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알면 치매 정복이 보인다
나이가 들면 또 하나의 세계가 슬그머니 찾아온다. 반갑지 않은, 그래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기억 저 편의 세계. 노년기에 특히 발병하기 쉬운 ‘치매’ 얘기다.
치매정복연구단의 서유현(58) 교수는 불치병으로만 여겨지는 치매와 싸우는 국내 제일의 장수다. 65살 이상 노인 10명 가운데 1명이, 75살 이상은 10명 당 2명 꼴로 겪고 있는 치매를 정복하겠다고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게 1995년.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서 교수의 외로운 싸움은 어디까지 진행됐을까.
치매 유발 새 단백질, 세계 최초로 규명
“지금까지 치매의 원인으로 알려진 대표적 물질은 ‘베타(β) 아밀로이드 단백질’이라는 독성 물질입니다. 이 물질이 뇌에 쌓여 뇌세포가 파괴되고 치매가 찾아온다고들 말하죠. 하지만 우리 가설은 조금 다릅니다.”
서 교수는 누구나 주목하는 베타 아밀로이드 대신, 뇌 속에 있는 ‘C단 단백질’에 주목했다. C단 단백질은 적게는 30개에서 많게는 100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이다. 서 교수는 이 C단 단백질의 독성이 베타 아밀로이드보다 10배 이상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계 최초로 C단 단백질과 치매의 상관관계를 규명한 그의 연구는 1996년 세계적 과학학술지 ‘파세브’(FASEB)에 실렸다. 서 교수의 실력이 세계적으로 검증받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는 사슬처럼 확장된다. “베타 아밀로이드와 C단 단백질 말고도 뇌에는 서로 협동해서 뇌세포를 죽이는 단백질이 많이 발견됩니다. ‘알파(α) 시누클레인’이라는 단백질도 그 중 하나인데요. 원래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물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백질이 치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을 처음 밝혀냈어요.”
서 교수는 “치매의 30%는 파킨슨병을 동반하고, 파킨슨병의 30%는 치매를 앓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 알파 시누클레인은 양이 적을 때는 뇌에 존재하면서 산소가 부족할 때 뇌를 보호하는 ‘우군’의 역할을 하지만, 그 양이 많아지면 오히려 뇌세포를 파괴하는 ‘적’으로 돌변한다. 이 알파 시누클레인의 양면성 또한 서 교수가 처음 밝혀낸 성과다.
이런 독창성이 높은 점수를 받아 서 교수 연구팀은 지난 2000년 10월, 과학기술부로부터 창의연구단으로 인정받았다. 지난 10여년동안 서 교수가 국내외에서 발표한 연구논문만도 90여편에 이른다. ‘파마콜로지칼 리뷰’, ‘파세브’, ‘뉴로사이언스 저널’ 등 저명한 국제학술지가 서 교수의 논문을 앞다퉈 실었다. 치매 연구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인사가 된 것이다.
원인 밝히면서 치료제도 함께 연구
서 교수에게서 더욱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단순히 연구실에 처박혀 실험기구나 만지작거리는 ‘책상물림’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치매의 원인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치료제 개발도 병행하는 것이다. “연구단의 궁극적인 목표가 치매 발생 원인 규명과 그에 입각한 치료제 개발”이라고 밝히는 것도 이와 맥락이 닿아 있다.
치매정복연구단이 현재 개발중인 치료제는 대략 5종류다. 1차 임상실험을 마치고 2차 실험을 목전에 둔 치료제만도 2~3개다. “치매를 정복하면 100살 이상 무병장수하는 인간의 꿈도 실현될 것”이라는 게 서 교수의 믿음이다.
하지만 곧바로 치매가 정복될 것이라는 조급함은 없다. “앞으로 10여년 정도 지나면 인간이 치매를 정복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신발끈을 죈다. 그래서 서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임상 의사로서 평생 환자를 치료해도 1백만명을 넘지 못합니다. 기초연구는 성과에 따라 수십억명을 구할 수 있는 치료약이죠. 요즘 젊은 연구자들이 임상 치료에만 몰리는 현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어린이 두뇌교육이 평생을 좌우한다
지난 2월8일, 서유현 교수는 58년을 꼭 채운 날을 맞아 의미 있는 ‘생일 선물’을 자신에게 안겼다. 최근까지 몰두한 연구 결과를 저명 학술지 ‘파셉’ 온라인판에 발표한 것이다. 각종 스트레스가 치매 발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논문이다. 이와 관련한 동물실험도 진행중이다.
