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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부원군(西源府院君)약포(藥圃)정탁(鄭琢)선생의 영정(影幀) 보물 제487호
안동유교박물관 소장
1604(선조 37)년에 호성공신 3등 책록을 기념하여 선조의 왕명에 의해 그려진 정탁(1526~1605)의 공신상
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의 해월종택 해월헌(海月軒)의 현판 : 제 해월헌(題 海月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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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 정탁(鄭琢, 1520 ∼ 1605, 중종 21 ∼ 선조 38) 선생은 본관(本貫)이 청주(淸州)이며,
호(號)는 약포(藥圃)이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문인(門人)이다.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2(선조 5)년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1583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예조,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天文地理), 상수(象數),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正統)하였으며,
1594년 곽재우(郭再祐: 홍의장군),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名將)을 천거(薦擧)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듬해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을 때,
이 해 3월 옥중(獄中)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建議)하였다.
1600년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昇進)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源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약포집 속집 제4권/부록(附錄)/ 약포 선생 행장 -[황여일(黃汝一)]| 정탁 약포집
유명 조선국 충근정량 호성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서원부원군 약포 정 선생 행장〔有明朝鮮國忠勤貞亮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西原府院君藥圃鄭先生行狀〕 [황여일(黃汝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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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皇明) 만력 33년 을사(1605, 선조38) 9월 19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공(鄭公)이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부음을 듣고 상이 크게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조문(弔文)과 부의(賻儀)를 하게 하였으며, 예조 좌랑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듬해 병오년(1606, 선조39) 2월 21일에 예천군(醴泉郡) 남쪽 위곡(位谷) 간좌(艮坐) 곤향(坤向)에 장사를 지냈다. 상이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내려 주라고 하였고, 귀후서(歸厚署)의 관원에게 명하여 상(喪)을 치르게 했으며, 승문원 관원에게 신주(神主)를 쓰게 하였으니, 모두 특별한 예우였다.
어질고 효성스러운 아들 윤위(允偉) 등이 복(服)을 마치자마자 묘도(墓道)에 빠진 것이 있다고 하면서 변변찮은 나에게 공의 행장을 지어 당대 문장을 지어 남길 사람들이 채택케 할 것을 부탁했다.
나는 학식이 부족하여 감당하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다만 평소 공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또 외람되게 인손(姻孫 손녀사위)이 되었으니, 어진 효자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분수와 의리로 헤아려 볼 때 또한 사양할 수가 없는 사정이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씨(鄭氏)는 서원(西原)의 대성(大姓)으로, 세간에서는 이른바 갑과 을을 겨루는 집안이다. 그 선조는 고려조에서 대를 이어 드러난 벼슬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더욱 유명했던 분들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휘(諱) 의(顗)는 고종(高宗)을 섬기면서 최광수(崔光秀)를 주살(誅殺)하고, 벼슬이 대장군과 위위경(衛尉卿)에 이르렀으며, 부절(符節)을 가지고 필현보(畢玄甫)를 효유(曉諭)하러 가서 사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고 죽은 뒤에 사관이 〈충의전(忠義傳)〉에 기록하였다.
휘 해(瑎)는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와 연영전 대사학(延英殿大司學)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장경공(章敬公)이다. 19세에 급제하고 마침내 원대한 기량을 이루어서 세상에 회자(膾炙)되었다.
휘 오(䫨)는 벼슬이 사도(司徒)에 이르고 서원백(西原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극공(文克公)이다. 일찍이 자호를 설헌(雪軒)이라 하고 아우 설곡(雪谷) 정포(鄭誧)와 함께 보조(步調)를 나란히 하여 영채(英彩)를 드날렸으나, 중도에 참소를 받고 모두 방출되어 형은 영해(寧海)에, 아우는 울주(蔚州)에 부처(付處)되어서, 당시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 뒤에 다시 서용되었고, 설곡도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곧 청원군(淸原君) 문간공(文簡公) 정추(鄭樞)의 아버지이시다. 설헌이 돌아가시자 안동(安東)에 장사 지냈는데, 이는 어머니 김씨(金氏)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김씨는 중찬(中贊) 상락군(上洛君)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손녀이자, 판삼사사(判三司事)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따님이시다. 그리하여 안동에 거주하였으며, 또한 안동인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太宗) 때 벼슬한 휘 약(若)이 형조 도관(都官)의 좌랑(佐郞)이 되었다. 이분이 휘 보문(普文)을 낳았는데 장사랑(將仕郞)이고, 부인(夫人) 진보 이씨(眞寶李氏)는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 참판에 추증된 이정(李楨)의 딸이자, 퇴계 선생 문순공(文純公)의 종조조고(從祖祖姑)이다.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다. 이분이 휘 원로(元老)를 낳았는데, 장수 현감(長水縣監)을 지냈으며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曾祖)가 된다.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개성 유후(開城留後)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의 손녀이시다.
조(祖) 휘 교(僑)는 성균관 생원으로서 숭정대부에 추증되었으며 부인 광주 김씨(光州金氏)는 군기시 정 겸 교서관 판교(軍器寺正兼校書館判校) 김경광(金景光)의 따님이시다.
아버지 이충(以忠)은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청성부원군(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淸城府院君)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평산 한씨(平山韓氏)는 고려 예의 판사(禮儀判事) 한철충(韓哲沖)의 후손으로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삼세(三世)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의 귀함 때문이었다. 공의 조고 사세(四世)는 모두 덕을 숨기고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길에 나간 이가 있어도 크게 되지 못하였다.
청성군(淸城君)은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여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과 거슬리는 일이 없어서 향당(鄕黨)에서 도리가 있는 사람으로 칭송하였고, 쌓인 원망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고 올곧아서 구차하게 먹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될 후손이 있을 것을 알았다. 가정 5년 병술(1526, 중종21) 10월 초8일 무오(戊午)에 예천(醴泉) 금당리(金堂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함이 남달랐고, 듣자마자 기억하여 청성군이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했다. 9세에 어머니상을 당하였고 21세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아래에서 여막을 짓고 상을 마쳤다. 처음에 중부(仲父) 삼가 현감(三嘉縣監) 이흥(以興)에게 수업하여 경서(經書)의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가정 임자년(1552, 명종7)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1558, 명종13)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바로 우리 명종(明宗) 때이다. 교서관(校書館)에 분속되고 성천 교수(成川敎授)에 제수되었다가 뒤에 진주 교수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운각 박사(芸閣博士)를 거쳐 호송관(護送官)으로 나갔다.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언사(言事)로 파직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정언에 서용되었으며, 예조 좌랑을 역임했다.
