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망원동에 금성당(錦城堂)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샤마니즘 박물관장 양승종 박사의
<마포 금성당 흔적>이란 논문에서 처음 밝혀졌다.정작 마포 사람들은 금성당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겨우 이곳 망원동에서
태어나서 50여 년을 살았던 사람 중에는 금성파출소가 있었는데 망원지구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우연히 망원1동 재개발조합 사무실에서 금성당을 잘 알고 있다는 분을 만났다.마지막 금성당 당주와 육촌관계로 올해 80세인
김준남씨를 만났다.김준남씨에게서 금성당의 내력과 마지막 금성당의 흔적을 들을 수 았었다.
금성당의 위치는 망원1동 239번지 2~4호에 있었다고 한다.이 지점은 합정동 457번지 1호에 소재하고 있는 망원정과 마주
하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가운데로 길이 생겨 한쪽은 망원동으로,한쪽은 합정동으로 동명이 바뀌어졌다.이 금성당의 터는
국유지였으며 금성당의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고 교회에 신도가 없어 민간인에게 팔렸고 지금은 I-PARK아파트가 들어서서
금성당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김준남씨의 기억으로는 금성당의 근처에 수백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은행나무 주위에는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낭당에는 금줄이 쳐 있었으며 길을 걷던 여인들이 조그마한 돌을 한 개 얹어 놓고 합장을 했다고 김준남씨는 말한다.
은행나무 옆에는 아주 오래된 석조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보질 못했다고 했다.그리고 자신은 보지 못했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찾아와서 기도하는 석조불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이 불상은 1952년 큰 장마에 따내려
갔다고 한다.불상 밑으로는 완만한 낭떠러지였으며 그 밑으로 조기잡이 배 수 십 척이 정박해 있었고 자유당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한강을 건내주는 황포돛대가 여러 척 있었다고 한다.
동남향으로 지어진 금성당은 약 40여 평으로 둘레에는 사각형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돌담이 있었으며 담은 흙 담으로 듬석듬석
돌이 들어 있었다.안으로 들어가면 안채와 바깥채로 나뉘어 있었다.바깥채는 출입문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돌담이 조성돼 있었으며
정원 쪽을 보면서 오른편에는 20여 미터 크기의 전나무와 상나무들이 있었다고 한다.
안채에는 금성님과 용왕님 삼불재석 맹인도사 등 다섯 개의 탱화가 있었고 바깥채에는 칠성님과 맹인삼불도사 탱화들이 모셔져
있었다고 했다.또한 열 평 정도 방에는 물고를 받으러 전국에서 몰려든 무당들이 와서 기도하고 쉬는 큰 마루가 있었다고 한다.
김준남 씨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금성당의 내력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포나루에는 많은 배들이 한강을 메우고 있었다.밍원동에는 한강을 건너는 배들이 있었는데 관에서 운영하는 관선이
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사선이 있었다.뱃삯은 낮보다 밤이 더 비쌌으며 이용자에 따라 요금도 각각 달랐다.관에서 설치한 나루터의
사공은 진부(津夫)라고 하였으며 큰 배를 서너 명의 사공이 부릴 때 그 우두머리를 '도사공'이라 불렀다.진부들은 민간인의 배가
뒤집힐 때 인명구조 활동을 했다.
망원동에서는 공동으로 배를 마련하고 사공을 두었다.사공은 마을 사람들이 지어준 '사공막'에서 살았다.이들은 봄 가을로 곡식을
추렴해 삯으로 받았으며 외지인이 한강을 건널 때는 선가를 따로 지불하지 않았다.망원동 사공막에는 김 씨 성을 가진 40대
홀아비와 오씨 성을 가진 홀아비 두 사람이 살았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강건너는 사람들을 태워주는 뱃사공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집 앞에 있는 석조불상이
김 씨의 꿈에 나타나서 며칠 후에 금성님이 나타날 것이니 금성님이 이리로 모셔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김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씨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봄꿈은 개꿈이라며 들어주지도 않았다.김씨는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고 석조불상 앞에
가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비가 빨리 그쳐 배를 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더니 그렇게 많이 쏟아지던 비기 멈추었다.
두 사공은 비가 그치자 묶어 놓은 배가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았나 둘러보고 있었다.묶어 놓은 배 옆에 커다란 궤짝하나가
걸려 있었다.김씨가 오씨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여보게 저게 뭔가?"
"어디"
"저기. 저기"
김씨가 손가락으로 궤짝을 가리켰다.긴 쇠갈퀴로 길다란 궤짝을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하여 막대기로 끌어 올렸다.