“결국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완하고 억제하느냐가 치매 예방에 중요합니다. 동물실험 결과 1년 이상 장기 스트레스를 준 쥐가 그렇지 않은 쥐보다 뇌에 독성 단백질이 2배나 빨리 쌓인다는 걸 발견했죠. 다시 말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스트레스를 줄이면 치매도 예방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두뇌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성장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두뇌학습 교육을 위한 강의에도 열심이다. 더불어, 그가 소장으로 맡고 있는 서울대학교 인지과학연구소와 신경과학연구소가 이런 뇌 연구활동의 중심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서유현 교수는
서유현 교수는 197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신경약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코넬대 의대 교환교수로 일했다. 현재 서울대 의대 신경과학연구소장 및 인지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국제치매학회 이사로도 활동중이다. 2002년에는 과학기술훈장 웅비상을, 2004년 의당 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미래의 과학도에게 한마디
소의(小醫)는 직접 환자를 치료하고, 중의(中醫)는 환자를 생각하면서 치료하고, 대의(大醫)는 직접 연구에 매진해 의학 발전에 기여한다. 생명과학의 꽃은 의학이다. 임상의학이 화려한 꽃이라면, 그걸 떠받치는 게 기초의학이다.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신념을 가진 젊은 학도들이 많이 늘었으면 한다.
서유현 교수가 말하는 치매예방 10대 생활 수칙(6多4不)
1. 많이 읽어라
나이가 들수록 책을 읽고 쓰고 이야기하는 등의 지적 활동을 증가시키는 것이 치매예방과 발병 지연에 도움이 된다.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게임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강, 산, 도시이름을 매일 외우는 것도 좋다.
2. 많이 움직이고 운동하라
봉사활동을 많이 하라. 걷고, 춤추고, 노래하라. 집안일과 동네일을 하라. 운동은 가장 좋은 항우울제다.
3. 사회활동을 많이 하라
격리를 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인간에게 최고의 스트레스는 혼자 격리돼 있는 것이다. 격리는 육체적·정신적인 자극을 제거해 뇌신경회로의 퇴화를 촉진해, 치매를 앞당기게 된다. 대접받는 자세를 버리고, 사회와 가정에 봉사하라.
4. 많이 씹어라
오감 훈련을 하라. 많이 씹으면 기억력이 올라간다. 젊은이의 모습을 욕하지 말고 시각을 통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젊은층이 즐기는 음악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고 스킨십이나 맛사지로 피부 촉각을 자극하라.
5. 많이 웃어라
감정을 억제하면 암에, 화를 잘 내면 고혈압에 잘 걸린다. 등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는 두뇌신경세포를 발달시킨다. 젊은층과 자주 접촉하고 젊은 생각을 하도록 노력하라.
6. 우뇌를 많이 써라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좌뇌만 쓰는 것보다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우뇌를 함께 쓰는 것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 왼손을 오른손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우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
7. 스트레스를 피하라
건망증은 스트레스의 가장 중요한 증세다. 상대방과 즐겁게 대화하거나 같이 노래부르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8. 뇌 손상을 피하라
권투선수는 치매 위험성이 높다. 두뇌손상을 조심하라. 노인의 경우 겨울 빙판에 넘어져 머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습관적으로 때리는 것도 삼가해야 한다.
9. 알콜, 담배, 불필요한 약물, 알루미늄을 피하라
알콜은 뇌신경세포를 마취시켜 사멸을 촉진시키는 약물로, 치매유발인자로 자주 지목된다. 노령기에는 과음을 삼가야 한다. 의사의 권고 없이 불필요한 약이나 음식을 먹는 것도 뇌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
10. 생활습관병을 피하라
운동과 식이요법을 실천하라.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3대 영양소를 균형 있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뇌기능, 뇌세포 신호전달 기능에 필수적이다. 노인들도 무조건적인 소식보다는 식사량을 유지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섭취해야 두뇌가 건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