정묘년(1567, 명종22) 봄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으니 바로 우리 선조(宣祖)가 즉위한 원년(元年)이다. 병조 좌랑ㆍ형조 좌랑과 병조 정랑ㆍ형조 정랑ㆍ예조 정랑을 역임하고, 사간원 헌납ㆍ사헌부 지평으로 전직(轉職)되었으며, 다시 수찬ㆍ부교리ㆍ교리가 되었다. 이후 5, 6년 동안 연이어 삼사(三司)를 출입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고, 만력 계유년(1573, 선조6)에 이조 정랑을 거쳐 의정부 검상과 사인을 역임하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겼다. 갑술년(1574, 선조7) 가을에 부응교를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 제수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8)에 도승지에 전직되었다. 병자년(1576, 선조9)에 사의(辭意)를 표하여 체직되어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10) 겨울에 예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묘년(1579, 선조12) 봄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도승지가 되었다. 경진년(1580, 선조13) 8월에 가선대부로 승차되고, 그대로 도승지를 겸대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겨울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특명으로 자헌대부로 승차되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에 황경(皇京 북경)으로 사신을 나갔다가, 계미년(1583, 선조16) 봄에 복명(復命)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예조 판서와 사헌부 대사헌에 배수되고, 조금 있다가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이해 여름에 사의를 표하여 체직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21) 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고, 겨울에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또 사면(辭免) 되었다가 9월에 바로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특별히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우의정의 직함을 빌려 다시 황경으로 사신을 갔다. 경인년(1590, 선조23) 8월에 돌아오면서 서울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대간들의 논의로 탄핵을 당했는데, 이는 처사 최영경(崔永慶)의 아우 여경(餘慶)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실로 10년 전 공이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였다. 그러나 공이 진실로 이 사실을 몰랐는데도 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핑계로 배척한 것이다. 겨울에 지중추부사에 서용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옮겼다.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우찬성에 제수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찬성으로 옮겼다. 임진년(1592, 선조25) 여름에 겸 내의원 제조로 어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갔다. 을미년(1596, 선조28) 2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에 특진되었고, 5월에 체직되어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겨울에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화락하고 신조가 돈독하고 확실했다. 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으나 그 마음은 순금처럼 순수했고, 체구가 보통 사람보다 크지 않았어도 마음속은 교악(喬嶽)처럼 우뚝하였으며, 시세(時世)에 휩쓸리지 않고 명리(利名)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퇴(進退)의 의리와 이험(夷險 순경과 역경)의 한결같은 절개(節介)는 비록 천품(天品)이 빼어났기 때문이지만 그 행적을 상고해보면 또한 직접 배우며 보고 느낀 점도 있었으니, 일찍이 퇴계 이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그 문하에 출입한 지가 거의 20여 년이 되면서 내면을 향한 진실과 실천 공부를 들은 것이 있었다. 진주에 교수로 가 있을 때도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을 찾아가 배웠는데,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여 남을 허여하는 일이 드물었으나, 공과 함께 수창할 때에 (남명이) 도를 지키고 뜻을 길러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 버티고 서 있는 듯한 기상을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일생의 정력(定力)이 절로 동류배(同流輩)와 차이가 생겼다.
명종(明宗) 말년에 정승의 지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청의(淸議 올바른 의론)를 다시 회복하여서 공이 언로(言路)에 들어갔는데, 일을 만나 과감하게 바른말을 하여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으니, 앞뒤로 윤원형(尹元衡)ㆍ이감(李戡)ㆍ윤백원(尹百源)ㆍ심통원(沈通源) 등을 논핵(論劾)했다. 논사(論思)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선행을 진술하고 사악을 막으며, 충성을 다하고 생각한 바를 다 말하여, 상(上)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주로 삼았고, 상 역시 자신을 비우고 즐겨 들어 마음속으로 중요하게 여겨, 이로부터 임금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임진년에 왜구가 서울을 핍박하자 도성(都城)을 엄중히 경계하였고, 그 해 4월 29일에 상이 서쪽으로 행행(幸行)하자, 공은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로서 내약방(內藥房)에 나갔다가 곧장 대가를 호종하였다. 이날 바람이 크게 불고 비가 내렸는데, 또 대가가 뜻밖에 나가서 온 조정이 참담해 하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비록 측근의 언관들까지도 대부분 몸을 숨기거나 뒤처졌다.
5월 7일에 상이 평양에 당도하니, 부로(父老)가 감읍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분발하기를 생각하였다. 상이 또 영변부(寧邊府)로 옮겨가려고 하자, 공이 정원(政院)에 나아가 성을 지킬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왜적들의 침략을 받아 구차하게 한 모퉁이의 땅을 보전하고 있으니, 신은 통곡을 이루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 돌이킬 수 없지만 다행히 이 곳 영변부는 성곽이 그런대로 완고하고 부고(府庫)도 지탱할 만합니다. 패강(浿江 대동강)의 물은 이른 바 천혜(天惠)의 참호(塹壕)이고, 백성들도 힘써 만류하며 모두가 적개심을 품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일(李鎰)이 이끄는 병사들이 이미 당도하였고, 명나라 군대도 장차 멀지 않아 구원하러 올 것임이겠습니까. 중흥의 공을 당장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대사를 그르치게 됩니다. 지금 만약 한 번 움직인다면 이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고, 흉적(兇賊)이 추적해 오는 칼끝도 아마 막지 못할 것이니, 도중의 예측하지 못할 변고도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더러 상에게 어가를 옮기자고 청하는 자들은 너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상의 생각이 이미 결정되어서 윤허를 받지 못했다.
13일에 상이 영변부(寧邊府)에 이르렀는데, 이민(吏民)이 먼저 무너지고 큰 성에는 사람이 없어서 마침내 분조(分朝)의 의논을 건의하여 상은 의주(義州)로 갔고, 동궁(東宮)은 강계(江界)로 향했다. 공은 동궁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사(貳師)였기 때문이었으며, 영상 최흥원(崔興源)과 참판 심충겸(沈忠謙) 등이 따랐다.
