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비 야 합니다. 야나기 소에쓰라고...광화문-석굴암-달항아리-목가구-민화 등등...야나기가 아니었더라면 스러질 조선문화가 덕분에 보존되고 재평가되었다니...큰 공헌을 기리어 경배할 만하더구만...조선을 향한 연모의 정이 가슴을 치더라...
우서비 나기무 합니다. 애정이 지나쳐 눈이 멀 수도 있지...민화라는 이름은 한국인의 오해의 소산이지만...상징도상을 자연도감으로 해석해서 부사의不思議-불사의한 조선민화라는 경탄이 나왔고...책가도를 향한 맹목적 애정이 *무유호추無有好醜의 미美조차 곡해하게 만들고...
매깨비 네요시 합니다. 눈 먼 애정과 맹목적 신앙의 오류를 학문적 접근으로 단죄할 일은 아니고...조선도자기와 목공예를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용지용無用之用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사상으로 상찬한 거...취택取擇할 만 하던데 그래...
한국과 그 예술 류종열 저 이대원 역 지식산업사 1974
참고
이하 김영재 한국양화의 얼굴 자유문고 2020 현재 출간대기 중에서
김인환金仁煥은 노장사상의 이를테면 무사무위無思無爲에서 미니멀 아트의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미니멀아트의 방식과 방법론이 반전하여 무사무위無邪無爲 혹은 무명無名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노장이라기보다는 노자老子로 귀착되는 한국인의 무위자연관無爲自然觀은 *류종렬柳宗烈야나기 무네요시やなぎ むねよしYanagi Muneyosu의 진단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글과 견해란 눈에 보이는 바의 시각적 현상과 자아류의 추론으로 그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류종렬柳宗烈-필명筆名: 야나기 소에쓰 Yanagi Sōetsu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은 자연의 이법理法을 영위하는 도道와 그 작용인 덕德을 만물과 처세의 근본으로 삼고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용지용無用之用 유능제강柔能制剛을 강령으로 삼는다. 소탈한 심성과 꾸밈없는 화면조화 등 한국인의 원형原型-Archetype적 공감대가 있다.
이하 김영재 민화의 뿌리 운주사 2015에서 발췌
일본어로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검색을 하면 가뭄에 콩 나듯이 몇 개가 걸려들더라고. 그런데 영어로 야나기 소에쓰 Yanagi Soetsu를 검색하라니까 줄줄이 알사탕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거 있지.
그뿐이겠어? 자기 나라에서도 정해진 이름 부르는 방식이 없다는 거 아냐? 물론 한자로 쓰지. 유종렬이라고. 그런데… 자기 집에서나 사회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 그 사람 이름이라는 거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래, 우리 공주님 말이 맞아, 일본에 있지.
아, 그 무법천지에서 야나기가 그랬대. 조선에 민요民謠, 민담民譚은 있는데 백성이 그린 그림에는 이름이 없으니 민화民畵라고 부르면 어떠냐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그 이야기가 기차간에서 잡담 끝에 나온 말이라는 거야. 속상하지 않아?
공주님은 아무렇지도 않지? 그럴 거야. 아빠만 해도 속상해. 일본인이 우리 그림을 알아봤다는 게 속상하고, 그 일본인을 업고 한국인들이 민화라는 이름의 그림들을 묶어 하나의 미술 장터로 만들었다는 게 또 속상하고 말이지…
그보다 더 속상하는 건, 만약 그 일본인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빠도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 그림들을 허접쓰레기로 취급했을 거라는 데 있어. 정초에 붙이는 세화만 하더라도 한 해가 지나면 버리거나 다른 그림으로 덮어 씌웠거든.
야나기가 첫 삽을 뜨고, 한국인이 땅을 다져 민화라는 왕국을 만들었...다 라고 하면 참 좋겠는데 한국의 정신문화를 간질이는 솜방망이같은 삽으로 쓰레기 매립장에 누각樓閣 세운 꼴이라고나 할까?
아, 그래,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야나기가 들쑤셔서 천덕꾸러기 그림들이 고물 리어카에서 마나님 안방 벽으로 자리를 옮기고, 한국 어중이 양반들이 민화랍시고 주워 모은 떠중이 그림들이 끼어 있어서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파헤칠 수 있게 되었잖아?
응? 왜 아직 식식거리느냐고? 야나기가 한국민화의 할배라고? 으이그...유종열전집13권 민화みんが 776페이지를 온통 대진회おおつえ大津絵로 도배를 했더라고...니회どろえ泥絵, 나라회ならえ奈良絵, 우자판회はごいたえ羽子板絵, 초자회しょうしえ硝子絵-ガラスえ는 이름만 있고...조선민화朝鮮の民畵는? 달랑 일곱 페이지에 외국민화外邦がいほう民畵로 소개되더라...헌데 누구야? ...공주니임...너지? 헛다리 짚은 게? 흠, 흠, 아빠는 빼고오...
