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휴대용 가방이로소이다
소지연
묵묵히 한 사람을 동행하려다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한 내 이야기입니다. 나는 진열대에 꼿꼿이 앉아 이제나저제나 데려갈 이만 기다리던 ‘샘소나이트 휴대용 가방’이었습니다. 초경량이자 최적의 기내용 크기로 갈색의 반짝이는 물결무늬를 입은 최신형 모델이 하필이면 험난한 신화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발탁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리스 신화여행이 출발하기 며칠 전 그이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내 제비처럼 잘 빠진 완벽한 자태를 단박에 알아채지 못한 여행자는 옆집 뒷집 다른 친구들을 둘러보고 만지작거린 후에야 내 앞에 섰습니다. “ 에헴! 드디어?” 나는 쾌재를 부르며 앞뒤로 한껏 뽐내어 보았습니다. 날렵한 등뼈를 쭉 뽑아 올려 그이 어깨에 축 늘어진 핸드백을 대신 업어 주었습니다. 나의 네발은 어떤 발걸음에도 앞장서겠다며 사방으로 문어발이 되어 미끄러졌습니다. 90% 침묵에 가까운 내 발소리가 마침내 그이를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택하기 전까진 그이에게도 우여곡절이 있었나 봅니다. “ 형님, 아무리 단체여행이래도 그것 하나 가져가면 편하기 이를 데 없어요. 장시간 비행에는 앞 좌석 밑으로 쌈박하게 밀어 넣고 두 다릴 척하니 올리고….” 분당에 사는 그이 의동생은 연전에 유럽 여행 갔을 당시를 떠 올리며 단언했습니다. ‘그 사람은 워낙에 살림꾼에다 재치 있지 아마?’ 처음에 주인은 갸우뚱하며 붙박이장을 한참씩이나 뒤져, 외장에 크고 작은 포켓이 잔뜩 붙고 바퀴가 두 개만 달린, 나보단 한참 덜 떨어진 서류 가방 하나를 찾았나 봅디다. 조금 전에 그이는 그 친구에겐 애석하다는 듯, 날렵한 나에겐 재빨리 친숙해지려는 듯 “ 맞아, 이제 그건 복잡하고 빈티지여서 중고 가게에나 가야겠지. 새로운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척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주인을 따라 열 밤 12일을 함께 달리고 잠자며 부대끼게 된 겁니다.
화물로 부칠 중 대자 크기 트렁크에 빼꼭 채웠던 일상품 중 꽤 많은 것들이 내게로 건너와 배 속을 채워 준 것까진 좋았습니다. 웬만큼 먹어도 일단 잠금 지퍼를 닫으면 너무도 단정해서 주인은 조금씩 조금씩 더 넣기 시작했습니다. “넌 그저 끌어주기만 하면 불평 없을 테지?” 날씬한 내 몸에다 심심하면 들여다볼 아이패드, 그의 건강을 지켜줄 한 뭉치의 의약품, 비상시에 갈아 신을 신발과 스웨터부터 바람막이까지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 주인은 기내에서 읽을지 모른다며 두꺼운 책까지 던져 넣었습니다. 배설되기 전의 음식물처럼 내 몸속의 물건들은 이리저리 쏠려 다녔습니다. 신화를 찾아 떠난다면서 세상 것을 왜 그렇게 한 묶음 안고 가는지 주인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멋쟁이 휴대용으로 뽑힌 것이 맞기라도 한 건지. 그렇지만 ‘ 발탁될 당시의 또 하나의 조건이었던 활용성이란 기대에도 어긋나지 않게 고분고분 내 자리를 지켰답니다. 이제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만 남아 있었지요.