희천(煕川) 지역에 이르렀을 때, 우상 유홍(兪泓)과 우찬성 최황(崔滉)이 뒤쫓아 와 대조(大朝)에게 치계(馳啓)하고 춘천으로 길을 바꿨는데, 산골짜기 길이 매우 험하여 온갖 고난과 위험을 겪고 이천현(伊川縣)에 이르니, 동쪽 길은 통하지 않고 적병(賊兵)은 점점 다가와서 다시 동궁을 모시고 밤에 벽현(壁峴)을 넘어 성천(成川)으로 향하였으나, 또 들으니, 북로(北路)의 적(賊)이 화유현(火遊峴)을 뚫고 왔다고 하여 급히 안주(安州)로 향하였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이 많이 내려서 일행은 고통을 겪었다. 이때 강도(江都)로 가자고 주장하는 의논이 있어 강화부로 향하기를 청하여 용강(龍岡)에 이르니 강나루에 얼음이 얼어 배가 통행하기 어려워서, 며칠이 지나 용강에서 영변으로 향했다.
계사년(1593) 1월에 공은 동궁에게 명을 받아 안주(安州)에 있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에 나아갔다. 7일에 제독이 바로 평양을 쳐서 적을 거의 다 소탕하고 남은 적들은 밤에 달아났다는 첩서(捷書)가 올라와서, 동궁이 종묘사직의 신주에게 고했다. 정주(定州)에서 대가를 맞이해 배알하였다.
1월에 명을 받아 영위사(迎慰使)로 용천관(龍泉館)에 가서 머물다가, 4월 4일에 송 경략(宋經略)을 맞아 위로한 뒤에 복명했다. 이때 동행한 여러 재상들의 논의가 서로 달라서 공이 〈이동변서(異同辨書)〉를 지어 심충겸(沈忠謙)에게 보였으니, 대략적인 내용은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것도 같지 않다. 진실로 의리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 또한 의리일 뿐이다. 사람의 소견이 같지 않은 것이 무슨 흠이 되겠는가. 요순의 시대에는 도유우불(都兪吁咈)하면서 각자 좋은 말을 아뢰었지, 의견이 다르다 하여 혹 피한 적이 없었고, 궐리(闕里)의 문생(門生)이 함께 성인(聖人)을 배웠으나 저마다 자기 뜻을 말하였으니, 또한 뜻이 다르다 하여 혹시라도 숨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송조(宋朝)의 군현(群賢)도 다 같이 덕을 숭상하였으나 국정을 맡아서 일을 의논할 때에는 언론(言論)이 각각 다른 것을 꺼리지 않았다. 세상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도가 전해지지 않아 국사를 맡아 논의를 말할 때 자기주장을 세우는 사람은 적고 남에게 빌붙는 사람은 많다. 진실로 자기에게 이로우면 그 사람이 나쁜데도 도리어 아부하여 마침내 갑(甲)을 편들어서 을(乙)을 배격하게 되고, 왼쪽 어깨를 걷어붙이고 오른쪽을 공격한다. 선비의 습성이 날로 낮아지고 치도(治道)가 날로 저급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동궁께서 정무를 임시로 보아 드디어 분사(分司)를 만들었으니 시종관으로 명을 받은 자는 비록 파천(播遷) 중에 있더라도 진실로 소견이 있다면 각각 그 말을 진술하고 감히 숨기지 않는데, 그 이동(異同)에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뒤에 공에게 묻는 자가 있어 묻기를 “자네가 심모(沈某)와 일을 의논함에 있어서 화합하지 못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여, 공이 천천히 답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당을 짓지 않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도 옛날 도를 힘써 행하는데, 자네가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는가?”라고 하니, 의문을 가졌던 사람의 의혹이 풀렸다.
6월 11일에 대가(大駕)가 영유(永柔)에서 해주(海州)를 향했는데, 이때 공이 사명을 받고 의주(義州)로 나갔으니, 황조(皇朝)의 대소 장관(將官)을 전별하고 위로하는 일 때문이었다. 20일에 공이 비로소 의주에 당도하였는데, 대소 장관을 전별하고 위로하는 일을 이미 마쳤다. 이때 명나라 사신 사헌(司憲)이 뜻밖에 나와서 행재소에서 미처 영접을 하지 못하여 공이 임시로 원접사(遠接使)라 일컬으며 의주에서 수행하여 평산(平山)까지 가서 이항복(李恒福)을 만나 교체(交遞)하였다. 그러나 유지(有旨)에 “동궁(東宮)이 남하(南下)하니, 경은 종행(從行)하라.”라고 하여, 공이 서울에 들어와 복명하고 다음 날 호남과 호서 사이에까지 뒤쫓아 가서, 전주부(全州府)에 그대로 머물면서 해를 보냈다. 이때 좌상 윤두수(尹斗壽), 호판(戶判) 한준(韓準), 지사(知事) 이산보(李山甫), 병판(兵判) 이항복(李恒福), 대사성(大司成) 김우옹(金宇顒) 등이 따랐다.
갑오년 8월에 동궁이 상의 명을 받들어 서울로 돌아왔는데, 상이 10조(條)로써 선비를 취하고, 2품 이상으로 하여금 각각 알고 있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공이 맨 먼저 재주가 장수를 감당할 수 있다며 곽재우(郭再佑)ㆍ김덕령(金德齡) 등을 천거하였다. 이때 집정자 중에 적과 강화를 의논하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공이 차자(箚子)를 초(草)하여 입계(入啓)하려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왜노(倭奴)는 간사하니 병기를 거두고 소굴로 돌아가 강화를 청해도 오히려 믿을 수 없는데, 군대를 거느리고 국경을 압박하면서 우리와 강화를 할 것이다 한다면 이는 겁맹(劫盟)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오랑캐가 다시 마음을 내어 우리에게 무례(無禮)함을 가하여 행여 볼모를 청하거나 땅을 쪼개는 등의 말로 공갈과 협박을 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면 조정에서는 어떻게 응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가만히 천문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펴보아 인사(人事)에 참고하여 볼 때, 난을 평정하여 쇠망해가는 국운을 일으킬 수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으니, 세성(歲星 목성)의 색깔이 푸른 것이 그 하나요, 큰 나라가 원조하는 것이 그 둘이요, 백성들이 적을 토벌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 셋이요,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드는 것이 그 넷이요, 주사(舟師 수군)에 이순신(李舜臣)을 장수로 얻은 것이 그 다섯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왜적과 화평(和平)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서둘러 강화를 허락한다니 신은 참으로 애통합니다.”
이때 당시 의론이 일치되지 않아서 올리지 못했다. 11월에 상이 비로소 경연(經筵)에 납시어 《주역(周易)》을 강론하였는데, 공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있어 입시하였다.
