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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복음전도관(현 은산성결교회)
충청도에 두 번째 설립된 성결교회
임흥근 목사
경성 이남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성결교회가 규암성결교회이다.
1912년 7월 규암복음전도관(현 규암성결교회, 이후 규암교회)이 부여 규암에 설립되어
충청지역 성결구령운동 전초기지가 되었고 거점지와 확산지가 되었다.
그 첫 확산 현장이 은산복음전도관(현 은산성결교회, 이후 은산교회)이었다.
규암교회는 박제원 수양생의 전도로 시작된 교회로써
초대 담임교역자는 주임 김상준 전도사와 부임 박제원 전도사였으며
제 3대 담임교역자가 이명직 목사였다.
1914년 4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한 달 뒤인 5월에 부임한 이 목사는
2년 동안 사역하면서 지역 성결구령운동 중심교회로의 사명을 대내외 활동을 통하여 잘 드러냈다.
담임교역자로 규암교회와 교인들을 성결의 복음으로 돌보며 구령활동을 전개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지역 성결구령운동 확산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부임한지 3개월 만에 근동 지역에 은산복음전도관이 설립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본부 지도자들과 더불어 확실한 설립이 되도록 활동하였다.
당시 규암복음전도관 자체적으로 또 다른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지원할 재원 조달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직접 현장을 오가는 활동을 통하여 사전에 매입할 건물을 선정하거나 대략적인 가격을 조정하는 등
그리고 본부 인사들의 오고가는 안내와 숙식 등의 문제를
이 목사가 앞장서서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을 통하여 은산에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1. 은산 복음전도관 설립
가. 설립과 1914년 성결구령활동
1914년 9월 24일 규암복음전도관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하였다.
동양선교회 총책임자인 카우만(賈禹滿 總理) 목사와 *규암교회약사 p9 인용.
사진은 이장하 목사가 찍은 것으로 사료되며, 뒷줄 왼쪽: 토마수 감독. 카우만 총리, 앞줄 왼쪽 이명직 목사와 전도부인들
초대 감독 토마스 목사가 은산복음전도관 설립 최종승인을 위해 방문한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충남에 두 번째 성결교회인 복음전도관이 설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규암복음전도관은 은산복음전도관의 모교회이며, 규암복음전도관을 통하여 설립된 첫 번째 전도관이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을 알 수 있다.
곧, ‘성장’이 아니라 ‘복음확장(전파)’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규암복음전도관이 확실하게 정착하여 안정된 상태가 된 다음
지역에 복음관을 세우지 않고 운영 가능한 상태 곧 전도만을 할 수 있는 곳이 되면
또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인 복음전도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전도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은산복음전도관의 시작은 이러했다.
‘은산 장날’ 장터는 규암복음전도관 교역자와 교인들이 찾아와 열정적으로 노방 전도하던 장소였다.
이들의 전도를 통하여 세 가정 10여명이 규암복음전도관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목사 부임 이전에 그 세 가정을 설립 가정으로 삼고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자 본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승인이 되었고
담임교역자를 파송하게 되었다.
그가 김석준 전도사였다.
본부 승인은 규암교회로부터의 요청을 받고 현장 시찰로부터 구체화 되었다.
1914년 5월 29일(금) 은산 설립을 위해 토마수(土瑪洙) 감독이 이장하 목사를 대동하고 내려와 현장을 답사하고
주일을 지낸 후 6월 1일(월) 상경하였다.
그리고 최종 설립 승인 결정이 되어
평남 용강출신이며 1914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는 김석준 전도사를 설립 및 초대 담임교역자로 임명하고 파송하였다.
