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33
최세윤 대장의 4차 진영은 본부를 남동대산(南東大山)으로 옮기고 경주, 울산, 흥해, 포항 등지를 담당하면서 웅산거령(雄山巨嶺)에 각 지역 분대를 배치하고 본부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청송동부지역-서종락(徐鐘洛)-주왕산(周王山), 청송서부지역-남석구(南錫球)-철령(鐵嶺), 영천북부지역-이세기(李世紀)-보현산(普賢山), 영천서부지역-우재룡(禹在龍)-팔공산(八公山), 영천남부지역-이형표(李亨杓)-구룡산(九龍山), 신령지역-조상환(曺相煥)-화산(華山), 의성지역-박태종(朴泰宗)-춘산(春山), 군위지역-남승하(南昇夏)-효령(孝令), 청도․경산지역-임중호(林中虎)-운문산(雲門山), 경산서부지역-손진구(孫晉球)-주사산(朱砂山), 청하․죽장․기계 등지-정순기(鄭純基)․구한서(具漢書)-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편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山南義陣遺史 제4편 최세윤대장 약력 제3장 제3절 P358>
김창수(金昌水) 義士
자는 인선(仁善), 관향은 김해(金海). 소모장(召募將) 정순기의 매부(妹夫)다. 처음에 흥해 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1> 1995년 건국포장 추서
정진소(鄭鎭韶) 義士
자는 국경(國卿), 호는 해난(海難), 정용기 대장의 오종제(五從弟)다. 산남의진 의거 초에 정용기 대장이 부채 하나를 주면서 “오도(吾道) 추선(秋扇:가을부채, 쓸모없어짐을 뜻함)이라. 심장(深藏) 면려(勉勵)하라” 라고 훈계하니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학문을 닦으며 진후(陣後)를 원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1>
정진욱(鄭鎭郁) 義士
자는 기옥(器玉), 정용기 대장의 사종제(四從弟)다. 처음에 종군하여 활약하다가 정용기 대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감에 대장의 가족을 피난시키고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3><山南倡義誌 卷下 P82>
김현극(金賢極) 義士
좌영장(左營將) 김성극의 백형(伯兄)으로 창의지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석사(碩士)라 한다’ 하였다. 부산을 내왕하며 화약을 밀수입하였고 불행히도 일찍 서거(逝去)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4><山南倡義誌 卷下 P82>
유화실(柳花實) 義士
창의지에는 ‘유석사(柳碩士), 일명 하실(河室)’로 기록하였다. 청송 사람으로 철도공사장에 투신하여 불을 다루는 기술이 있는 탓에 화약고에 수시로 출입하더니 산남의진이 일어남에 그 화약을 훔쳐 진중으로 가져왔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4><山南倡義誌 卷下 P82>
이능추(李能樞) 義士
자는 중거(重擧), 관향은 여강(驪江), 정용기 대장의 외숙(外叔)이다. 진후(陣後)를 원조하다가 발각되어 무한히 고초를 당하고 돌아와서 은신하였으며, 한을 머금고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4><山南倡義誌 卷下 P83>
이형윤(李亨允) 義士
자는 성도(聖道), 이형표(李亨杓)의 친동생이다. 처음에 백형(伯兄)을 따라서 주사산(朱砂山), 운문산(雲門山), 구룡산(九龍山) 등지에서 진후(陣後) 원조를 하다가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4><山南倡義誌 卷下 P83>
성낙희(成樂熙) 義士
자는 기서(其瑞), 호는 보은(普隱), 관향은 창녕(昌寧), 중군장 이한구의 외숙이다. 처음에 신녕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후에 만주로 피신하다.[창의지에는, 신녕지방 참모로 계책을 내더니 의진이 무너진 후 안효제(安孝濟), 이대계(李大溪) 등 여러 벗들과 만주로 건너가 요동에서 서거하다.]<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544><山南倡義誌 卷下 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