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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 감수/ 이수경 옮김
2020.5.11./ 와이즈베리/ 200쪽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오늘날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을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만들려는 일부의 시도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불편한 윤리적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도덕적 이해의 발전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도덕적 불편함과 현기증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를 펼쳐나가고 있다.
뛰어난 지능과 신체적 특성이 있는 아이를 갖기 위해 난자와 정자를 선택하는 시험관아기 시술, 운동선수들이 경기력을 높이려고 맞는 근육 강화제 주사, 성적 향상을 위해 ADHD 치료 약물을 복용하여 학습 집중력을 높이는 학생들, 불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배아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일, 그리고 동물 복제에 이어 인간을 복제하고 맞춤 아기까지 설계하려는 욕망……. 저자는 이런 다양한 생명윤리 논제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며 독자가 답을 찾아가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생명공학의 이용은 찬성하고 있으나, 맞춤 아기를 설계하는 것은 선물로 주어진 삶에 대한 경외를 잃게 만드는 것이기에 반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연구용 복제를 무조건 금지할 것이 아니라, 초기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를 마련한 가운데 그런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본문 중에서》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은 밝은 전망과 어두운 우려를 동시에 안겨 준다. 유전학은 인간을 괴롭히는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밝은 전망을 제공한다. 우려되는 점은 새로운 유전학적 지식으로 인해 자연으로서의 우리 모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p.20
유전적 강화의 윤리라는 문제와 씨름하려면, 현대사회에서 거의 간과되고 있는 문제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바로 자연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문제, 주어진 이 세계에서 인류가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문제는 거의 신학의 영역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의 철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새로운 힘을 갖게 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다. p.24
유전적으로 강화된 운동선수는 그렇지 않은 경쟁선수에 비해 불공정한 이익을 얻는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공정성을 근거로 유전적 강화에 반대하는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유전적으로 남들보다 더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선천적 불평등이 스포츠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27
성별뿐만 아니라 키나 눈동자 색깔, 피부색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성적(性的) 성향이나 IQ, 음악적 재능, 운동능력을 선택할 수 있다면? 또는 근육이나 기억력, 신장(身長)을 강화하는 기술의 완성도가 높아져 안전에 전혀 문제가 없고 모든 이들이 그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는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위의 모든 사례에서 도덕적으로 불편한 감정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원인은 수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술이 지향하는 목적에도 있다. 유전적 강화와 복제, 유전공학 기술이 인간 존엄성에 위협을 가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충분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인간성을 ‘어떻게’ 손상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나 번영의 어떤 측면을 위협하는가? p.38~39
사람들은 스포츠에서건 인생에서건 성공이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얻어야 할 무언가라고 믿고 싶어 한다. 선천적 재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존경심은 실적주의(meritocracy)에 대한 믿음을 난처하게 만든다. 또 칭찬과 보상이 노력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의문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불편함에 직면하여 노력의 도덕적 중요성을 부풀리며 타고난 재능의 의미를 평가 절하한다. p.46
유전공학으로 경기력이 강화된 운동선수의 진짜 문제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계발하고 발휘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인간 활동으로서의 스포츠 경쟁을 오염시킨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화란 노력과 계획성의 윤리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물로, 일종의 첨단기술을 이용한 노력 방식 있다. 계획성의 윤리와 그것이 동원하는 생명공학의 힘은 선물로 주어진 재능의 윤리와 반대 지점에 놓여 있다. p. 47
자녀를 선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을 설계 대상이나 부모 의지의 결과물, 또는 부모의 야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자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가진 재능과 특성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친구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그들이 지닌 매력적인 특성을 어느 정도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자녀는 그렇지 않다. 자녀가 지니는 특성과 자질은 예측할 수 없고, 가장 양심적인 부모라도 자식의 모습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신학자 윌리엄 F. 메이(William F. May)가 말한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p.67~68
생명공학 기술로 아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과도한 간섭과 관리가 수반된 요즘의 양육 방식과 정신적으로 비슷하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유사하다 해도 아이의 유전적 조작을 찬성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부모가 지나치게 관리하는 양육 관행에 물음표를 던져봐야 할 이유가 된다. 오늘날 자주 목격되는 과잉 양육은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놓친 채 과도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심리를 보여주는 징후다. 이것은 우생학에 가까워지는 불안한 징조이기도 하다. p.83
설령 아이에게 해를 미치거나 아이의 자율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생학적 양육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양육 방식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태도, 즉 정복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표현하고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로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선물로 주어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가 가진 자유의 일부분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과 끊임없이 교섭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p.107
