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를 돌려다오"-추울때 더 좋은 그 곳에 가고 싶다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도 좋다.
추운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요즘 같은 날엔 압구정동이 아니라 절터에 가도 좋다.
절이 있었으되 지금은 사라진 곳. 그저 터만 덩그러니 남은 곳. 절터는 그래서 좋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곳들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한다. 빈 터에 어떤 집들이 있었는지 우리 모두 상상으로 마음껏 그려볼 수 있다. 절터에선 찾아오는 이 모두가 순례객이요 건축가가 된다. 그리고, 빈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힘이 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속삭이며 우리의 상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건축가 임형남 노은주 부부는 최근 낸 책 <이야기로 집을 짓다>에서 경주 황룡사터는 황룡사가 사라졌어도 황룡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썼다. 빈 터가 들려주는 그 이야기처럼 건축이란 결국 이야기이며, 사람 사는 곳은 이야기로 이뤄진 세상이라는 것이다.
왜 황룡사터를 가장 이야기를 확실하게 들려주는 곳으로 꼽았을까. 빈 공간은 비어 있기에 더욱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말이다. 1600년전 지어진 절은 사라졌어도 황룡사터는 땅에 새겨진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저 주춧돌 몇개뿐, 휘날리는 풀만 가득한 그 곳이 역사와 문화와 건축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 경주 황룡사터
영하 십몇도의 날씨에 몸이 움츠려드는 요즘, 춥기에 더 가보고 싶어지는 곳이 절터다. 비어있지만 상상으로 가득찬 공간, 비어서 바람이 더 세게 부는 곳, 몇개 남은 돌덩이와 탑들뿐이지만 그래서 더 웅장하고 더 고즈넉한 곳. 절터는 늘 사람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절터는 누가 뭐래도 경주의 저 황룡사터와 익산 미륵사터다. 하지만 그 말고도 좋은 절터가 여럿이다. 경주 감은사터도 있고, 충주 미륵리절터, 원주 거돈사터, 양주 회암사터 등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곳, 보령 성주사터가 있다. 영하 십몇도의 추위에 몸도 마음도 움츠려드는 요즘, 얼마전 다녀온 성주사터가 다시 떠오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더욱 매섭지만 시원한 성주사터, 그 곳엔 너른 벌판과 그 가운데 홀로 버티고 서서 수백년을 지켜온 탑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선한 얼굴의 돌부처가 있다.
넓디 넓은 성주사터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탑들이다. 근사한 석탑이 들머리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섰고, 그 뒤로 특이하게도 세쌍동이 3층탑이 트리오로 남아있다.
성주사터는 나말여초의 선문9산 가운데 한 곳이었다. 가장 번창했을 때에는 3000명 넘는 이들이 사는 거대한 불교타운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지금은 이렇게 빈터만 남았을뿐.
으리으리했을 거대한 절집들은 사라지고 이 키 큰 탑이 이 곳의 주인이 됐다.
저 탑은 보물 19호다. "통일신라 시대의 화강석 석탑으로, 각 층의 체감 비율이 매우 아름답다"고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자기 책에서 평가했다.
근데 몇층탑일까? 헷갈리면 위부터 세라. 맨 아래는 단이어서 층수에 넣지 않는다. 저탑은 5층. 근데 1층 아래에 굄돌이 있다. 고려시대 석탑들의 일반적 특징으로 꼽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 탑은 신라 때 것. 저런 양식이 이후 퍼진 것이다.
그러나, 이 멋진 탑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뒤에 줄지어선 탑 트리오일 수밖에 없다.
5층탑 뒤로는 땅에서 살짝 돋워 높인 금당 자리가 있고, 그 뒤로 세 탑들이 있다.
성주사터는 겉보기엔 텅 비어 있는 빈 터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독특한 곳이다. 한국 건축사에서 손꼽히는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우선 저렇게 5층탑 뒤로 3층탑 셋을 배치한 가람 형식은 이곳뿐이다.
그리고 저 탑들은, 자세히 보면 한번에 모두 지은 것들이 아니다. 앞쪽 5층석탑은 성주사를 처음 지었던 신라 후기의 것이고, 저 세 탑들은 나중 것들이다. 이 세탑 또한 한번이 아니라 따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쪽 동탑 서탑은 고려양식이 분명하며, 가운데탑은 다른 두 탑보다 약간 더 크고 14세기 이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당시 절은 1탑 1금당 체제였다. 탑 하나에 금당 하나.
성주사도 원래는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금당 뒤에 쌍탑을 세우고, 다시 몇백년 뒤에 동서탑 사이에 가운데탑을 세워 1탑-3탑식 가람배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절은 한반도에선 이곳뿐. 왜 그랬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미스터리다.
세 탑을 돌아보기 전, 그 옆에 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크지 않은 돌부터 하나.
휑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저 부처님. 이곳 사람들이 미륵불로 섬기는 부처다. 언제부터 저기 서있었을까.
다가가서 보면 제법 신경써서 만든 돌부처임을 알 수 있다. 거친 화강암에 목 부분과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을 정성껏 새겼다. 그런데 얼굴이? 그리고 손도?
