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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1. 아가 (내용분해) / -주제별 설교대전-
아가서는 내용이 계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명료한 내용분해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Ⅰ. 신랑과 신부의 사랑(1:1-2:7) Ⅱ. 무르익는 사랑(2:8-3:5). Ⅲ. 결혼(3:6-5:1). Ⅳ. 부재중인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5:2-6:9). Ⅴ. 아름다운 술람미 여인 (6:10-8:4). Ⅵ. 사랑의 경이로움(8:5-14).
2. 아가서 (개론) / -주제별 설교대전-
[1] 명칭, 저자 및 통일성 이 책은 성서의 다섯 두루마리(megilloth; 아가, 룻기, 에스더,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가운데 하나이며, 유대인들은 연례적으로 유월절 축제의 제8일에 그것을 낭독하였다. 아가서의 영어 제목Song of Songs는 히브리어 '쉬르핫쉬림'(Shirhashshirim)을 직역한 것이다. 명사를 속격 복수의 형태로 반복 사용한 것은 노래의 특별한 성격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표준방식이다. 즉, 그것은 그 노래가 노래들 가운데 최고의 것 또는 가장 탁월한 노래임을 의미한다. 반복적 사용외 용례는 다음의 성구를 참조하라. 1)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9:25; 2)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출 26:33; 3)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1장1절의 '솔로몬의 아가' 는 솔로몬에 대한 또는 솔로몬에 관한 아가라고도 번역될 수 있지만, 솔로몬 왕을 아가서의 저자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아가서의 내용이 솔로몬이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놀라운 지혜의 능력과 충분히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왕상4:32,33),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는 부정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 아가서의 통일성 문제는 좀처럼 제기될 수가 없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는 동일 어구가 세 번(2:7,3:5,8:4)반복해서 나타나며, 아가서 전체에 흐르는 비유적 표현이 동일하고, 또한 동일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2] 해석 방법 아가서가 문학 쟝르(genre)상 사랑의 시가 (詩歌)라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해석 방법인데 지금까지 행해진 해석의 방법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우의(寓意)적 해석 이러한 해석은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인데 그것이 기독교회로 전해졌다.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하나님과 선택된 백성사이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기독교회는 아가서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이 반영된 것을 보았다. 이것을 원래 헹스텐베르그(Hengstenberg)및 카일(Keil)이 주장해 온 견해이다.
2)희곡적 해석 힐리취 (F.Delltzsch)가 주장한 이 견해의 핵심은, 아가서가 솔로몬을 묘사한 희곡이며, 그 내용은 순박한 소녀 술람미 여자와 사랑에 빠진 그가 그녀를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데려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특별한 형태인 '목자가설'은 아가서에 제 3의 인물로할 목자를 등장시키는데, 술람미 소녀는 솔로몬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절을 지킨다.
3)유형론적 해석 이 방법도 역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깊은 사랑이 아가서에 묘사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에 따르면 솔로몬 왕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신부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간주된다. 이 견해가 우의적 해석 방법과 다른 점은, 후자의 경우처럼 모든 구절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아가서 본문의 언어를 정당하게 다루려고 한다는데 있다.
4)자연적 또는 사실적 해석 이 방법의 기본 사상은 아가서가 인간의 사랑을 찬양하는 시라는 것이다. 그러한 논점 때문에, 바꿔말하면, 아가서가 정경 (正經)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견해의 지지자들도 이 사랑의 노래의 궁극적 의미에 관하여 견해를 매우 달리 할 수 있다. 이러한 논평은 사실적 해석 방법이 옳다고 하는 가정 아래 해석되어 진다. 이 접근 방식을 따르면, 아가서가 갖는 정경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a) 아가서는 '최고의 노래 '로 불리우며 또한 그렇게 이해된다. 여호와께서 그의 섭리로 하와를 아담에게 인도하시고 그의 아내가 되게 하셨을 때에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불렀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노래이다. 아가서는 부부간의 사랑을 솔직 담백한 언어로 찬양하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육체적 아름다움과 부부애를 저열 (低劣) 한 것으로 여겨 멸시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내리신 선물이므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그 자체와 목적에 있어 선하고 완전하다.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영적인 것보다 열등하다 하고,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결혼한 것보다 더 고결한 것이라고 치켜 세우는 비성경적 이원론에 대하여 아가서는 강력히 경고한다.
(b) 다음은 (a)항과 대조되는 입장인데 아가서가 우리에게 육체적 아름다움에 매혹되지 말며, 결혼의 생물학적 측면을 우상화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이다. 육체적 아름다움과 매력이 솔직하게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가서에 표현된 사랑의 관계는 고상하다. 그 어느 곳에도 음란하며 방탕하다고 말할 수 있는 묘사가 전혀 없다. 아가서는 우리에게 결혼에 있어서의 이상적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결혼을 예증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러나 모든 결혼이 이처럼 깊은 사랑의 결합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아가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순수한 결혼 관계만이 이러한 목적에 부합된다.