민화라는 말은 1937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烈가 월간지『공예工藝』에서,
민중으로부터 태어나고 민중을 위해서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서 구입되는 그림을 민화라 부른다民衆から 生れ 民衆の 爲に 描かれ 民衆にょつて 購ほれる 繪畵を 民畵と 呼ぼうう라는 말에서 비롯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화를 보면서라는 글에서 미의 극치라고 감탄했던 어해도는 연꽃 아래 물고기와 게가 한 화면에 보이고, 복숭아 가지 사이로 물고기가 노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원근법이 반대로 표현된, 이를테면 비상식적인 책가도는, 무유호추無有好醜의 미의 경지에서 그려진 그림이라 했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상찬하는 사람에게 보이나니, 그것이 야나기가 바라던 아름다움이었다.
이즈미 지하루泉 千春는 『유종렬柳宗悅의 한국미론과 종교철학』이라는 논문에서 유종렬이 쓴 『미美の 법문法門』을 인용한다.
민예에 관한 야나기의 글은, 『조선화를 바라보며( 1957)』와 『불사의不思議=不可思議한 조선의 민화(1959)』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논고는, 연꽃과 게 그림· 문방도를 직접 보고 그 그림이 가지는 성격과 신비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를 살핀 것이다.
소재면에는 계절을 달리하는 풍물이나 다른 곳에 사는 것들이 함께 있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구도면에서는 원근법에 얽매이지 않고 아무도 집착하지 않는 자재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에는 합리의 궁굴窮屈에서 해방된 불합리성. 불합리의 합리, 한정에서 이탈한 불한정의 자유, 그리고 파격미가 있으며 모든 이원대립을 벗어난 동양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어서 그대로 모두 아름다와지는 도가 있다.
고 했다.
그 외에도 이 글에는 일본민예관과 구라사키倉敷민예관의 네 눈동자 까치호랑이(까치와 호랑이)ㆍ책거리화조도ㆍ문자도ㆍ민불화ㆍ능운대사상ㆍ호렵도ㆍ소상팔경도를 한 점씩 소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그림을 보고 마음이 빼앗겼던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그 일본은 식민지화한 조선의 자율권을 인정하지 않을 심산으로 조선총독부 외의 조선 칭호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조선화, 대만화가 아닌 동양화가 되었다.
야나기가 굳이 조선화라고 불렀던 조선의 그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가적인 보호에서 떠나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오랜 전통에서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고 답습해왔던 모든 것들이 야나기의 눈에 애상哀傷의 미로 비쳐졌던 것이다.
그것이 민화였다. 획일화되고 제도화한 관官에 대하는 민초의 마음이었고,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애상이 담긴 그림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피지배민족을 애연하게 쳐다보는 눈으로 본 그림이 그 민족의 입장에서 보아 당연할 수 있을까.
민화는 야나기가 눈길을 주고 이름을 짓고 미학적 혹은 종교적 접근을 시도할 때부터 오해와 몰이해의 행진이었다. 민화라는 이름을 역수입하여 매스컴을 동원, 대중적 관심을 유발한 한국인들의 행태도 다를 바 없었다.
조자용은 철학전공의 야나기가 조선미술에 매료되어 민예 쪽으로 돌아선 것은 1914년 아사카와 학쿄淺川伯敎가 선사한 요강단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조자용은 『한민화서론』 246쪽에서
쯔보란 일본말로 턱을 잘라버린 단지란 말이니 아직도 그들은 그것이 요강단지인 줄을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 세계 최고의 민예학자로 인정받는 유종열의 그 탁월한 민예미학이 우리의 요강단지 속에서 우러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세상은 또 한번 크게 놀랄 것이다.
요강단지 속에 숨어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홀린 야나기는 1916년 드디어 한국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행이 그로 하여금 인생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라고 말한다.
이즈미는, 경성에서 교사를 하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가 야나기에게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를 주고 갔다고 했다. 이름은 리쵸소메쯔케 아키쿠사몽 멘도리쯔보 リチョソメツケ アキクサモン メントリツボ 李朝染付 秋草文面取壺이다.
쯔보(つぼ, 壺)는 단지 혹은 항아리를 말한다. 야나기가 받았다는 일본민예관 소장의 쯔보는 13.5cm 높이에 여덟 개의 면을 가진 필통형으로 가을 풀秋草이 청화로 그려져 있다. 반면 일본어에서 요강尿綱은 시빈しびん, 혹은 슈빈しゅびん; 小便壺이라 한다.