을미년(1595) 1월에 공이 또 입시하였는데 이어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억울함을 다시 아뢰고 이어서 노수신(盧守愼)과 정언신(鄭彦信) 등을 언급하였다. 그해 2월에 공을 특별히 우의정에 제수하였는데, 하루는 입시하여 다시 기축년 옥사를 신원(伸冤)하였으니, 얼마 안 되어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황정욱(黃廷或) 부자(父子)의 옥사에 공이 위관(委官)으로 있었으므로 다른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윤허하여 정형(停刑 형문 정지)을 의논하여 다시 배소(配所)로 보냈다. 이에 간관(諫官)들이 금부(禁府)의 여러 당상(堂上)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황정욱은 대려(帶礪)의 훈신이다. 묘목(墓木)이 벌써 한 아름이나 되게 자랐으니 형신(刑訊)을 받고 죽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공이 이에 회계(回啓)하기를 “황정욱의 중죄는 비록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나, 성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셨으니 형옥(刑獄)을 흠휼(欽恤)하고 훈구(勳舊)를 보전하는 뜻이 지극합니다.”라고 하였다. 양사가 여러 날 합문(閤門)에 엎드려 위관이 가벼이 논죄했다는 실책까지 아울러 거론하여 공이 면직을 청했는데, 첫 번에도 윤허하지 않고, 두 번에도 윤허하지 않았다가, 공이 또 차자를 올려 극력 사직을 청하자 갑자기 체직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이듬해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석방하라는 은지(恩旨)를 특별히 내려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을 수합케 하였는데 이때 김덕령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 죄로 수감되어 있는 것을 공이 함께 논의하여 강력히 신구하니, 상이 석방하여 그로 하여금 힘을 펴서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7월에 이몽학(李夢鶴)의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김덕령이 관련되었다는 공초가 있었으나 일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공이 국청(鞠廳)에서 초계(草啓)하였으니, 대략은 다음과 같다.
“덕령이 비록 기록할 만한 작은 공도 없지만 병사를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일도 별로 없거니와, 호남의 역적이 반란을 일으킬 처음에 덕령이 원수(元帥)의 전령(傳令)을 듣고 그 날 병사를 조발하여 길을 떠났으나, 또한 배회(徘徊)하거나 관망(觀望)한 자취도 없습니다. 한갓 여러 적들의 입에 올랐다는 이유로 서둘러 엄중한 국문의 아래에서 지레 죽게 한다면, 죄명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국인의 의혹을 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혹이 조율되지 않아서 또 입계(入啓)하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 봄에 남방(南方)의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여 공이 차자를 올려 몸소 남하하여 인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겠다고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를 보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지극하구나. 마땅히 비변사와 의논하여 처리하라.”라고 하였으나, 비변사가 이원익이 이미 사도(四道)를 순무하라는 명을 받고 나갔는데, 대신이 일시에 내려가는 것은 일의 형편상 매우 난감하다는 뜻으로 회계하였다.
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가려고 청하는 것은 또한 소견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사이 들으니, 호남과 영남의 인심이 똑같이 무너졌으나, 호서와 호남이 더욱 심하여, 조정의 명령이 이로부터 통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만약 제때 어루만져 안정시키지 않는다면 형세가 흙더미가 무너지듯 붕괴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 조종(祖宗) 2백 년 동안 서로 전하여온 기업(基業)을 어떻게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방치하고서 손을 놓은 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초제(草製)의 신하에게 명하여 한결같이 육선공(陸宣公 육지(陸贄))의 고사(故事)대로 왕언(王言)을 제출(製出)하게 한 다음, 신으로 하여금 받들고 가서 조정의 덕음을 선포하여 제진(諸陣)의 장사(將士)를 위로하고 달래는 한편 겸하여 군민(軍民)의 부형을 위로하고, 그 자제들에게 두루 알리어 그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듣는 사람을 용동(聳動)시켜 무사(武士)를 불러 모아 대의(大義)를 효유하게 하소서. 신은 먼저 지킬 만한 산성을 점거하여 편의에 따라 오부(伍部)를 나누어서 적로(賊路)를 차단할 것이니, 아마 천에 하나의 도움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전일 외람되게 아뢴 뜻입니다. 조정에서 신이 노쇠하여 전진(戰陣) 사이를 돌진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애써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또한 배려가 지극합니다. 그러나 국세(國勢)가 이처럼 위급하고 신의 숨이 아직 붙어 있습니다. 근래 이원익(李元翼)과 권율(權慄) 등의 치계(馳啓)를 보면, 모두 민심이 흩어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징갱취해(懲羹吹虀)의 백성들이 적의 소식을 들으면 저절로 무너지는 것은 형세로 보아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데, 무너진 뒤에는 아무리 슬기로운 자가 있더라도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노둔하기는 하나 외람되이 대신의 뒤에 있는 만큼, 나라를 위한 단충(丹忠)은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이 신의 평소 축적한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변사가 또 이전에 아뢰었던 뜻으로 다시 아뢰어 공이 과연 가지 못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欺罔)하고, 적을 놓아 주고 토벌하지 않은 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공이 의계(議啓)하기를 “이순신은 오랫동안 주사(舟師)를 거느려서 변방 정세를 잘 알고 있어서, 일찍이 극적(劇賊)을 꺾고 위성(威聲)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적으로서 이순신을 도모하고자 하는 자가 진실로 하루도 마음에 잊은 적이 없습니다. 몇 냥의 황금도 쓰지 않고 우리나라가 갑자기 현륙(顯戮)을 가하는 것을 앉아서 본다면 저들이 반드시 술을 따르며 서로 경축할 것이고, 남방의 장사(將士)들이 이 때문에 맥이 풀릴까 매우 두렵습니다.
또 신이 삼가 〈주관(周官)〉 팔의(八議)를 살펴본 바 의공(議功)과 의능(議能)의 법이 있었습니다. 지금 순신은 큰 공을 이룩한 것으로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게 한다면, 조정에서 처리한 도리가 마땅함을 잃지 않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차자를 초(草)하여 올리려고 했으나 마침 이순신이 석방되어서 그만두었다.