김 전도사는 가족과 함께
1914년 7월 26일(주일) 규암복음전도관에 내려와 15일간 머무르며
이명직 목사와 함께 은산복음전도관 설립을 위한 마지막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년 8월 11일(화) 은산 임시예배처소로 옮겨갔고
동월 16일 첫 번째 공식예배인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러므로 은산복음전도관은 1914년 8월 16일 김석준 전도사의 인도로 설립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월 20일 토마수 감독으로부터 통지된 내용을 따라
은산복음전도관과 사택으로 사용할 가옥을 물색해 두었다가
9월 24일 카우만 총리와 토마수 감독과 동행한 이장하 목사가 내려와 계약을 성사하고 계약금을 주고 상경하여
10월 10일(토) 건물 매입금 300엔을 보내줌으로 은산복음전도관은 전도관을 소유하게 되었다. 앞의 책 p8-10 인용.
모든 계약이 성사되고 대금이 지불되어 온전한 은산복음전도관의 소유가 되고 한 주간이 지나고
이명직 목사에 의해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남자 3명, 여자 2명이었다. 앞의 책 p10
그리고 동년 12월 성탄절에
규암과 은산 두 전도관은 연합예배를 드리며 함께 구주 나심을 기뻐하면서 동역의 기쁨을 나누었다.
나. 1915년 성결구령사역
김석준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 졸업하던 해인 1914년 2월에
김상준과 박제원 전도사를 따라 규암복음전도관에 내려와
함께 천막을 치고 낮밤으로 전도하는 대거전도회를 함께 했었다.
20여일 간의 활동을 통하여 규암 근동을 다니면서 전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1915년 2월에 경성성서학원 수양생들이 은산에 내려와 특별집회를 실시했다.
은산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또 노방전도를 통하여 접촉한 이들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은산복음전도관에서와 장날에는 옥외집회를 실시함으로
은산복음전도관의 존재와 확실한 사역의 방향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보고에
여러 명의 구원받은 이들의 간증이 소개된 것으로 보아
김석준 전도사의 초기 사역의 열정이 은산복음전도관이 든든히 서가는 기초 작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성결교회사 p203 (OMST, May,1915) 인용
김 전도사가 부임하고
6개월 만에 이러한 집회를 실시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은
은산 지역이 미신숭배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무당의 영향력이 강하게 지역주민들에게 미쳤기에
이러한 사망의 그늘을 몰아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대대적인 복음전파였다.
복음을 듣고 신앙을 시작했으나 다시 무당에게 돌아가는 이들을 보았기에
김석준 전도사의 마음은
이제 신앙하는 이들에게 확실한 성결의 은혜가 필요함을 파악하고 특별집회를 계획하고 실시한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가 확실하게 응하기까지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5월에는 길보른 총리가 순회 부흥사인 라순 목사와 함께 규암에 내려와 은산복음전도관을 시찰하고
23일 주일 규암과 은산교회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때 규암의 이명직 목사에 의해 7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성탄예배도 규암교회와 연합으로 300여명이 모여 축하회로 드렸다.
* 1915년 8월 4일 전성운 전도사가 홍산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다.
상주 출신이 전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은산성결교회 부임전도사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홍산에 파송되어 초대 담임교역자로 사역하였다.
다. 1916년 성결구령사역
일명 ‘순회윤차부흥회’를 하였다.
규암과 은산 그리고 홍산성결교회가 각각 5일씩 부흥회를 실시하는 방식이다.
먼저 규암(이명직 목사)에서 구정 후인 음력 1월 4일부터 5일간,
은산(김석준 전도사)에서 1월 9일부터,
홍산(전성운 전도사)에서 1월 14일부터 부흥회를 하였다.
주 강사는 이장하 목사와 최홍은 전도부인이었고 각 전도관 담임 교역자들이었다.
이렇게 당시 성결교회는 순회하면서
보름간 부흥회를 실시함으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결한 삶을 동일하게 살아가는 성결인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지역 성결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역 복음화에도 협력하는 구령단체가 성결교회였다.
당시 집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각기 양식인 쌀을 짋어지고 다녔다.
그리고 이 집회에 참석했던 교인들은 이장하 목사를 통하여
접이식 오르간을 처음 보았고 악기와 함께 찬양을 한 것도 최초였을 것이다.