"이거 보물 궤짝 같아"
"열어보세"
두 사공은 궤짝 뚜껑을 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나무가 물에 젖어 무겁기도 하지만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못을 여러 개가 꽂힌 데다가 녹까지 슬었기 때문이다.몇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궤짝 뚜껑을 여는데 성공했다.그렇지만 오씨가
뚜껑을 여는 순간 "귀신이다"하고 두 사람은 뒤로 넘어졌다.그 속에 비단에 색감으로 그려진 탱화(무속화)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들은 "귀신이다"하고 뚜껑을 닫고 뒤로 도망치다시피 하며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다시 일어나 도망치려고 해도 두 사람 모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앞으로 한 걸음도 갈 수가 없었지만 뒤로는 걸음을 뗄 수 있었다.그들은 다시 궤짝 있는 곳으로 가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김씨가 무릎을 치며 오씨에게 말했다.
"어저께 꿈에 석주불상이 나타나서 금성님이 오시니 그리로 모셔오라고 하지 않았겠나.그리로 귀신을 모셔가세."
"그렇게 하세"
물에서 건질 때만 하더라도 무거워서 두 사람이 들지도 못했던 궤짝이 한 사람이 들어도 무겁지 않았다.그들은 궤짝을 들어
석조불상 옆 산중턱 불상 앞에 두고 집으로 도망을 쳤다.그들은 궤짝을 괜히 물에서 꺼냈다고 후회했다.
그날 밤 석조불상 앞에 둔 궤짝에서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사람들은 잠자다가 하늘의 불기둥을 보고 하나둘 석조불상
앞으로 몰려들었다.석조불상이 아니라 궤짝에서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사람들이 궤짝을 빙 둘러 섰을 때에
불기둥은 없어졌다.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뚜껑을 열자 그 속에서는 무속도가 가득 들어가 있었고 촛대와 언월도
등이 들어 있었다.
귀신이 그려져 있는 탱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의논은 계속되었다.그러나 누구 하나도 앞장서서 처리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일단 비에 젖지 않도록 탱화가 든 궤짝을 옮겨놓고 동네사람들이 둘러 앉아 회의를 했다.그런데 나이가 제일
많은 어른의 꿈에 석조불상이 나타나서 궤짝 속에는 "금성님이시니 나의 바로 옆에는 사당을 짓고 섬겨라.그려면 마을사람들을'
지켜줄 뿐만아나라 국태만안이 될 것이다."고 현몽했다.그 이튿날 어르신은 동네사람들을 모아 놓고 간밤의 꿈이야기를 했다.
"이 궤짝에 들어있는 무속도는 보통 귀신은 아닌 듯합니다.우리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위해 신령님을 석조불상 옆에다가
모시는 것이 어떻겠오."
"그렇시다."
마을사람들은 사당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다.그로부터 마을사람들은 곡식을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소를 팔아 오는 사람도
있었다.또한 어떤 이는 머슴살이를 해서 모은 돈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온 동네 사람들이 석조불상
앞에 음식을 장만하고 장안에 유명하다는 무당과 보살들을 초대했다.면목동의 월정사의 보살 아현동의 백련사의 보살 번동의
김보살 화곡동의 하얀 동자보살 화양리의 미륵암의 보살 천호동의 선녀대신 이태원의 보연암 보살 아현동의 천도사 답십리의
장군보살 망원동의 은수보살 봉천동의 부암정사의 보살 화양동의 동자보살 이태원의 금강정사의 보살 송월동의 총각도사
가락동의 천지신명 등을 초대하여 재를 올리고 이들에게 누구를 그린 탱화인지를 물어보았으나 무속인들은 각기 달랐다.
어떤 이는 최영 장군이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남이 장군이라고 했다.결국 나중에 알고 계실 임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당을 짓기로 했다.
당은 35평 크기로 일자(一) 형으로 지었다.금성님과 용장군 칠성님 등 각각 걸었다.당의 주위로는 빙 둘러가며 은행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상나무를 심었다.이제 당을 책임지고 빌어줄 박수무당이나 무당을 찾는 일이었다.그날 밤 김씨의 꿈에 석조불상이
나타나 "무화의 그림은 금성님이시니 감악산에 가면 물고를 받으러 온 붉은 옷을 입고 고깔모자를 쓴 무속인이 있을테니
그 여인을 모시고 오라"고 현몽해 주었다.김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자 김씨에게 감악산에 가서 당을
모실 무당을 모셔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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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마포문화원이 발간한 마포구 자료총서 제 11집 <금성당은 살아있다>에서 옮겨온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