면취호面取壺를 면을 취한, 혹은 면을 자른 항아리로 해석하되 수직의 필통이 아닌 수평으로 잘랐다면 요강으로 지레 짐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야나기를 이어 한국인은 또 한번 더, 세상을 더욱 더 크게, 놀라게 했다.
무유호추의 콩깍지 Yanagi Saw What He Wanted to See
야나기가 조선 여행을 앞둔 기대를 이즈미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가능한 한 회화, 건축, 조각, 도자기를 보고 싶다. 예술을 통해서 동양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예전부터 나의 원망이었다. … 오랫동안 서구예술에 경탄하여 저서를 애독한 나는 요즈음 자신의 고향에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새로운 찬탄에 가득차서 동양 고유의 예술 또는 사상을 사랑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기쁘다. (생략점- 이즈미)
야나기는 1921년 5월 동경에서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1922년 서울에서 이조도자기 전람회를 가졌고, 1922년 『조선의 미술』,『이조도자기의 특질』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1923년에는 서울에서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성악가인 부인 카네코兼子의 음악회 수입과 전시회 및 강연회 모금 등을 바탕으로 1924년 4월 경복궁 안에 있는 집경당(緝敬堂; 現 緝慶堂)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설한다.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이라 불리는 이 미술관에서 한국민족공예품의 수집·보존·연구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수집은 1927년 당시 2000점에 달했다. 해방될 때까지 지킨 야나기는 모두 한국에 두고 갔다고 되어 있다.
야나기의 조선에 대한 애정과 통찰력은 탁월하지만 외국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첫 단추는 바로 민화라는 말에서 어긋 끼워졌다. 야나기는 1929년 일본 민예품전시회에서 일본의 오쓰에大津繪를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민화라는 말을 썼다.
민화라는 용어는 정확한 연대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야나기와 친구들이 잡담 끝에 만든 말로 되어 있다. 고단샤講談社에서 출간된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 상上』 에서 따니가와谷川徹三는 서문序을 통해
민화라는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일본에서 민화라는 이름은 정착되어 있지 아니하다. 어느 때, 야나기柳宗悅·가와이河井寬次郞·하마다浜田庄司 세 사람이 여행 중인 차안에서 잡담 중에 만들어 낸 말로서 민예의 뜻을 가지고 있다.
라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 단추는 신앙의 조건에 대한 경전적 맹신에서 끼워졌다.
1959년 야나기는 월간지 민예 8월호에,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를 발표하면서, 책가도冊架圖가 적정寂靜․무無․공空의 경지에서 무유호추無有好醜, 즉 미와 추라는 두 개의 상, 즉 이상二相을 벗은 무상의 예술이라 했다.
야나기가 말하는 *무유호추의 미美는, 『무량수경無量壽經』「아미타여래48원阿彌陀如來四十八願」중에서 제4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願에 이르러, 석연히 얼음이 녹는 느낌이 들어 세웠다는 미의 법문이다.
무량수경은 세자재왕世自在王 부처님의 원력으로 210억 불국토의 진면목을 본 법장비구法藏比丘가 위없이 갸륵하고 뛰어난 48서원을 세운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제4원은, 설령 내가 성불하더라도 나라 안의 인간과 천인이 형과 색이 같지 않고 호와 추가 있다면 정각을 얻지 않겠다設我得佛 國中人天 形色不同 有好醜者 不取正覺라는 것이다.
48원은 조건적인 서원이다. 부처가 되더라도, 인간과 천인이 호와 추가 없어졌을 때 정각을 얻겠다는 것이다. 뒤집으면 인간과 천인에 호와 추가 남아 있다면 정각을 주더라도 얻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시시비비와 분별에서 나온 서원이다.
그러나 야나기는 무조건적인 헌신의 마음으로 빚어낸 예술이 민화라 했다. 몇 푼의 노자나 식사의 대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미 무조건이 아니요, 좋은 대본과 갈고 닦은 솜씨로 나은 보수와 처우를 바랐다면 헌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상징 도상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다. 야나기는 미의 법문에서, 어해도와 책가도의 소재와 구도에서 미와 추의 대립을 벗어난 파격미를 발견한다. 시공을 초월한 소재가 원근법이나 계절과 무관히 한 화면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본 것이다.
어해도란 물고기와 게, 나무와 꽃 등의 상징을 인간세계에 빗대고, 책가도는 다양한 상징물들을 통해 소원이나 성취를 이루기 위한 상징도상이었다. 상징을 배제하고 화면 위의 관계로 해석한 미학자 야나기의 착오였다.
취약한 동기와 미학과 개념에서 첫 발을 내디딘 민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와 출판·매스컴을 통해 어원불명語源不明의 이조호랑이·한호韓虎 등을 내세운 한국민화 등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민화라는 이름으로 고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