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34 #축생의고통 #빈곤과굶주림 #밥이우선 #당신이관세음보살
나. 아귀와 축생의 고를 제거하기를 원한다
10:16 잡아먹힐까봐 움츠리며 떨고 있는
모든 축생들이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굶주린 아귀 귀신들은
북구로주에 사는 이들처럼 행복해지게 하소서!
#축생의고통
인간은 동물입니다. 하지만 축생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동물 중 특별한 조건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렵채집을 하던 시대의 인간들은 비록 직립을 했지만, 여전히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여타 모든 축생들처럼 항상 잡아먹힐까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인스타브레인>에서는 호모사피엔스 시절, 인간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가 타살이었다고 합니다. 두개골 측면에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강타당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염병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 원인이 바로 같은 인간에게 두드려 맞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일이죠?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 시점에도 지구의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빈곤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인류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드디어 먹는 것이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을 때려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이제는 남은 생에 여유가 부족할까봐 경쟁을 하는 것이지, 당장 내일 굶어 죽을까봐 다투지는 않는 시대입니다.
정신의 직립이 이루어진 것,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인류 차원의 문화를 축적했고, 이를 무기로 삼아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먹고 사는 문제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하지만 다른 모든 축생, 심지어 만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조차도 이 음식에 대한 쟁탈의 굴레를 벗지 못했습니다. 고통 중 가장 극악한 고통으로 손에 꼽히는 굶주림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항상 두렵고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음식을 얻지 못할까봐, 누군가에게 내가 죽어 음식이 될까봐.
#빈곤과굶주림
<금강경>을 잘못 해석하여 오해하는 분들이 재보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재보시보다 무외보시와 법보시가 더 수승한 공덕이 있다는 논리에 사로잡힌 편견의 부작용입니다. 모든 보시의 공덕은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자에게는 밥 한끼가 목숨인데, 이것을 공양한 것이 큰 부자가 멋진 사찰을 공양한 것보다 과연 공덕이 작을까요?
재보시의 재란 재산입니다. 요즘은 돈이라고도 표현하고, 자산이라고도 합니다. 그거 아시나요? 돈은 곧 수명입니다. 돈은 시간을 담아 거래하는 도구이고, 이 시간이 인간에게는 수명이자 생명입니다. 그렇기에 이 돈을 팔아서 음식이라는 생명 유지의 원동력을 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다른 모든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돈은 수명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돈을 보시하는 것, 이것이 과연 목숨을 보시하는 것과 비교하여 무시 당할 만한 작은 공덕인가요?
<탈무드>에서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으로 '빈곤'을 꼽습니다. 유대인들이 돈돈돈 하다가 유럽인들에게 공분을 사고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자본주의 시대의 리더가 된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탈무드를 정신의 밥으로 삼아 공부하니까요. 불자들은 돈 그리고 빈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 빈곤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돈, 재산을 보시하고 나누는 공덕은 매우 큽니다. 다름 아니라 이를 받는 이에게 수명을 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빈곤의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때문입니다.
축생의 세계에 만연한 고통, 윤회계 속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이 빈곤과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하고 싶다면 당연히 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공덕을 회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벌고, 모아서 이를 바탕으로 나와 주변 그리고 세상을 빈곤으로부터 구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간과된다면 불교는 현실 속에서 항상 무력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10:17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손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의 물줄기로
아귀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고 목욕하며
항상 상쾌하고 청량함을 얻게 하소서!
#밥이우선
밥이 우선입니까? 법이 우선입니까? 진리가 아무리 귀해도 굶주린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음은 커녕 귀조차도 열리지 않는 진리로 그들을 돕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종교는 최우선적으로 자선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빈곤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먼저 밥을 주고, 손을 잡으며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리 즉, 법은 그 다음입니다.
간절한 기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이들에게 기도문을 읽어준다면, 속으로 욕을 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호모 사피엔스 시절이었다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때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들에게는 항상 밥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이, 사람구실을 못하는 경우에는 이 밥을 나눠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타인의 밥을 빼앗아 먹어야 하는 신세입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간이 없어서 불가능한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 조건이 해결될 때까지 세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경우, 이것은 그저 해태한 것입니다. 사실 해태를 넘어 주변과 세상의 수명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핑계 없이 예외 없이 자기 입벌이는 자기가 하는 것이 성인입니다. 그리고 이 힘을 키워야 세상을 빈곤으로부터 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도 당장 굶어서 생명을 잃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정신의 식사인 법은 배부른 다음 필요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손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의 물줄기란 다름 아니라 밥과 법입니다. 밥이 필요한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는 밥, 법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법을 주는 것이 바로 지혜이고 자비입니다.
#당신이관세음보살
이제 곧 송덕사에서는 극락김치 봉사가 시작됩니다. 붓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한다는 서원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부끄럽게도 일년에 한 번 이웃들에게 조금의 음식을 나누는 행사를 합니다. 또한 온전히 이웃을 위한다는 생각보다는 행보리심을 실천하기 위한 기회를 만든다는 마음가짐이기에, 보살행에 대한 이기심도 약간은 섞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 속 실천의 기회는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실천 없는 서원은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향후 몇 년간 펼쳐지게 될 경제위기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빈곤의 감옥에 갇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불자들이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더불어 세상의 빈곤한 이들이 수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손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수명에 해당되는 자산과 이것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보시바라밀의 마음입니다. 보리심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당신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니, 부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세상에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