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이 동백나무 가지를 세차게 훑고 지나갔다. 붉은 꽃이 툭툭 떨어져 시멘트 바닥 위를 뒹굴었다. 밤사이 내리는 눈이 명주 수의처럼 꽃 위를 하얗게 덮는다.
‘시절인연時節因緣’, 모든 만남과 이별에는 때가 있다고 한다. 꽃은 바람을 만나 세상과 이별하고 눈의 품에서 다시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일까.
몇 달 전,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문자로 받았다. ‘아버지 돌아가셨대.’ 자다 깨서 언니의 문자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모르는 글자도 아닌데 말이다.
구로동 어느 병원 장례식장에서 입관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만났다. 명주 수의를 입고 반듯이 누워 아무 말이 없다.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모습이다. 시월인데 아버지의 몸은 벌써 한 겨울이다. 뼛속까지 냉기가 들어 붉은 피가 돌았던 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동안 목이 메었다.
죽음 앞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기억들이 먼지처럼 흩어진다. 가슴에 품었던 매서운 감정들이 무기력해진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늘 첫눈 같았다. 펄펄 날리다 이내 녹아 사라지는 첫눈, 언제 올까 오래 기다린 것에 비하면 아버지는 며칠 만에 떠나곤 했다. 기다림과 만남과 헤어짐, 그 순간들이 긴 이별을 위한 연습이었나 싶다.
유족명단에 아버지의 일곱 명의 자식과 손자의 이름이 촘촘히 적혀있다. 그동안 부끄럽다고 숨기고 살았던 관계를 낯선 장례식장 입구에 여실히 드러내놓고 있다. 이복동생들과 어색한 해후를 한다. 손위 형제들이라고 그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마음을 써주는 게 고맙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다투지 말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간 걸음이다. 아버지를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하나였음이다.
영정 사진 속 아버지는 건강하고 편안한 얼굴로 웃고 있다. 아버지와 내가 닮은 데가 있나. 마지막 뵌 게 언제였더라. 그래, 언니 장례식장에서였구나. 장례식장 의자에 앉아 두서없는 생각들이 들락거린다. 아버지 소식은 사촌 언니를 통해 드문드문 전해 들었다. 뇌졸증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고, 일 년 전부터 요양원에 계신다는 소식도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뵙고 오자고 가족들과 의논하던 차였다. 코로나19로 요양원에서도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 형편이라 차일피일 미루었다.
한적해진 빈소에 앉아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이 커가는 얘기를 나눴다. 혈육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단절됐던 시간이 무색하다. 많은 이야기 끝에 우리 모두의 교집합, 아버지를 떠올린다. 같이 살아온 자식이나 멀리 떨어져 산 자식들이나 온전히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삶은 어느 곳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상한 일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들이 한자리에 모일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조용히 웃고 있다.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손님처럼 집에 다녀갔다. 집안에 일이 있거나 친척집 대소사에 다니러 왔다. 서울 사람,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서울에서 온 손님 같아 조심스러웠다. 툇마루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광낸 구두와 안방 벽에 반듯하게 걸어놓은 양복이 멋지면서도 낯설었다. 양복에 먼지를 털어내는 아버지 뒷모습은 떠나려고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는 흙먼지 날리는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며칠을 지내고 떠났다. 자신을 원망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과 켜켜이 쌓인 일상의 무게를 피해 떠났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처음 집을 떠나던 이십 대 가장의 어리고 비겁한 그 마음 그대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자라면서 평범한 아버지를 꿈꿨다. 딸 바보인 아버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육성회장직을 맡고 딸의 뒷배가 돼주지 않아도 된다. 촌부로 가난하더라도 가족 곁에 있는 아버지, 밭일로 거칠어진 손을 비벼 딸의 언 손을 녹여주는 아버지, 기특하다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이길 바랐다. 딸들 결혼사진 속에 앉아 있는 아버지는 의무적이면서도 무표정했다. 그 표정 뒤에 숨겨진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모르는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당신이 살았던 날들 속에 이 막내딸이 애틋했던 적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후회된다. 아버지 덕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아이들 낳고 잘 살아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감사하다고, 왜 좀 더 일찍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살아있을 때 울고불고해서라도 내 마음을 전할 걸, 철없이 응석이나 부려 볼 걸 했다.
자식에게 부모는 인연의 시작점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인연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믿음은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다. 겨울철 보리밟기처럼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다져주는 힘이다.
아버지의 삶은 자식들의 삶에 무늬를 만든다.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행복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러는 부모를 향한 미움과 원망과 증오를 하며 되레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만든다. 아버지의 삶과 마주하면 그도 상처받고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아버지는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사는 형편이 다르고 삶도 제각각이라 자식들의 마음속에 ‘아버지’라는 이름은 만 개의 꽃으로 핀다.
눈이 녹아 어느 날은 비가 되겠지. 안개가 되고 작은 물방울로 머물러도 물은 결국 첫눈의 기억을 잊지 않을 것이다. 견고한 인연의 고리 안에서 시절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날 것이다. 아버지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는 평범한 아버지와 딸로 만나길 기도한다. 시린 날 첫눈 같은 인연이 아니라 봄날 햇살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