기해년(1599) 4월에 왕세자를 모시고 수안군(遂安郡)에게 가서 중전을 문안하고 윤4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조당(朝堂)에서 방을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고 수의(收議)를 하였는데, 공이 의계(議啓)하기를 “정유년(1597) 왜적이 다시 침입하였을 때에 도하(都下)의 인심이 뒤숭숭하여 한 집안의 사람도 서로 보호하지 못하고 조사(朝士)들 역시 흩어져 낙오됨을 면하지 못했으니, 이는 처음 난리에 데어서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한 자가 대개 도적에게 더럽혀진 것입니다. 그 실상의 소재가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만약 하나로 묶어서 먼저 스스로 살 곳을 택하고 군부(君父)의 급함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목한다면 아마도 본정이 아닐 듯합니다. 더구나 초계(抄啓)하여 방(榜)을 붙여 보이던 날에 일이 황급하여 듣고 본 것이 사실과 달라서 간혹 잘못 수록된 사람이 있으니 여론이 억울함에 있어서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사면을 여러 차례 베푸는 데도 이들만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조정의 본의가 어찌 이들은 의논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이겠습니까. 이는 이 방을 붙이는 것은 상행(常行)의 법전이 아니어서, 애초에 계품하는 주사(主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애매하게 뽑힌 자는 진실로 의논드릴 수가 없으나, 물을 만한 것이 있는 자는 사정이 이와 같은 만큼 아마도 논의 대상에 넣어야 할 듯합니다. 큰 은택을 널리 베풀어 모두 탕척(蕩滌)한다면 일부(一夫)가 구석진 데서 울음을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왕정이 허물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큰 정책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공사(公事)는 우선 정지하라.”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이 전례를 들어 선영(先塋)에 귀성(歸省)할 것을 청하여 말미를 받아 남쪽으로 돌아갔다.
경자년(1600) 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지만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 장계를 올리니, 답하기를 “공의 장계를 보니 경의 뜻은 알겠다. 그러나 지금 국가에 일이 많아서 어려움과 위급함이 날마다 새롭게 발생한다. 안위(安危)의 책임이 오로지 대신에게 있는데, 경이 지금 병으로 사직하니, 내가 매우 서운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조리해서 빨리 올라와 내가 믿고 의지하려는 바람에 부응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이 또 장계를 올려 극력 사직을 청하니, 상이 억지로 불러 올릴 수 없음을 알고 공을 우의정에서 체직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로 옮기도록 윤허했다. 공이 가득 차면 넘친다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여 마음을 결심하여 물러나고자 했으나, 남변(南邊)에 아직 적이 주둔하고 있어서 상이 병야(丙夜)에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사직을 하고 돌아갈 때가 아니라 하여 마지못해 종사했다. 하지만 한 번 돌아간 뒤로는 시골에서 늙음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해 7월에 중전〔의인왕후〕이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 공이 통곡하며 병을 무릅쓰고 달려가고자 했으나 기력이 거의 다해서 가지 못했다.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할 때에 가서는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을 따지지 않고 나서서 조령 밑에까지 갔다가, 병이 위중해져서 장계를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하의 지극한 마음에도 지금 국모(國母)의 대상(大喪)을 당하여 끝내 달려가서 빈장(殯仗) 혼전(魂殿)의 곁에서 슬피 울지 못하니 천신(天神)의 벌을 받아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도 어렵거니와, 또 생각건대, 신의 나이가 75세여서 목숨의 한계가 거의 다해 다시는 전하의 용안을 뵐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특별히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세시(歲時)로 존문(存問)하고 음식물을 하사하게 하였다.
계묘년(1603) 봄에 치사(致仕)를 청하는 상소에 이르기를 “신의 나이가 지금 78세여서 이미 늙고 병들어 인사(人事)도 저절로 끊어지고 조정에 나아갈 가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추부(樞府)의 큰 직함을 띠고 있으니, 이곳이 아무리 일이 없는 한가한 부서라 하더라도 조하(朝賀)와 조참(朝參)만은 실로 불참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본부(本府 중추부)의 관함(官銜)은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서 대관(大官)으로서 조정에 출사(出仕)하는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신만이 출사도 하지 않은 채 관직을 띠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사체에 합당하겠습니까? 치사를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사관(史官)이 교서(敎書)를 받들고 와서 선유(宣諭)하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한 정탁에게 교서를 내리노라. 양주(羊酒)의 위문을 막 베풀어 한가한 중추부의 수장에 임명한 것은 호종의 공훈이 처음 확정된 만큼 북으로 올라와 동맹에 참여하기를 바란 것인데,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날에 갑자기 관직을 그만둔다는 주청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육정신(六丁神)이 끌어당겨도 뜻을 빼앗지 못하겠으니, 일세(一世)를 통틀어 진실로 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에 녹훈(錄勳)되어 충근정량 호성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서원부원군(錄勳加忠勤貞亮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西原府院君)에 승차되었는데, 공이 사사(辭謝)를 하니, 상이 또 교서를 내려 포장(褒奬)하였다.
을사년(1605) 봄에 상이 전교하여 지방에 있는 늙고 병든 훈신(勳臣)에게는 본도에 특명을 내려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을 주게 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기를 “지금 신의 나이 이미 여든이 차서 가물가물한 목숨이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이미 조하(朝賀)의 반열에 나가지 못했고 또 회맹(會盟)의 뒷자리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니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도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구차하게 전례를 끌어대어, 실제로 그런 일이 없으면서 헛되이 그 녹봉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참으로 그 명령이 늙은이를 우대하고 아랫사람을 친근히 하려는 지극한 인(仁)에서 나온 것인 줄 압니다. 실로 이것은 예전에 없었던 융숭한 은전으로서, 우러러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받았으니, 신은 참으로 감격에 겨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녹봉을 주는 의리가 신으로부터 잘못될까 염려되니, 신이 비록 지극히 우둔하나 어찌 감히 받아들이겠습니까?”라고 하니, 답하기를 “지금 경의 상소를 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경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으로서 전야(田野)에 물러가 있어서 내가 매우 애석해 하는데, 지금 또 녹봉을 사양하니 더욱더 서운하다. 본도에서 봉록을 지급하는 것은 참으로 훈구를 우대하자는 데서 나왔으니, 어찌 헛되이 받을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여 조정의 성대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소는 간절하나 결코 따를 수 없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 한결같이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았고, 관인(寬仁)하고 자애로워 물아(物我)의 간격이 없었으며, 몸가짐에 있어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단속하니 거만한 사람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했고, 있어도 없는 듯이 하니 명류(名流)들이 앞다투어 존경하였다.
