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포도주를 다오
감로주(甘露酒)가 아니다. 신포주를 우리에게 다오. 행복(幸福)한 주연(酒宴)에 초대된 저 사람들이 값진 술은 다 마셨다. 다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신 포도주 ─ 고난(苦難)의 언덕에서 목말라 하던 예수의 타는 그 입술에 쏟아 부었던 신포도주 뿐이다.
부드러운 양(羊)고기가 아니다.
남들이 다 뱉는 가시 많은 생선, 힘줄이 많은 질긴 고깃덩이를 다오. 우리들의 축연(祝宴)에는 등불도 밝히지 말 고 춤도 추지 말 것이며, 장고소리도 울리지 말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찢게 해 다오. 후회(後悔)와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가슴을 찢게 해다오. 자장가처럼 잠재우고, 머리를 쓰다듬는 위로(慰勞)의 말일랑 아예 거두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월계수(月桂樹)가 아니라, 야위어 가는 잡초(雜草)의 이파리 ─ 하늘로 치솟은 박수(拍手) 소리가 아니라 땅을 치는 통한의 소리이다.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소리.
세 해를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마시지 못하는 술, 씹을 수 없는 음식, 그리고 남들이 가꾸지 않는 찹조(雜草)의 천대를 우리에게. 남들이 감미로운 잠에 취해 있을 때 우리의 눈은 뜬 채로 그냥 있게 하고, 남들이 모두 넓은 행길에서 앞을 다투어 뛰어갈 때 우리의 육신(肉身)은 이 어두운 골목에 그냥 머물도록 하라
그러나 우리들의 이 잔치가 음침하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쓸쓸하다고 해서 눈살을 찌푸리지 말라. 우리는 당신들에게 엄지손 공주가 끝내는 행복을 누리게 된 동화(童話)의 성(城)을 지어주지 못했다. 든든한 갑옷을 입은 바보 온달(溫達)처럼 공주(公主)의 슬기로운 마음을 증명(證明)해 주지 못했다. 우리는 유리 구두를 들고 찾아온 신데렐라의 왕자(王者)가 아니다.
아 ─ 동화가 아니다. 해피 엔딩의 동화가 아니다. 먼지와 쓰레기를 치우는 하녀, 맨손으로 종기를 짜는 시골 의사(醫師), 남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문상객, 혹은 문신(文身) 속에 그려진 독수리,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병원(病院) 대기실의 의자(椅子)…… 그런 역할만으로 우리 예까지 왔노라. 헐떡이는 숨결로, 예까지 달려왔노라.
세 해를 맞는 이 잔칫상을 위하여, 감로주(甘露酒)가 아니다. 신 포도주를 다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문학사상』 1975. 10
마음꽃 피우기
나는 윙크하는 사람, 휘파람을 부는 사람, 미소짓는 사람, 감탄사를 발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윙크'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금방 바람결에 경쾌한 음악이 들려올 듯하다. 나는 과연 이제껏 몇 번이나 윙크를 해보았으며, 또 받아 보았는가. 윙크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늙어간다는 건 한심스런 일이다. 윙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열려 마음의 신호를 상대방에게 보내는 것이다. 자신이 이런 놀라운 표현법을 눈 감짝할 사이에 구사하는 것은 신통한 일이다.
한 별과의 눈맞춤도 수만 광년의 시·공간을 걸쳐 이뤄진다. 한 번의 눈맞춤을 위해 별빛은 우주에서 수만 광년 전에 떠나, 내 눈동자로 들어온 것이다. 찰나적이었지만, 영원 속에 이뤄진 것이다. 별과의 한 번 눈맞춤은 예사로운 일인 듯 싶지만, 기적 같은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윙크는 둘 만의 말없는 언어, 영혼의 교감이다. 4월의 숲속에선 죽은 듯이 거무죽죽한 나뭇가지에서 잎눈이 툭툭 피어 잎눈끼리 서로 윙크하고 있음을 본다. 탄생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눈맞춤이다. 꽃향기는 꽃향기끼리, 목련꽃은 목련꽃끼리 서로의 눈동자을 보고 있다. 풀잎 위 이슬은 이슬들끼리 영롱한 눈망울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윙크는 순수와 아름다움의 발견이다. 한 번 눈맞춤으로 모든 신경과 감정이 눈부셔 온 몸이 마비되고 마는 생명의 환희-. 말하기 전에 마음으로 다 알아버리는 기막힌 신비 교감이다. 눈맞춤 한 번으로 일생을 걸어도 좋을 숨막히는 끌림과 설렘은 무엇 때문인가.
`휘파람'은 말만 들어도 산뜻하다. 마음 속 풍금, 플루트에서 나는 소리다. 영혼이 내는 음(音)이다. 마음의 먹장구름을 걷어내고 찬란한 햇살과 푸른 하늘을 보여주는 바람이다.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면 근심이 걷히고 꽃향기가 흐른다. 산에 가보면 새들은 새들끼리, 매미는 매미끼리, 풀벌레들은 풀벌레들끼리, 바람은 바람들끼리 마음을 열어 휘파람을 불고 있다.
휘파람은 아름다운 생각들이 뿜어올라 누구에겐가 말을 건네고 싶은 몸짓이다. 말이란 발설하고 말면 퇴색되기 쉽다. 휘파람은 마음을 비추는 소리의 거울이어서 빛깔과 향기가 담겨 있다. 성찰과 명상이 어리고 내면을 향한 위로와 그리움의 손짓이 있다. 휘파람이 있는 풍경 속엔 평화, 새로움, 환희가 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에겐 휘파람을 불어보길 권하고 싶다.
