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올해의 교구장님의 사목교서 주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사랑은 새로운 복음화의 열매"이고, 주제성구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입니다. 2013년 '신앙의 해' 이후로 5개년에 걸쳐 신앙생활의 심화를 위해 기울인 노력들의 결론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올해의 교구 사목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과 '실천하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입니다. 사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제로서의 사랑의 열매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제로서 신자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즉, 사제직에 충실하는 것이 곧 신자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故김남호 토마스(1909-1993) 박사님의 모습에서 사제적 사랑의 삶을 성찰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그분의 생애를 나누고 싶습니다. 故 김남호 박사님은 1936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서 내과의사로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것은 1993년 운명직전이었습니다. '토마스'라는 본명으로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부인 오언남 아우렐리아 여사는 1938년 입교하여 세종로 성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58년 동안 부부로 해로하였습니다. 1. 이웃과 한없이 나누는 삶
김 박사님은 1991년에 부인 오언남 아우렐리아 여사와 함께 평생 모은 80억 원 상당의 전 재산을 세 가지 조건하에 서울대교구에 기부했습니다. 조건은 이러했습니다 : 첫째,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아픈 이들의 치료비로 써 달라. 둘째, 의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장학금으로 써 달라. 셋째,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 1995년에 설립된 '김남호 복지재단'을 통해서 지금까지 저소득층 환자와 의대생, 간호대생 등 1000여 명에게 나누어진 돈이 무려 85억 원에 이릅니다. 김 박사님은 이미 1974년에도 당시 금액으로 4천만 원 상당의 부동산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한 바 있었습니다.(여기서 지금도 매년 12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답니다) 자신이 소유한 집에 세들어 사는 이들이 어렵다면 세를 받지 않거나 아주 싼 값에 살도록 했습니다. 대부분 시세보다 엄청나게 적은 전세금으로 세를 살던 세입자들이었는데, 전세금 외에 이주비를 더 내옿으라고 해서 상시 175만 원 더 지불해야 하기도 했답니다. 김남호 박사님은 자신의 병원을 찾아온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진료해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전공인 의학이라는 학문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의학 서적을 저술하여 출간했는데, <우생학>(1956), <내분비학>(1960)을 자비로 출판하여 국내의 모든 의대, 공공도서관, 의학종사자들, 의학전공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였습니다. 자신이 어렵게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 것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김 박사님이 40여 년 동안 운영했던 병원에 딸린 안집에는 그의 3남 4녀의 자녀들뿐 아니라 친척들도 함께 거주하여 대가족으로 북적댔습니다. 시골에서 삼촌 집으로 유학 온 조카들에게도 그는 자녀들과 똑같이 학비와 용돈을 주며 돌보아주었습니다. 부인 오언남 여사는 세종로성당에서 연령회 활동을 열심히 하며, 대녀가 3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성당 묘지 조성시 사두었던 자신들의 묘지까지도 가난한 이들에게 몰래 내주어서, 성당 측에서 두분의 묘지를 마련해드렸다고 합니다. 부인은 1989년 가톨릭대상(사랑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 2.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 제주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 박사님은 의사가 되기까지 돈이 없어 학업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경성의전을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것이 평생 감사의 빚이 되었습니다.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1942년에 서울시 종로구 도렴동에 '김남호 내과의원'을 열고 80년대 초까지 병원에 딸린 살림집에서 7남매를 낳아 기르며 살았습니다. 김 박사님은 간호사나 약사도 따로 두지 않고, 병원 잡무도 손수 처리하였습니다. 40년 넘게 개업의 생활을 하며 부모의 친상을 제외하고, 평생토록 휴가나 여행으로 병원의 문을 닫은 적이 없었습니다. 왕진을 갈 때에는 걸어가거나 버스만 이용하였고 택시를 권하여도 타지 않았습니다. 그의 검소가 지나쳐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병원을 찾아온 환자가 김박사님을 보고 복덕방에 온 것 같다고 하며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40년 된 양복을 입고, 20여 년 된 점퍼와 구두를 신고 살았습니다. 결혼식 때 선물로 받은 50년 넘은 벽시계와 '昭和2년'(1927)이라 적힌 거울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밥상 위 반찬도 한가지면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밥상은 늘 밥과 국과 김치 세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부러진 수저를 철사로 이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통인동 한옥으로 이사한 후, 빗물받이통을 직접 만들어 빗물을 재활용해 사용했습니다. 산동네 사람들의 물 부족을 걱정하며 수돗물을 아꼈습니다. 1993년 선종 시까지 연탄아궁이에 겨울도 하루 연탄 2장이면 끝이었습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어려운 이들을 생각해 그것도 감사히 여겼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쓰던 화재경보기를 개조해서 집 대문의 초인종으로 사용하고, 전단용 이면지를 메모지로 묶어 쓰고, 자녀들이 쓰던 몽당 크레파서를 메모용 필기구로 썼습니다. 김 박사님은 세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손수 자녀들의 이발을 해주고, 가정교사 역할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3남 4녀의 자녀들을 내과의사와 약사로 키웠습니다. 3. 의사직에 대한 성실 김 박사님의 어릴 적부터의 꿈은 의사였고,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한평생을 의사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찾아오는 환자의 진료나 왕진 요청을 거절해 본 적이 없기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약을 함부로 쓰지 않으면서도 병을 잘 고치는 의사였습니다. 평생 기본적인 약과 기구만으로 진료하면서 의술을 빌어 돈을 벌려고 애쓰지 않으며, 한결같은 사랑의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해 보였지만 결코 환자를 속이거나 진료비를 부당하게 청구하는 일이 없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진료해 주었습니다. 진료로 바쁜 와중에도 박사님은 저술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75년에 <가정의원>, 1977년에 <표준 체중을 지니려면>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박사님은 인재를 키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의학저서를 자비 출판하여 무료로 배포한 일이나, 자신의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일들도 모두 그런 끝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故 김남호 박사님은 의사로서 얼마든지 윤택하고 안락한 삶을 살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돈을 쓰고, 휴가나 여행도 다니면서 남들처럼 삶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병원에 간호사나 사무장 같은 사람을 따로 두고, 일을 편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병원 인테리어도 세련되게 꾸미고, '복덕방 같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끼고 절약하는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화려하고 편안함을 마다하고 일부러 불편을 감수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평먼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얘기가 이것으로 끝났다면 그분에게서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달렸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어떤 분이 지독한 '자린고비'의 삶을 살았나보다 하고 말 것입니다. 