남들과 사귐에 있어서도 오래도록 변함없이 공경하여, 비록 노복이나 하인들에게까지도 반드시 띠를 매고 보면서 털끝만큼이라도 업신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만물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개미 같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차마 다치게 하지 않았고, 선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남의 한 가지 기예와 재주라도 반드시 취하고 한 사람에게 다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의 선과 행실이라도 반드시 선양하여 오직 남이 알지 못할까 염려했다. 활달하고 기위(奇偉)한 사람과는 즐겨 함께 종사(從事)하였고, 화기(和氣)가 넘쳤으나 권세 피하기를 마치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하였고, 명성(名聲)이 독보적이었으나 사류(士類)를 접할 때는 예로써 대하였으며, 언론이 격렬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의리가 자명(自明)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군실(君實)의 말은 인삼 감초와 같다.’는 것이다.
이때 조정의 관료들이 당(黨)을 나누어 서로 공격하여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이라는 명색(名色)이 있게 되었으나 공은 무너지는 세파 속에 우뚝 서서 시종 편당을 짓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쪽을 출입하거나 저쪽을 출입하거나 구분 없이 무릇 어진 사람이라면 모두 형제처럼 친애하고, 고상한 척하면서도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기회를 틈타 한 시대의 이름을 취하려는 자는 공이 아주 미워하여 상대도 하지 않았다.
나라의 대사(大事)를 당해서는 대체(大體)를 우선하고 명분(名分)을 엄하게 했으며 국가 정책과 군사 작전은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하루 사이에 그렇게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털끝만큼 작은 일이라도 방심하거나 지나치는 일이 없어, 끝까지 궁구하고 귀신처럼 민첩하게 깨닫는 것이 사람들의 의표를 찔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가슴속에 항상 한 가지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간직하였다.”라고 하였다. 일을 만났을 때는 칼로 물건을 자르듯이 분명하게 결단을 내렸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가엾게 여겨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였으니, 이 덕분에 구제받은 사람이 많았다. 간혹 추향(趨向)이 다른 사람이 있어도 예측하지 못할 처지에 이르면 반드시 말하기를 “오직 약포 대감만이 나를 살릴 것이다.”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믿고 심복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이를테면 인자하여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미물(微物)에까지 미치었으며 믿음이 말보다 앞서고, 인정이 넘쳤다. 심지어 죄를 지은 자가 그 정상이 밝혀지면 애처롭게 여겨서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위에서 그 도를 잃어서 백성이 방향을 모르게 된 지가 오래다.”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형법을 우선하지 않고, 오직 덕화에 힘썼다. 이런 까닭으로 지나간 곳에는 인심이 더 오랠수록 더 잊지 못하였다.
임진년(1592) 종사(宗社)가 파천을 하고부터, 어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가서 위급한 상황에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에 죽을 힘을 다하여 노력했으며, 분조(分朝)하게 되자 이사(貳師)로 명을 받아 왕세자를 모시고 떠났는데, 호위(扈衛)하는 사람들이 대개 변복(變服)을 하고 숨어서 가며 간혹 뒤따라오며 관망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은 세자의 좌우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비록 매우 위급하고 창황한 즈음에 이르렀어도 복색(服色)을 바꾼 적이 없었으며, 간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이 답하기를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다면 보장하건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고, 만일 불행하게 되어 복색을 바꾸더라도 모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순탄함과 험난함을 똑같이 보고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참으로 맹자(孟子)가 이른 바 ‘이를 말미암으면 살아난다고 하여 의리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있고, 이를 말미암으면 환란을 피할 수 있다고 하여도 의리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공이 두 조정을 섬겨 처음부터 끝까지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지냈고, 앞뒤로 경연에서 거의 40여 년을 강론했다. 그 사이에 일에 따라 왕을 잘 인도하고 아름다운 계책을 건의한 것도 매우 많았으나, 공은 스스로 나라의 은택은 산처럼 무거운 데 보답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하며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혹시라도 나의 자손들이 내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알아서 이를 잘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부귀와 이달(利達)은 운명이므로 단지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 학자는 항상 먹는 것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말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추구하지 말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하며, 도가 있는 이에게 가서 질정하는 마음을 먹는다고 한다면 벌써 10분의 9는 완성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경학(經學)에 익숙했고, 천문과 지리, 역수(易數)와 병가(兵家) 같은 것도 널리 섭렵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팔진(八陣)과 육화(六花) 등의 병법에 대해서도 더욱 마음을 쏟아 남김없이 연구했으나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날 공이 정유재란을 당하여 다시 남하(南下)할 것을 청할 때 당시 연세가 일흔 둘로 비록 무부(武夫)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말안장에 기대었다. 공은 용감하게 곧바로 나갈 것을 생각하고 산성을 파수하며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대개 나라를 위하는 붉은 정성에서 우러나와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었으니, 평소 강구(講究)한 가운데 나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력 기축년(1589) 연간에 일본의 평적(平賊)이 현소(玄穌)를 보내와 통신사를 청하여, 조정에서 이해관계를 따져서 통신사를 파견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공이 항의하기를 ‘저 적은 흉역이 벌써 드러나서 통신을 하여도 쳐들어오고 통신을 하지 않아도 쳐들어 올 것이므로 통신을 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스스로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항의하는데, 당시 공과 같이 반론한 자가 약간 명이었다. 그 뒤 임진년 변란에서 종묘사직이 당한 치욕을 차마 말할 수 있었던가, 차마 말할 수 있었던가.
병신년(1596) 여름에 주상이 능침에 배알하러 가려고 하는데, 마침 하늘의 변고가 있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노(魯)나라에서는 생쥐가 재앙을 예시한다고 여기어 교(郊)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당 덕종(唐德宗)은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희생을 씻어놓고도 교사(郊祀)를 보류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대내(大內)의 곁에 우레가 재앙을 일으켜 사람과 가축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견고(譴告)한 것입니다. 주상께서 아무리 추효(追孝)하는 마음이 간절하시더라도 역시 하늘이 내린 경계를 삼가서, 때가 아니면 거둥하지 않는 의리는 아닙니다.”라고 하니, 상이 마침내 행차를 정지하였다.