`미소'란 말만 들어도 마음부터 따뜻해진다. 평온해지며 여유가 생긴다. 미소를 짓는 사람은 맑고 거룩하여서 악이 다가와 추근거릴 수 없다. 오랜 수령(樹齡)의 매화 향기가 나며, 감화와 평온을 선물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생각의 표정이지만, 마음이 어두우면 노을처럼 사라지고 만다.
젖내를 풍기는 아기가 품속에서 잠자코 웃을 때, 엄마의 얼굴엔 미소가 흐른다. 아기와 엄마는 살내음을 맡으며 가만히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마주 잡은 두 손은 서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심장박동을 함께 느낀다. 아기는 젖을 빨다가도 엄마를 보고 벌쭉 웃곤 한다. 이 순간, 아기와 엄마의 미소는 꽃보다 더 눈부시다.
미소는 착함(善)과 사랑의 표현이다. 어여쁘고 소중한 생각들이 산수유꽃처럼 툭툭 망울을 터트려 내는 생명의 빛깔이다. 눈보라 속에서 꽃눈을 틔운 깨달음의 꽃이다. 미소는 지을 때마다 점점 깊어지고 향기로워진다. 산사(山寺) 대웅전 석가모니불의 표정이 오묘한 것은 깨달음 속에 피어나 무상무념(無想無念) 속에 천 년을 미소 짓고 있기 때문이다. 미소를 띠우는 사람은 자비롭고 온후하다.
마음이 조급하고 성내길 잘하는 사람들은 자주 미소를 지어볼 일이다.
나는 감탄을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감탄을 잘 하는 사람의 표정은 순진하고 맑다.
`오!' `어머!' 이런 한마디 감탄사만으로도 기쁨을 준다. 물론 좋지 않을 때의 절규 같은 감탄사는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놀람, 반가움,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는 짧은 감탄사는 갓 핀 새싹이나 꽃의 표정 같이 감동을 안겨준다. 삶에서 감탄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을 맞는다는 건 축복이다. 기쁨을 동반한 뜻밖의 놀람이요, 삶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감탄해야 할 순간에도 감탄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해 보인다. 이것은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을 놓치고 마는 일이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 달쯤, 손녀 순실이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선 손녀가 할머니를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앙상하게 뼈만 드러난 늙고 병든 할머니가 시시각각 죽음 앞으로 다가서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순실의 입에선 `오!'하는 비통한 흐느낌이 새어나왔고, 눈에선 비감과 연민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녀는 할머니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갖다대며 `할머니!'하고 오열했다. 할머니도 손녀의 손을 잡은 채 `오!'하고 짧은 감탄사 속에 오래도록 포옹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86세의 할머니와 25세인 손녀는 `오!'라는 감탄사 한마디 속에 천언만감을 눈물로써 교환하고 있었다. 나는 가족과 친지들이 병문안을 와서 하는 위로의 인삿말을 들었지만, 이 때만 큼 감동적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크고 중대한 일에만 관심을 가져서 작고 사소한 일에는 좀체로 감탄하지 않는다. 관심을 두고 살펴보면 감탄할 일이 수두룩하다. 친지 중의 누가 새 학년이 되고,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새 치아가 돋고, 집에 난초꽃이 피고, 새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딸,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아들의 표정, 사라져가는 저녁노을,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정원의 신록!
얼마든지 감탄할 일이 많건만 감정이 무디어져 좀체로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 무덤덤하고 삭막한 마음이 돼버렸다는 건 슬픈 일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맑은 눈을 가져야 감탄할 수 있다. 마음속에 좋은 악기 하나씩을 간직하여서 감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연주하고 맑은 소리를 잘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 한다. 감탄사가 많아야 아름답고 풍부한 인생이며, 감탄사가 없는 세상은 각박하고 삭막하다. 삶은 감사의 발견일 수도, 고통의 발견일 수도 있지 않은가.
윙크, 휘파람, 미소, 감탄은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마음의 꽃눈이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일이다. 그 꽃을 잘 피워서 인생을 향기롭게 하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며 몫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윙크하는 사람, 휘파람을 부는 사람, 미소 짓는 사람, 감탄사를 발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지은이: 정목일
출처 : 『 마음꽃 피우기 』
<단풍의 산길>
서리 내린 가을날
산길을 가면
찬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고요
찬바람을 타고서
단풍잎들이
사뿐사뿐 길 위에
떨어집니다
바람찬 가을날에
산길을 가면
쓸쓸히 들국화만
피어있고요
떨어진 단풍잎을
밟아서 가면
단풍의 붉은 길이
열리입니다
―목일신(1913∼1986)
<작은 들꽃> 7
가을날
대지에 살랑거리는 노란 너를 보고
나는 사랑을 알았세라
빛과 바람에 닦이어 가는 너를 보고
나는 그리움을 알았세라
구름과 그늘, 어둠에 가려져 가는 너를 보고
나는 이별을 알았세라
그 이별을 보고
이별이 얼마나 애절한 것인가를 알았세라
아, 그 애절한 이별을 보고
인생이 그러하리라, 나는 알았세라.
-- 조병화-
시월도 중순, 구절초 하얀 꽃이 가슴을 파고 드는 계절입니다.
지난 10월 10일 저녁 이래, 세상이 갑자기 꿈틀대고 있는 듯 싶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한국인 여성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온 매스컴이 노벨문학상과 그 수상자 한강 작가에 대한 기사로 덮였습니다.
모처럼 노벨문학상이 즐거움의 불꽃이 되어 한국 전체를
환희 속에 빠트려놓았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시월들어 두 주일을 보내고서야 갖게 되는 유정독서모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날짜: 2024.10.17. 18:00~20:00
장소: 커먼즈 필드
읽을 작품: 김유정 작 < 슬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