김 박사님 내외의 훌륭함은 그렇게 아끼고 절약한 재산을 한 푼도 예외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며 바로 사회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분 사랑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자극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사셨던 시대와 현대는 분명 많이 다릅니다. 물질적으로 그 당시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고, 음식도 너무 잘 먹어서 탈이고, 여행을 떠나거나 휴가를 보내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러힉 때문에 김남호 박사님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이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이기에 더욱 그런 삶의 정신과 태도가 돋보입니다. 4. 사제성화의 날의 김박사님을 생각하는 이유 오늘 사제성화의 날에 사제가 아닌 의사 선생님의 삶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김남호 박사님의 의사로서의 성실함이 사제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성실함과 많이 닮아서입니다. 도렴동에 있었던 '김남호 내과의원'에서 40년을 의사로서 봉직한 것이 '빛나는 삶'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매일, 같은 병원에서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낸 일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박사님은 주변 지역의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의술로 봉사한 40년을 매일의 규칙적인 생활로 이어갔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우리도 사제수품 후 대략 40여 년 사목활동을 하게 되지 않나 십습니다. 단조로운 되풀이를 지루해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수행의 과정으로 삼는 것이 우리 사제생활에도 중요하다 싶습니다. 의사로서 전공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책을 읽으셨던 박사님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환자 진료로 바쁜 중에 전공지식을 나누기 위한 저술도 하셨지만, 그것 말고도 '자신의 친구를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공 서적뿐만 아니라 상식, 일반문화서적, 한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 읽기를 무척 즐기셨습니다. 의사들이 전공지식을 계속 쌓고 정보를 나누기 위해 학회 활동을 하는 것처럼, 사제들에게도 전공지식을 심화해가기 위한 지속적인 공부가 중요합니다. 물론 교구에 사제평생교육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관심과 노력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서품을 받는 것으로 신학 공부도 끝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학 공부는 신학생 시절에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실세 사목 생활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의사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며 정치가나 기술자도 아닙니다. 분명 우리는 신학을 전공하고 그 위에서 양성된 사목자들입니다. 신학이 하느님께 대한 학문이므로 그분께 대한 관심과 탐구가 사제서품 시점에서 결코 종료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학적 고민, 성찰과 상가 우리의 현실적인 사목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동기를 부여하고 자극제가 되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잠실성당 신학생일 때, 본당신부님 이셨던 故 김정수 레오(1933~1993) 신부님께서는 당시 사제생활 24~25년 차 때이셨는데, 매 주일 미사 때마다 신자들에게 새로운 책 한 권씩 당신이 먼저 읽으시고 권해주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강론을 들려주셨던 신부님께서는 늘 책을 읽으시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셨습니다. 김남호 박사님의 의사로서의 성실함에서 배우고 싶은 것은, 낮이나 밤이나 찾아오는 환자의 진료나 왕진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열정만 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앓고 있는 환자를 잘 고쳤습니다. 가능하면 약을 쓰지 않고 치료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목자로서 본당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사목현장에서 신자들을 만납니다. 수난 전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만나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으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습니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또 어떠한 현세적 위로나 보상이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사명을 위해서 선발되고 파견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CMC소속 병원을 제외하고 서울 시내 27개 대형병원에는 병원사목위원회에 속한 사제나 수도자가 일하는 원목실이 있습니다. 원목실 사제가 손이 부족할 때, 환자의 소속 본당이나 병원 인근 본당 사제의 협력이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의 소관인지 또는 누구의 일인지를 따지기보다, 사제를 간저히 바라는 신자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파견되었음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합니다.(본당 관내에 있는 학교들, 복지시설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들, 교정시설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으로 故 김남호 박사님의 청빈한 생활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물질 풍요의 시대가 현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것이 생태계 파괴와 각종 성인병 그리고 정신의 피폐임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김남호 박사님처럼 똑같이 살수도 없고, 또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절제와 나눔을 위한 가난의 정신을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자극제로 삼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으셨던 김 박사님의 겸손은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6,3)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것이어서 탄복을 자아냅니다. 故 김남호 박사님의 삶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마치면서, 올해의 교구장님 사목교서(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사랑은 새로운 복음화의 열매)대로, 우리들도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안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마치고 싶습니다. 하나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이한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서 실시하는 '장기기증'이나 '조혈모세포기증'과 같은 생명나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을 계기로, 교황방한의 성과를 우리 안에서 이어가기 위해 개최되었던 사제토론회(사제정담회)에서 발의되고 시작된 '프란치스코통장'(우리은행 1005-102-106434 (재)바보의 나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통장은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자'는 취지로 자신이 가진바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교구 사제들의 나눔통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