7월에 난적(亂賊) 이몽학(李夢鶴)의 공초(供招)에 “5월에 능침을 배알하는 거둥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흉도들을 나누어 보내어 부거(副車)를 저격하려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기며 모두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당시 정사를 집행하는 사람이 사천(私賤)을 따지지 않고 섞어서 모집하여 포살수(砲殺手)로 삼고 즉시 양인(良人)의 신분을 허락하므로, 중외(中外)에서 상전을 배반한 노복들이 일시에 투탁하여 심지어 본래의 도청(都廳)에 주인을 고소하는 자도 있어서 유사가 그만 그 주인을 잡아다 죄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공이 이에 말하기를 “조정의 이 법은 한 때의 편의에 따라 오로지 군인 한 명이라도 더 얻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자(箕子)가 노복(奴僕)과 주인의 법을 설정하여 그 명분이 벌써 정해져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은데, 어디에 제 주인을 배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일 들어준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해칠 것이니, 윗사람을 해치도록 인도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말하기를 “사천(私賤)은 법으로 잡색군(雜色軍)에 충입(充入)하게 되어있는 만큼, 쓸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조련(操練)을 시켜서 상벌을 시행한다면, 무엇이 안 되어서 기어코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니, 의논하는 사람이 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고 정지했다.
또 군량을 계속 조달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여 직첩(職牒)으로 곡식을 모으자고 의논하였는데, 처음에는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나왔으나, 얼마 안 되어 4품 이하는 쇄출(刷出)하여 다시 종군(從軍)으로 돌리니, 그 뒤에 비록 고품(高品)의 실직(實職)으로 권유하여도 백성들이 응하는 자가 없는가 하면, 간혹 모곡에는 응하고도 직첩을 제때 받지 않고 간혹 직첩을 받고는 곡물의 원가(元價)를 갑절 징수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법도가 없어지고 백성들이 더욱 싫어했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또 훈권(勳券 공훈 녹권)으로 모집하고자 장차 계문(啓文)을 초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명기(名器)는 나라의 커다란 권리이고 벼슬을 파는 것은 한말(漢末)의 나쁜 정사인데, 지금 조정이 먼저 믿음을 잃어서 상직(賞職)의 한 조항은 벌써 쓸데없는 공첩(空牒)이 되었고 다만 공훈(功勳)이라는 한 길만이 훼손을 입지 않고 있는데, 지금 만일 편안히 앉아서 곡물을 바치는 무리들에게 공훈첩을 내어준다면 저 시석(矢石)에 임하여 만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아낸 자는 장차 어떻게 권장하겠는가. 예로부터 몇 말의 곡물을 바치고 공신의 반열에 참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이는 환제(桓帝)와 영제(靈帝)도 하지 않은 바이다.”라고 하니, 의논하는 사람들이 감히 한 마디도 다시 꺼내지 못했다.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일찍이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청탁을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공의(公議)가 있다면 마땅히 발탁될 것인데, 무엇하러 나를 찾아와 만나는가. 벌써 나의 문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웃마을에서도 모두 알았으니, 고인들의 사지(四知)도 오히려 속일 수 없는데, 더구나 열 눈이 보는 바를 가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그 사람이 낙담하고 갔다. 그 뒤에 공의로 발탁되었으나 마침내 등용되지는 않았다. 이로부터 잡다한 손님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문정(門庭)이 쓸쓸하여 새그물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맨 먼저 학교를 숭상하고 유생(儒生)을 존대하여 배운 것을 강론하게 하였으며, 평해(平海)에 순시를 나갔을 때는 어떤 정졸(庭卒)이 교생(校生)의 의건(衣巾)에 잘못 부딪쳐서 옷을 더럽힌 자가 있었는데, 공이 즉시 신장(訊杖) 30대로 다스렸으니, 내심 군수가 유관(儒冠)을 천대하여 이런 버릇이 있게 된 것을 의식하여 위엄으로 경계한 것이다. 여러 고을에서 이 소문을 듣고 고무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형옥(刑獄)을 더욱 꼼꼼히 삼갔다. 도내에 여러 해를 두고 쌓인 체수(滯囚 오래 구금된 죄수)를 차례대로 평반(平反 죄를 감해 줌)하여 모두 살려주니 온 도(道)가 흡족하여 ‘부처님〔佛監司〕’이라고 일컬었으니, 나라의 풍속에 인자한 사람을 부처에 비유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성천 교수(成川敎授)가 되었을 때는 향교 안에서 유래한 예전 규약에 새 교수가 부임하면 액내(額內)의 제생들이 각기 모두 주단(紬端)으로 속수(束脩)에 해당하는 폐백(幣帛)을 바치게 되어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교수는 제생들에게 사장(師長)이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어찌 재물로 예를 삼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통렬히 혁파하였다. 부지런히 글을 읽도록 하여 차근차근 힘써 나아가게 하니 선비들의 습속이 표범처럼 변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공이 이사(貳師)로서 동궁(東宮)을 모시고 이 고을을 지난 것이 벌써 3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당시의 유생들이 아직 살아있어서 앞 다투어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며 탄식하다가, 마침내 그 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큰 모임을 열고 고비(皐比 스승의 강학 자리) 좌석을 설치하여 서로 술잔을 들고 축수하며 온종일 즐기다가 파하니 이를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재란에 공의 집안 식솔들이 난리를 피하여 동로(東路)를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앞 다투어 광주리에 물건을 담아서 정성을 표하며 말하기를 “예전 우리 상공께서 우리 도에 관찰사로 부임하여 우리들에게 은덕을 베풀었습니다. 지금 다행히 공의 가실(家室)과 자제들을 보니 마치 우리 공을 뵌 듯하기 때문에 왔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에게 있어서는 모두 나머지기에 단서로서 말할 것도 못되나 또한 공의 혜택이 남에게 깊숙이 파고 들어가 남들이 사랑한 하나의 단서를 찾아보기에 충분하다.