얼굴 부분이 깨져 나가 시멘트로 메워 만들었다. 어색하고 조악하다. 그런데 그 조악함이 오히려 해학적이다. 아이들이 진흙놀이한 듯 엉성하면서도 웃기는 표정. 쿡쿡 찍어 낸 눈과 입이 화강암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민간에선 부처님 코를 갈아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국의 돌부처들을 보면 코가 없는 것들이 많다. 이 성주사 미륵불도 그렇게 얼굴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저렇게 얼굴이 망가진 불상을 보면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중생을 위하는 돌부처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석상은 깨지고 망가져도 백성들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코를 내어주는 부처. 그것도 부처의 일일터.
대저 조각상의 코란 저런 운명을 타고 나기도 한다. 그건 우리나라 돌부처들뿐만이 아니다.
조각상이 가장 먼저 망가지는 곳은 늘 얼굴이고, 그 얼굴에서도 코다. 톡 튀어나와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정을 맞는다.
영국의 괴짜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건축가의 배>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건축가가 로마의 건축 유적을 돌아다니다가 조각상의 코만 떼어가는 남자를 만난다. 작은 정과 망치를 들고 순식간에 몇번 망치질로 조각상의 코를 떼어가는 그 남자의 가방에는 떼어낸 조각상 코 부분들이 가득하다. 그런 반달리즘보다는 차라리 아들 낳자고 코를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더 진솔하다.
다시 세쌍둥이탑을 보자.
반듯하고 비례가 정갈하다. 그런데 탑 가운데에 무늬가 있다.
세 탑 모두 똑같은 저 무늬가 있다. 도대체 뭘까?
저 무늬는 `문'을 뜻한다. 돌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물론 진짜 문은 아니다.
저런 문을 새긴 이유는 석탑이 목탑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옛 목탑들(물론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에는 저렇게 문이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석탑으로 바뀐 뒤에도 문 무늬를 새긴 것이다. 초기 석탑들에는 실제 돌문이 달렸다. 익산 미륵사터 탑은 내부에 방이 있다. 나무탑이 석탑으로 바뀌어도 문화적 유전자는 저렇게 디자인으로, 양식으로 이어져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탑 구경을 마치면 본격적으로 어슬렁거려본다. 5층탑과 세 탑 사이 금당 자리로 간다. 금당이 사라진 이 자리엔 연꽃무늬 선명한 돌조각이 깨진 채로 남아있다. 천년 전에는 아마 이 위에 근사한 부처상이 올려져 있었으리라.
저 연꽃대좌위 불상은 장륙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륙상은 높이가 1장6척인 부처상을 말한다. 어떤 불상이었을까. 그 불상이 들어있는 금당은 또 어떠했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 그게 절터의 매력이다.
이제는 옆으로 갈 차례. 옆에는 비석을 모신 건물이 있다. 이 절을 창건한 낭헤화상의 공덕을 칭송하는 부도비다.
문화재청의 판단 가치로만 따지면 이 운치있는 절터에서 이 비석이 가장 중요하다. 국보 8호.
일단 규모가 크며, 조각 수준이 화려하고 정교해 신라말 부도비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저 빽빽한 비문은 무슨 내용일까? 한문을 해독못하는 나로선 읽고 싶어도 못읽는데, 동행한 동국대 윤선태 교수님이 설명을 해주신다. "최치원의 글입니다. 근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니, 어떤 내용이길래요?"
"최치원이 슨 걸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 낭혜화상이나 나나 별다를게 없는데 내가 왜 저사람 공덕을 칭해야 되느냔 말인가'라고 썼어요. 최치원의 자존심, 오기, 호방함을 보여주죠. 그러면서도 최치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낭헤화상의 그 높은 공덕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높이며 쓴 글솜씨가 일품입니다."
흠, 재미있는 인물이었구나. 최치원은.
생각해보면 최치원으로선 그럴 만도 했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그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은 불과 열두살때. 우리로치면 초딩 6학년이다.
어린 나이에 이역만리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런 어려움을 그는 재능으로 극복하려했다.
당시 당나라에서 벌어졌던 황소의 난 때 그가 황소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칼럼 <토황소격문>은 온 당나라의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이름을 얻어 고향 신라로 돌아온 것은 29살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자신감이 넘칠 나이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라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왕실은 권위를 잃기 시작했고 지방에선 호족들이 일어났다. 출신성분을 따지는 골품제도의 벽은 그럼에도 강고했다. 천재임을 자부했던 그는 뜻을 펼칠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그는 스스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골랐던 외직도 버리고 마흔살 이후에는 홀연히 자연속에 숨어들었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몇가지 전설만 남아 전한다.
그랬던 최치원이기에 자신을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울분은 컷고, 자기에 대한 자부심만으로 자신을 지탱했을 것이다. 당시 떠오르던 선종의 간판스타 낭헤화상에 대해 그가 `자기와 다를게 없다'고 썼던 것도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그래도 지금 우리는 낭혜화상은 몰라도 최치원은 기억한다. 최치원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러나 최치원이, 낭헤화상이, 연꽃대좌가, 5층석탑이, 성주사의 미스터라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이 절터에 밴 역사의 숨결을, 건축이 사라진 빈 터의 건축을, 추운 겨울의 정취를 그저 느끼는 것이 우리에겐 더욱 소중할뿐. 텅 비었기에 세월이 더 잘 보이고, 사라졌기에 더 상상하게 되고, 인걸이 갔어도 의구한 벌판을 보면 그것으로 족하다.
성주사가 아니라 어느 절터라도 좋다. 하지만 성주사를 아직 못가셨다면 보령땅에 갈 때 한번 들러보시길. 요즘처럼 추울 때라면 더욱.
by 구본준 http://blog.hani.co.kr/bonb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