 해럴드는 자신이 유태인이라서 받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달리는 이유, 목적부터가 차이가 있다. 에릭은 달린다. 달리면서 가슴 벅차게 하느님을 찾고 승리의 영광은 항상 하느님에게 돌린다. 반면 해롤드는 자신이 유태인이기에 모든 것을 유태인으로서의 신념으로 달린다. 둘은 내면적으로 끓어오르고 무언가에 투쟁한다는 것. 혹은 온몸을 헌신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과 열정을 서로가 존경하고 말이다.
에릭이 파리에 도착하니 그의 마음을 짖누르는 것이 있다. "100미터 결승전은 일요일이란다.." 하느님의 성실한 종 에릭은 결코 일요일에 달릴 수 없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이며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 이란 이라크가 한창 전쟁하다가도 라마단 기간이 되면 모두 알라신을 찾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눈에는 말이다.. 영국의 황태자가 파리에 자국선수를 응원-격려하러 왔다가는 그런 고뇌에 빠진 에릭에게 정중히 출전을 '부탁'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그럼 신문에선 "국왕보단 하느님.." "국가보단 천국을..."식으로 보도된다. 에릭은 자신의 종교의 신성함을 굳게 믿는다. 이에 한 육상 동료가 "내가 출전할 400미터에 자네가 나가지. 400미터는 일요일이 아니야..."란다. 그래서 하느님의 종은 타협을 보고 자기의 주종목인 100미터가 아니라 400미터에 나간다. 그리고 금메달을 따고 그 영광을 하느님에게 돌리고 말이다.
문득 옛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생각난다. 그 아이의 종교는 아주 유별난 거였다. 많이 알려진 종교인데... 어쨌든 그 아이는 아주 특별했다. 공부를 무척 잘해서 "서울대"간 아이였다.(서울대가 굉장한 대학이라는 가정하에 하는 표현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가 교련시간이면 언제나 스탠드에 앉아있던 기억(그는 교련이 언제나 "가"였단다... 그래도 내신성적 1등급 받은 아이였다)과 또 하나는 저녁시간에 식당에서였다. 당시 처음 나온 컵라면-정말 컵같이 생긴 빨간색 포장의 초창기 컵라면-에 밥을 말아 먹는데, 그 아이는 그냥 밥 먹고, 라면 먹고 그런다. 그래서 내가 도시락 밥이 차잖니. 말아 먹으면 맛있잖아. 그러니 그 아이는 자기는 말아먹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종교 신자는 헌혈을 거부하는 것만큼 국에 밥 말아 먹는 것에까지 까다로운 어떤 신념, 혹은 절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이 글 읽으시는 분 중에 그 종교에 대해 아시는 분은 저의 오해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 나중에 보니 외국의 큰 항공사들은 기내식 준비에 종교적인 분류까지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위한 배려, 채식주의자..기타등등... 그러니, 일요일날 달리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수 있는 신념이리라. 에릭은 정말 하느님의 종이 된다. 나중에 에릭은 중국에 선교활동하다 중국에서 죽는다. 아니, 하느님 곁으로 갔단다.
마지막에 파리 올림픽 경기장면을 자세히 보면 하나 흥미롭다. 요즘이야 모든 선수가-심판에게까지- 나이키 아니면 아디다스, 이런 식의 유니폼 마크 경쟁이 재미있을테지만 당시에는 자기나라 국기말고는 마크가 없다. 그리고 관중석 앞의 광고판도 텅 비어 있다.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둘 있긴 하다. 내가 알아본 것은 얌전하게 붙어있는 "립톤 티"였다.) 왜 프랑스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영국 홍차광고판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었는지는 궁금하기도 하다. 영국영화라서 그런나? 아님 립톤의 PPL인가?
스포츠맨쉽,운동규칙, 체육특기생, 올림픽... 이런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언제나 복합적이다. 어쩜 미국 프로복싱 프로모터인 돈 킹의 쭈삣한 머리처럼 돈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곤, 각종 병역부조리가 연상될 수도 있고, 좀더 귀족적이라면, 올림픽위원회 사람들의 비리도 생각날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결국은 경기라는 것이 1등을 가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1등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사회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엄청난 '부(富)'를 약속하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 가판에서 얼핏 본 주간신문엔 이런 머릿기사가 있었다. "공부잘해도 소용없다. 스포츠와 예능에 맹모바람" 뭐 이런거였다. 불행히도 내 주위엔 운동 잘해서 돈 많이 번 친구는 단 한명도 없다. 그리고 바이올린 잘 해선 명성을 떨친 사람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없다. 마치 내가 이 홈 페이지로 만약 떼돈을 번다면, 그것과 그 사람들의 운동신경과는 결국 동일한 목적의 유사한 결과산출일테니 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내 홈페이지가 그런 가망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지만.
이 영화는 경쟁을 통한 승리의 기쁨을 보여주면서도 그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는 잦은 슬로우 모션과 굉장히 아름다운 반젤리스의 음악의 힘덕을 많이 보았다.
이 영화에는 낯선 얼굴이 많이 등장한다. 거의 신인급 배우들이지만 열심히 달리는 것 만큼 성실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대학 학장역의 존 길구드나 해롤드의 육상코치로 나온 이안 홀름처럼 묵직한 조역이 받쳐주는 안정감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도 풍부하다. 해롤드와 연애하는 뮤지컬 스타같은 이야기가 말이다. 무엇보다 멜로적인 색채는 같이 하느님의 종인 에릭의 여동생이 언제나 오빠에게 '운동보단 하느님'을 다그치고, 오빠는 그런 동생에게 달리기하면서도 선교할수 있다고 그런다. 실제로 에릭은 주일(주말이 아니라)이면 들판에서 달리기 시합한다. 그리곤 그곳에 모인 신자들과 예배를 보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새로운 부흥회 방식일수도 있잖은가.
그러니, 그들이 꼭 국가의 영광을 위해 달린 것은 아니다. 해롤드는 영국인으로서의 자존심보단 어쩜 유태인으로서의 의식고양이 더 앞섰으니 말이다. 그리고, 올림픽에서 어떤 뉴질랜드 선수가 그런다. "전 여기 옥스포드로 유학왔다가 육상에 한번 나가보라고 해서, 뉴질랜드 대표가 되었죠..." 선발 절차가 상당히 현실적이다. 그들에겐 분명 1등, 2등보단 참가의 의미가 더 있을 것이다.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할 때 아마 방글라데시쯤 되는 나라에선 한 복싱선수가 1회 종 치자마자 다운당했는데 그가 한다는 말이 "여기 오기 전까진 농사지었다. 복싱선수로 나가라기에 나왔다"고 했다.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적어도 올림픽 혹은 아시안게임의 순수 아마추어리즘이 그런 식으로라도 살아있다니 다행이긴 하다.
감독인 휴 허드슨은 영화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은 품격높은 타잔영화인 <그레이스토크 타잔>이라는 거였다. 그후 몇몇 작품이 있었지만 전혀 안 유명하고, 전혀 신경 안 써도 될 영화들이었다. 이런 경우도 드물것 같다. 데뷔작이 최고작이 되어 버리다니....
하느님을 위해 달리는 것도 멋있는 일일 것이다. 지금 내가 달린다면 순전히 내 건강유지를 위해 달리는 것일테니 이 얼마나 세속적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