공이 일찍이 교서원 정자(校書院正字)로 있을 때 어떤 일로 인하여 정승 이준경(李浚慶)을 배알했는데, 그는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아 한 번 보고 큰 그릇으로 여기어 남에게 말하기를 “정모(鄭某)는 암룡〔雌龍〕의 얼굴이니 이인(異人)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중국의 관상가가 와서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인인 군자(仁人君子)이니 음덕(陰德)이 있어서 만민을 구제할 상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이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천성에 근본하여 용모에 넘치고 덕우(德宇)에 나타나서 남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왔다. 비록 분조(分朝)를 하고 파천을 하는 즈음일지라도 한결같이 인심을 얻는 것을 중흥의 근본으로 삼아서, 지나는 고을에 비단 소민(小民)들만이 그리며 윗사람을 친할 줄 알뿐만 아니라 또한 장사(將士)들로 하여금 즐겁게 나아와 공적을 세우게 하였다. 정승에 오르자 서둘러 퇴직을 청하여 노성한 숙덕(宿德)이 포부를 크게 펼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니, 지각 있는 사람은 모두 탄식하며 안타까워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는 강절(康節)의 행와(行窩) 고사를 흠모하여 따로 남여(藍輿)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가 매우 가볍고 편리하였다. 꽃 피고 바람 부는 계절에 한 곳의 물가와 한 곳의 언덕이라도 완상할 만한 곳은 반드시 가서 소요하고, 간혹 서로 아는 선비나 벗과 함께 술잔을 들며 흥을 돋우었다. 그러나 항상 국사(國事)를 잊지 못하여 하나의 정령(政令)이라도 듣고 마음에 들면 반드시 기뻐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한 번의 거조(擧措)라도 혹시 실수가 있으면 근심이 얼굴빛에 드러났으니, 평생에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가정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임진년 이후로 능침(陵寢)이 모욕을 당하고 국치(國恥)를 씻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파서, 몸을 마치도록 음악을 듣지 않았고, 잉첩(媵妾)을 두지 않아서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사계절에 선조의 분묘에 반드시 직접 가서 둘러보며 성묘를 하는데, 당시 나이가 일흔 넷이었으나, 젊은이처럼 오르내리니, 고을 사람들이 의형(儀刑)만 바라보고도 공경심을 일으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여든 가까이 되자 각약증(脚弱症)을 앓아 비로소 직접 성묘할 수 없어서 명절이 되면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선조를 그리워하였다.
일찍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지금 시대에 시행할 만한 것을 발췌하여 하나의 의궤(儀軌)로 만들고 매년 봄가을 향회(鄕會)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조목을 관장하여 강행(講行)하게 하였다. 농상(農商)에 종사하는 천한 종들에게는 우리말로 번역하여 이해하도록 하고서 명분을 바로잡았다. 예양(禮讓)을 숭상하여 사생(死生)에 서로 구휼하고 급난(急難)에 서로 구제하며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따라 지금까지 폐지하지 않았으니, 인자하고 어진 사람이 있는 곳은 고을 풍속도 볼만하다.
내가 인손(姻孫 손자사위)이 되지 않았을 때에 공이 고을에 수령으로 있어서, 때때로 본제(本第)로 찾아가 공을 문안하였는데, 화기로운 광채가 얼굴에 가득하고 사기(辭氣)가 정밀하고 밝았으며, 거북이처럼 높은 나이에 학 같이 청수한 모습으로 풍도(風度)가 훤하였다. 다만 공의 자리에는 방석이 없고 침상에는 병풍이 없는 것만 보았으며, 외출할 때도 휘장 같은 도구가 없고, 남여(藍輿)를 끄는 하인도 네댓 명에 지나지 않아서 전부(田夫)와 야로(野老)들이 갑자기 만나면 대관(大官)을 지낸 귀인임을 모를 정도였다.
집안 식구들이 다만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에만 기대어 목숨을 부지했으나, 때로는 공이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집안이 가난하여 여러 차례 뒤주가 비었으나, 역시 개의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눈으로 본 것이고 남에게 전해 들은 것이 아니다. 만년에 이르러서 반드시 밤중에 이불을 끌어안고 묵묵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읽으며 용력의 바탕으로 삼았는데, 간혹 새벽에 이르기도 했다. 《소학(小學)》 한 책을 더욱더 가슴에 새기고 일찍이 말하기를 “허노재(許魯齋 허형(許衡))가 한 말이 있는데, ‘나는 《소학》을 신명같이 공경하고 부모처럼 존경한다.’라고 하였으니, 학자가 힘을 써야 하는 곳이 오로지 이 책에 있다. 진실로 공경하며 믿기를 허노재와 같이 한다면 성현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이미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소옹(邵雍) 여러 선생의 격언(格言)을 모아 외편을 만들었으나, 이를 이어서 편입한 것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이에 주자의 여러 서적에서 《소학》의 취지와 관련된 것들을 초록하여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의 뜻을 넓히고 《소학연의(小學衍義)》라 이름하였는데, 미처 책으로 완성하지 못하였으나 수택은 아직도 새롭다.
아, 애석하도다. 공의 덕행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어서 다만 그 일부만 거론할 뿐이다. 비록 한가로운 가운데 자잘한 일이라도 종종 고인들이 성현을 독실히 믿는 뜻을 사모하여, 스스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믿는 것을 굳게 믿음이 있었다. 몸이 대신이 되어서도 조제(調劑)할 재능이 아니라고 여겨 몸을 받들어 관직에서 물러나 세상을 마쳤으니, 《시경(詩經)》에서 말한 “밝고도 현명하다.〔旣明且哲〕” “고명하여 마침을 잘하였네.〔高朗令終〕”라 한 것을 공(公)은 거의 이루었다고 하겠다. 평론을 잘하는 자들이 근세의 명공과 거경(鉅卿) 가운데 공청(公淸)하고 충직(忠直)함은 더러 공과 같은 이가 있으나, 때에 맞추어 행하고 그침을 알고 상수(上壽)를 누리며 만년에 온전히 보존한 공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평생의 저술 가운데 시문이 가장 많으나 병화를 겪는 사이에 흩어져 없어지고 단지 전란 후의 상소(上疏)와 차자(箚子) 약간과 잡기(雜記) 약간 편, 《용만시집(龍灣詩集)》한 권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공의 휘는 탁(琢), 자는 자정(子精)이며, 자호(自號)는 약포(藥圃)이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반씨(潘氏)인데, 세계(世系)는 거제(巨濟)이며, 규문(閨門)의 법도가 진실로 군자의 배필이고 편안하게 장수를 누리며 해로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저(允著)는 명달(明達)하고 조숙하여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으나 일찍 세상을 마쳤고, 1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다.
차남 윤위(允偉)는 사재 주부(司宰主簿)로 선유(先儒)의 글을 즐겨 읽었고,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시형(時亨)이고, 딸은 현감 이해(李垓)와 사인(士人) 김시종(金時宗), 김점(金點)에게 시집갔다.
삼남 윤목(允穆)은 찰방(察訪)으로 기절(氣節)이 있고 고시(古詩)를 좋아했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시회(時晦)이고, 차남은 시영(時英)이며, 큰딸은 사인(士人) 김작(金碏)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종실(宗室) 덕원 도정(德原都正) 이추(李樞)에게 시집간 딸은 공보다 먼저 죽었는데, 1남 4녀를 두었으니, 딸은 군수 허정식(許廷式)과 부사 황여일(黃汝一), 사인 권래(權來)에게 시집갔다. 아들은 난리에 잃어버렸다.
문인(門人)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래부사(東萊府使) 황여일(黃汝一)이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