아뿔싸! 아무리 몸집이 작아도 착, 이륙 시에 나와 같은 휴대용은 머리 위 짐칸으로 올려져야 한다는 상식이 잠시 잊혔던 걸까요. 갑자기 그이는 젖 먹은 힘을 다해 나를 들어 올리며 마치 의붓자식 다루듯 거칠기 한이 없더군요. 내 위에 발을 가져다주긴커녕 끝내 한 번 내려놔 주지도 아니하더군요. 이런 푸대접은 그리스의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내내 이어져서, 숙박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버스 밑 화물칸의 트렁크들 옆에서 작은 혹처럼 달랑거리게 했답니다. 아무도 나 같은 친구를 좌석에 대동하지 않았으니, 부끄럼을 많이 타는 주인이 혼자만 나를 데리고 탑승하기 뭣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무엇보다 그이는 매일 들르는 신전과 수많은 유물 유적과, 넘쳐나는 신화에 매료되어 나를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저녁에 호텔 방에 끌려 들어와서야 겨우 내 입을 열고 무언가를 한바탕 찾다가는 ‘에라!’ 하고선 지퍼를 꽉 물려 놓았습니다. 한 번도 수고했다고 쓰다듬어 주는 법도 없이 매번 내 몸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하루는 5년 전 당신 사위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북 청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꺼내어 두릅니다. 아침에 이오니아해에 부는 바람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쌤통이다. 머플러 너도 그만 바람에 날려 어느 신전에 묻히거라! ” 괜스레 심통을 부려 보았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진 미안하지도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더랍니다. 나중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방금 몰고 온 듯 세차게 휘몰아치는 해풍에 내 주인의 목이 썰렁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처음에 그이는 홍수처럼 들이닥친 신화와 유적으로의 정서 이입이 꽤 오래 걸리는 모양새였는데, 하필 돌아오기 이틀 전에야 어느 신에게 끌려갔나 봅니다. 단 한 번이었지만 영원이 될 수도 있었을 우리 둘의 이별을 감지하지 못한 채, 주인은 낯선 공항 어느 검사대에 나를 남겨두곤 허적허적 걸어갔습니다. 뒤늦게 나를 놓친 사실을 알아챈 그녀의 얼굴이 그동안의 올리브 빛에서 놀란 바다색으로 변해갔다고는 들었습니다. 나는 짝 일은 기러기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가 한참 만에 발견되는 기적을 얻었습니다. 그이는 심화하고 만 얘기를 주고받은 듯 몽롱한 모습이더군요. 또한, 무엇으로라도 흔적을 남겨 놓고 싶었던 걸까요. 목에 달았던 머플러를 바람 부는 언덕 저 멀리 올림포스산으로 선사하면서까지요. 사위의 증표를 잃고 멍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다 처량했습니다. ‘한 번만 조용히 나를 열고 보아줄래? 그것만큼 따뜻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포근한 갈색 목도리를 찾아 줄게. “ 다행히 머플러나 손수건 따위는 모두가 내 몸 안쪽 호젓한 곳에 자리 잡았으니까요. 그런데 주인은 이제 일상의 그것들에 넌덜이 다 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눕거나 버스에 앉거나 심지어 걸으면서까지도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 ‘아레오파고스’의 심판!” 같은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만 뇌까리며 자꾸만 신화의 어딘가로 걸어 들고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소화하는 만큼의 고대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답니다. 아테네에 있는 ’아레오파고스(Areopagos, 아레스의 언덕)라는 정의의 언덕 신들의 회의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했던 오레스테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자, 그를 데려간 아테네 여신의 자비로운 한 표로 무죄가 되었다는 얘기.
지금은 지붕이 날아가고 없는 오레스테스의 둥그런 무덤에서 망자의 숨결을 느끼며, 그이는 인간과 신이 소통하는 신비를 깨우친 듯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어떤 가혹한 살인을 저질렀을지라도 다시 한번 신의 정의로운 판단에 호소해 볼 수 있었던 ’아레오파고스‘ 앞에서 내 주인은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는 확신이라도 받았을까요. 그때부터 접하는 유적들은 이미 전설을 넘어 일상처럼 그이에게 덮쳐와, 마지막 탐방을 더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이를 따르며 더는 외롭지 않기로 맹세했답니다. 섭섭함에 지쳐 주인의 머플러에 내렸던 철없는 저주를 뉘우치며 말이지요.
크레타섬으로 향할 때 아테네의 호텔에 큰 짐은 맡겨둔 채 일박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랐던 시간은 내 진가가 빛나는 최적의 순간이었습니다. 부러움의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내 물결무늬는 찬란하게 파도쳤습니다. 그이도 이때만은 흡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겁니다. 아테네로 돌아오던 날, 심판대에 오르듯 나는 조금 주춤거리며 검사대를 나오는 바람에 그만 그이의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무척 외로웠던 내가 신화를 향한 아련한 그리움처럼 한껏 맥을 놓고 있었던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 내 방황 탓에 터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비행에선 마침내 휴대용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화물칸으로 옮겨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더는 검사대에 앉지 않도록, 더는 잊히지 않도록 단단하게 말이지요. 결국, 우리 여정의 마지막 시간은 그이와 함께 보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겁니다.
신품이자 명품으로 따라나섰던 나는 내 몸 몇 군데가 생채기 날 정도로 내 임무를 다했고, 때론 동굴 같은 버스 짐칸에서 몇 시간씩 홀로 요동쳤으며, 저녁이면 그이의 부름에 재빨리 내 옆구리를 열어 일상품을 불러 모아 주었습니다. 그이의 머플러처럼 자칫 사라질 뻔도 했지만, 그러나 무사히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이에겐 이제 신화들이 일상처럼 붙어 다니는 중이니, 아마도 내가 대신 신화 되어 벽장 속에 갇히려나 봅니다. 그래도 나는 압니다, 오래지 않아 방랑벽이 많은 주인이 신화처럼 다시 나를 불러내어 새 임무를 맡겨 주리란 걸. 그동안의 일상 벽을 넘어 새로운 도전을 만나는 그날을 함께 하길 못내 그리며, 나는 전설이 덕지덕지 묻은 부스스한 주인의 집에서 눈동자를 반쯤 뜨고 잠들어야겠습니다. 이제까지 무사히 돌아온 용사, 휴대용 가방이었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