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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3D 프린터
바람이 사물에 부딪힌다.
바람 소리가 사물의 모양을 외우며 날아간다.
가명을 가진 바람은 호수를 방문한다.
바람이 옮겨온 가명을 부려놓으면
청사진처럼 출렁거리는 수면,
인공이 자연으로 허락되고
가명이 본명으로 형상되고 있다.
호수가 본명을 가진 것들의 첫걸음을 허락한다.
여명이 석양이란 본명을 갖는 시간
한 짐승이 제 모양을 흘려보내는 그림자를 외운다.
짐승의 입술이 사람의 목소리를 불기 시작한다.
본능이 감정으로 허락되고 있다.
몇몇 감정은 사람에 도착하여
내면에서 출렁거릴 것이다.
감정
- 살아남은 사람
벽 앞에 사람을 세우고 전등을 켜네.
일 할쯤 큰 그림자가 생겨나네.
그는 왜 옮기려 했을까?
움직임과 고착의 거리가
사람보다 어두운 기호 문(文)자로 서 있네.
네발짐승이 갑골(甲骨)에서 기호 두 발로 섰을 때
두 팔은 사람이 처음 창조한 상상이었네.
몸 밖을 더듬는 형식이 상상임을 알아차리고
두 팔을 상상 밖으로 펼쳤을 때
뜻이 생겨나기 시작했네.
자세를 밝혀보는 문명(文明)이 생겨나고
상형과 표음의 거리를 기록하던 사람은
마지막 자세를 고민했네.
몸이 그림자에 누워 같은 크기가 되면
두 팔은 주검을 더듬어 목소리를 버렸네.
그는 왜 목소리를 밖이라 생각했을까?
이생에서 후생의 거리가 해독되고 있었네.
얼굴에 도착한 표정이
얼굴보다 일 할쯤 밝아져 있었네.
합자(合字)론
포옹이 풍습으로 떠돌기 전
동물의 자세로 사람을 궁리하던 그가
직립으로 두 손을 만들어 이성의 얼굴을 만졌다네.
이성의 표정을 가져와 제 얼굴을 꾸리고
이성의 체온으로 제 감탄사를 만들었다네.
이목구비가 뒤섞인 낯선 얼굴이 제 목소리를 냈으므로
포옹은 최초의 상형문자가 되었다네.
동물의 자세에 사람의 목소리를 합한 불완전이
수많은 기호로 옮겨졌다네.
불완전을 완전으로 오독하게 하려고,
상형문자를 표의문자 되게 하려고,
목탄과 붓을 만들어 뜻을 기록한 사람이 있었네.
찍고, 누르고, 머물고, 내긋고, 삐치고, 뻗고
뜻이 태도가 될 때마다 사람의 목소리가 늘어났다네.
기호가 자세를 구분하고
목소리가 문화를 구분하였지만,
아직도 뜻이 없이 통용되는 인류 공통 감탄사가 있어
뜻의 동의어 체온이 인종을 오간다네.
이것은 목소리를 부수(部首) 삼아
새로운 자세를 이루라는 첫 사람의 전언이 아닐까?
동물의 자세를 부수 삼았던 첫 사람은
목소리를 부수 삼는 내 자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네.
나는 가끔 낯선 목소리를 내느라
나를 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네.
첫 사람으로부터 건너온 체온을 끊임없이 배열하는
라디오를 놓아두는 법
살다 보면 유독 소중히 여기는 증거물이 있네.
이런 부작용에는 음양이 연결되어 있다네.
방전 없는 부사어 “이미”는
이성과 감성을 모두 소진하여 멈출 수 없다네.
느낌을 생각으로
생각을 걸음으로
걸음을 멈춤에까지 연결하여
끝내 추억만 발설하게 했던
;이미.
첫사랑은 장식장 위에 올려져 있네.
과거의 부품이 되어 주파수 복잡한 패배에
별자리처럼 많은 납땜이 찍혀 있어
첫사랑은 안테나 한 번 접지 못하는 형벌이었네.
이미와 아직 사이에는 수리공이 없어
눈 잘 띄는 곳에 진행형을 올려두었네.
증거물을 버리면 진심마저 방전된다는 것 알면서
이력에 쓸 수 없는 약력을 모셔왔다네.
진심이 이미를 신봉하기에
아직 더듬더듬 잡음을 되뇌며 살아야 하네.
끊어진 회로기판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왼손에는 납선을 들고
오른손에는 납땜기를 들고
긴 인연을 점으로 녹여 끊으며 절연을 잇네.
구할 수 없는 부품 자리에 내가 끼워져 있네.
의태어
이성의 앞모습을 뒤돌아서도록 부를 때
최초의 언어가 생겨났어.
기호로 적을 수 없는 알몸 소리였지만
느낌을 골몰하는 입모양이 태어났어.
고막과 망막을 오가는 미동은 온몸을 밝히는 파동이었어.
쌓이는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상상은 불면 밖까지 퍼져나가야 했어.
그리하여 밤이 더 길어지는 동지가 생겨났어.
어두운 내용을 가진 밝은 자세를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자신도 몰래 발걸음을 멈춘
짐승의 자세가 최초의 대답으로 해석되어
첫 사람이 태어났어.
체온을 해석하느라 여러 색깔이 생겨났어.
빨강이 먼 곳으로부터 온 자세란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빨강을 모으기 시작했어.
짐승의 자세를 빌려야만 건네줄 수 있는
체온이 있었어.
뒷모습에서도 드러나는 압필(壓筆)이었어.
첫댓글 오랫 만의 시집 출간이네요. 축하 드립니다. 언제나 그렇듯 책장을 넘기면 상형 문자 같은 어떨 땐 불립 문자 같아 다음 장을 넘기기가 참 조심스럽다. 이번에도 시집의 첫 시
3D 프린트에서 멈추고 댓글을 쓰고 있다. 중후한(무거운) 언어로 변환하는 시 전개, 그 끝에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작은 한 마리 짐승이 있다. 그 짐승이 많은 이들에게 출렁거리길......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