우리 자신을 자연, 신, 또는 운이 만든 존재로 여기면 자신의 모습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유전적으로 지닌 재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주인이 될수록 자신의 재능이나 성과에 대해 더 많은 짐과 부담을 지게 된다. p.113~114
프로메테우스적 충동에는 전염성이 있다. 스포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육에서도 그 충동은 선물로 주어진 인간의 능력이라는 영역을 흔들고 잠식한다. 운동능력 강화 약물의 사용이 일상화되면 강화제를 복용하지 않은 선수들은 ‘발가벗고 경기한다(playing naked)’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예비 부모가 자녀의 유전자를 선별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면 그것을 피하는 부모들은 ‘계기판만 보고 하는 맹목 비행’처럼 여겨지고, 그 부모에게는 아이가 갖고 태어난 유전적 결함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p.115~116
선물로 주어진 재능의 우연성을 명확히 인식하면, 즉 성공이 전적으로 자신의 행동 결과만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 능력주의 사회가 거만한 가정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성공은 능력과 미덕을 가진 자만이 쓸 수 있는 왕관이며, 부자들이 부자인 것은 가난한 이들보다 그런 부를 누릴 자격이 더 있기 때문이라는 가정 말이다. p.118
만일 우리가 유전공학으로 인해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를 무시하고 운 대신 선택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개념은 점차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는 존재로 여기는 관점도 사라질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스스로 능력을 성취했고 따라서 성공의 원인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회 밑바닥의 사람들은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으므로 보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대신에, 단순히 부적격한 존재로 여겨지고, 따라서 우생학적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타고난 재능의 우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능력주의가 더욱 심해져 관대함도 줄어들 것이다. 유전학적 지식이 완벽해질수록 보험시장에서 드러나는 연대성이 사라지듯이, 완벽한 유전적 통제가 가능해지면 자신의 재능과 운이 갖는 우연성을 진지하게 숙고할 때 발현되는 실제적 연대성도 사라질 것이다. p.118~119
강화 논란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보다 중요한 두 가지 도덕적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여러 중요한 사회적 관행에서 구현되는 인간적 선(善)의 운명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 자녀 양육의 경우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규범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운동선수와 예술가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타고난 자연적 재능과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것, 특권과 좋은 운을 가진 것에 대한 겸손, 좋은 운명으로 얻은 결과를 사회적 연대라는 틀을 통해 기꺼이 공유하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태도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의 종류와 관련된다. 경쟁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우리 자신과 자녀를 유전적으로 설계하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신 세상에 맞추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사실 우리의 힘과 자율권을 잃어버리는 행동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기 힘들어지며, 정치적・사회적 개선을 향한 충동도 무뎌진다. 우리는 새로운 유전학적 힘을 이용해 “인간성이라는 뒤틀린 목재”를 똑바로 펴려고 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지닌 재능과 한계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123~124
현재 우리가 갖게 된 유전학적 강화 능력이 생의학의 발전에 따라 의도치 않게 우연히 생겨난 부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된 관점일지 모른다. 세상 위에 군림하며 인간 본성의 지배자가 되려는 의지의 궁극적인 표출물로서 유전공학을 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제한받지 않는 인간의 자유라는 관점에는 결함이 있다. 삶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를 사라지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긍정하지 않는 태도를 양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p.126~127
도토리가 잠재적인 참나무인 것처럼 배아는 잠재적인 인간이다. 현실적 인간과 잠재적 인간의 구분에는 분명 윤리적인 의미가 있다. 유정적(sentient;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 존재는 유정적이지 않은 존재와는 다른 윤리적 요구를 할 수 있다. 경험과 의식 능력이 있는 존재는 더 높은 윤리적 요구를 할 수 있다. 인간 생명은 단계에 따라 서서히 발달한다. p.147~148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 불임클리닉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당신에게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또는 냉동 배아 20개가 담긴 접시, 이 둘 중에 한쪽만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이때 여자아이를 구한다면 잘못일까? 나는 배아가 인간과 도덕적으로 동등하다는 입장의 옹호자 중에 배아 20개를 구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배아들을 진정 인간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다른 모든 상황이 동일하다면, 배아를 포기하고 여자아이를 구하는 것을 어떤 근거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p.152~153
현대기술과 상업의 도구화 경향에 맞서 싸우는 길은 인간 존중에 관한 이분법적 윤리를 고집하여 인간 이외의 모든 것에 공리주의적 계산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윤리는 모든 도덕적 문제를 인격체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둘러싼 싸움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는 생명과 삶을 선물로 보는 인식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인식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방종한 사용을 제한하는 힘을 갖고 있다. 맞춤 아기를 설계하기 위한 유전공학은 선물로 주어진 삶에 대한 경외를 잃게 만드는 오만함의 궁극적 표현물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착상되지 않은 배아로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것은, 치료를 증진하고 주어진 이 세계를 복구하기 위한 우리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인간의 독창적 능력을 고귀하게 사용하는 일이다.
미끄러운 경사길 오류, 배아 공장, 난자와 수정란의 상품화를 경고하는 이들의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배아 연구가 필연적으로 그런 위험들을 초래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연구용 복제를 무조건 금지할 것이 아니라, 초기 인간 생명의 신비로움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도덕적 규제를 마련한 가운데 그러한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
그런 규제책으로는 인간 개체 복제 금지, 연구실에서의 배아 배양 시간에 대한 합당한 제한, 불임클리닉 영업의 의무요건 강화, 난자와 정자의 상품화 제한, 특정 주체들이 줄기세포 라인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줄기세포 은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할 때에야 비로소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막을 수 있으며, 생의학의 발전이 인간적 감수성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