* 1916년 10월에는 금천리복음전도관(현 대선성결교회)이 설립되었다.
곽재근 전도사가 설립 및 초대담임교역자로 부임하여 성결구령사역을 전개하였다.
금천리는 당시 바야웨(Bayawi)복음전도관이라고 불렸다.
2. 은산 성결교회 예배당 건축사
은산복음전도관은 교단 명칭의 개칭으로 인하여 1921년 9월부터 은산성결교회로 불렸다.
그러나 본연의 사명인
사중교리를 통한 순복음을 전하며 구원 받은 이들을 일으키고 성결인을 양성하는 일은 오히려 더욱 풍성해 졌다.
그동안 은산교회 성결구령운동의 한 영역을 담당하며
연합활동에도 적극 동참하면서 구령활동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첫 지교회인 율암성결교회를 설립하여 순회하며 돌보았다.
이러한 주 근거지인 예배당 건축사는 아래와 같다.
◆ 첫 번째 건물은(1914 ~1917)
1914년 10월 본부의 지원으로 건물을 매수하여 은산교회 첫 번째 예배당으로 삼아 예배드려온 이후 다른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조선총독부관보에 의하면 1917년에 은산리 2,7에서, 1918년에 은산리 150번지로 변경된 것으로 보아 이때 교회를 이전하였다.
◆ 두 번째 건물은(1918 ~ 1923)
1917년 말 경에 첫 번 있던 장소에서 교회를 이전한 두 번째 은산교회 예배당으로 추정되는데 은산리 150번지이고, 이 때 담임교역자는 곽재근 목사였다.
◆ 세 번째 건물은(1923 ~ 1936)
은산교회가 세 번째 건물이면서 첫 번째 은산교회예배당으로 건축하여 1923년 10월 5일 ~ 10일까지 대전지방수양회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헌당식을 드렸다. ‘새로 짓고 입당한 예배당’에서 수양회를 개최하였다 했으니 10월 이전에 입당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때 교역자는 임종륜 전도사와 염애은 전도부인이었다.
◆ 네 번째 건물은(1936 ~ )
은산교회 네 번째 건물이면서 두 번째 건축한 예배당이 1936년 6월에 기공하여 9월에 준공되었다. 이 때 담임 교역자는 손갑종 목사였다.
1) 은산교회당 건축기
(1) 기 공: 1936년 6월
(2) 완 공: 1936년 9월
(3) 총공사비: 2천2백환(헌금과 본부의 지원금)
(4) 건 평: 40평
2) 은산교회당 봉헌식
(1) 일 시: 1936.12.13 (2) 주 례: 최석모 목사
(3) 건축보고: 김해두 집사 (4) 축전 및 축장낭독: 김은석 집사
3) 부여구역 연합사경회
(1) 일시: 1936년 12월 7일-12 (2) 장소: 은산성결교회당
(3) 대상: 은산교회 외 4개교회 (4) 강사: 김창환 전도사와 최종영 전도사
(5) 결과: 중생자 23인, 성결자 16인 일제시대 당시 성결교회는 교회별로 각종 집회를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때 믿기로 작정한 이 00명, 그 중 출석한 이 00명, 중생(신생)자 00명, 사죄의 은혜를 입은자 00명, 성결은혜 입은자 00명, 신앙부흥입은자 00명, 십일조 작정 자 00명, 신유 00명] 등을 기록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이 [활천] 소식혹은 통신란을 통하여 기록해 두었다.
그러므로 은산성결교회당 봉헌식을 앞두고
근동은 물론 부여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결인들이 함께 모여
교회를 세워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고
구원받는 이들이 확산시킬 교회로 쓰임 받을 것을 기대하였다.
이처럼 지역에 정착하면서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
성결의 삶을 사는 이들로 세워가는 일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감당할 수 있는 주의 은혜를 입는 구령의 현장이 은산성결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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