(C)아가서를 읽을 때,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감긱적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다. 그 분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의 육체를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아담에게 자기와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배진을 갈망토록 깨우치시며, 또한 창조역사의 최고 절정인 인간 최초의 신부를 그녀가 그리는 신랑 곁으로 인도하셨다. 아가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또한 이성 (異性)에 대한 우리 태도의 그릇된 점 및 결혼 생활에 있어서 육체가 범하는 잘못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에 성령께서도 이 아가서를 통하여 거룩한 결혼 생활의 구속자이신 동시에 성별하여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께로 죄인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이와 같은 사랑의 결합이 순수하며 거룩하다는 사실을 보고 체험함으로써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의 관계, 즉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티없이 맑고 부숴버릴 수 없는 사랑의 결합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아가서는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찬양인데, 창세기에 의하면 그분의 창조하심에 있어 으뜸이 되는 것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신 것과 그의 배필이 된 여인을 만든 사실이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의 선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아가서에서 인간의 사랑 곧 남녀의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으로써 더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 관계의 신성함을 저하시키거나 의심하는 모든 사도들은 아가서의 강력하고 의미심장한 표현에 의해 일축될 것이다.
3. 아가서의 구속자적 해석 / - 소재열 목사-
‘아가서’라는 말은 ‘아름다운 노래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이 아가서는 솔로몬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원문에는 “노래 중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가서는 유대인들이 여러 축제 때 읽는 다섯 권의 책 가운데 첫 번째 책입니다.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읽었고, 오순절에는 룻기서를 읽었으며 장막절에는 전도서를 읽고 부림절에는 에스도서를 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기념하는 날에는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었습니다.
(1)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가서의 어려움
아가서는 성경 66권 가운데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 과 술람미라는 여인과의 사랑의 대화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의 관계를 시적으로 묘사한 아가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성경 적인가 라는 문제는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가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아가서를 풍유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라는 해석의 열쇠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 66권 가운데 아가서는 참으로 어려운 성경 중의 하나입 니다. 신약에서는 한번도 아가서를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런 말을 했습니다.
“내 형제여, 아가서 해석에서 자네는 너무나 큰 해석상의 차이를 발견할 것일세. 이렇게 다른 해석들이 많은 이유는 아가서가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통 같기 때문이네.”(사디아(Saadia) 아가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고충이 담겨 진 말입니다. 주후 200년경의 히폴리투스는 1:4에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끄신다.”에서 “나”는 그리스도께 결혼한 자로서 주님께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하고 1:5에 “내가 비록 검다”라는 것은 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4:5에 나오는 “두 유방”은 구약과 신약을 가리킨다고 보았 습니다. 5:10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게 뛰어난다”는 성만찬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버나드는 아가서를 통해 어떤 육적인 욕망의 제시도 배제하면 서 아가서를 성과 죄로 때묻지 않는 영혼의 사랑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더햄이라는 사람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적용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15에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지도자들 인 이단, 분리주의자들을 크든 작든 간에 뿌리 채 뽑고 교회를 도우도록 요청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알레고리칼한 풍유적 해석들은 아가서 다양한 부분에서 보여지는데 2:16과 6:3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나의 사랑하는 자 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라는 말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하신 부부일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런 풍유적 해석들은 아가서 자체 속에서 그 영적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열쇠가 없습니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적나라한 표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는 우리들의 강단 설교에서 제외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문화적인 풍토가 그런 성적인 표현에 대한 금기시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두 유방-목-눈-코-머리-머리털로 오고가면서 아름다운 성을 노래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2,000년 동안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성도의 사랑으로 영해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알레고리칼 하게 해석함으로써 아가서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사이의 사랑 노래를 현장감 있게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지 혼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성경의 통일성에 입각한 아가서
아가서는 성경 전체의 맥락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가서 역시 성령으로 감동으로 기록된 신적 권위를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인 전망 가운데 아가서 역시 변함없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그 섭리가 장엄하게 파노라마 형식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관계를 맺을 때에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인가 라는 관점으로 출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용납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얼마나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자로서 구약은 예언으로 신약은 성취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약은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메시아를 이 땅에 사랑과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서 임하실 것을 약속해주셨는데 이 관점의 맥락이 아가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가서의 기록자는 솔로몬 왕입니다. 그 솔로몬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다윗의 많은 아들 가운데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 =여디디아”(삼하 12:25)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를 드러내는 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솔로몬은 다윗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었고 그 같은 정신의 계열에서 신약 메시아가 오셨습니다(마1:7). 죄 없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 가담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우리야의 정신을 이를 자로서(마1:6) 솔로몬이 선택되었고 그 계열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없이 희생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이사야 53장) 오신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계시적 사건이 아가서에서 솔로몬을 통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노래한다고 해서 그것이 계시가 되고 노래중의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자가 어떠한 자격으로 이 노래를 불러서 노래중의 노래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를 위해 섭리하신 반열에서 출현한 자여야 하는데 그가 솔로몬이었고 이 반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로 까지 이어집니다. 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과 사랑이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느냐 라는 관점으로 설명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렇게 설명해야 성경 전체의 통일성 있는 관점과 그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할 때 나타난 결과나 적용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와의 연합된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성경을 펼치자 마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무조건 우리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적용 문제부터 뛰어 들면 많은 함정들이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서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사랑과 자비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
8:6에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가서를 읽어보면 이런 사랑에 대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금방이라도 같이 만나 재미있게 살 것 같은데 그런 가운데 일이 잘 성사되지 않고 간장을 태우는 긴장이 여러 번에 걸처 반복됩니다. 여기에서 솔로몬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란 어떤 난관이 온다고 할지라도 중도에 포기될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까지 사랑을 끌고 가느냐하면 죽음과 비교되는데 까지 끌고 갑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랑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롬5:8)와 같은 사랑입니다.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만나고 싶은 감정은 결국 예루살렘 온 처녀들까지 술렁거리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 온 처녀들까지 언급함으로서 얻은 결과는 솔로몬 왕의 이미지를 좋게 했을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고 말한디면 취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분, 무려 천명의 여자를 소유하고 있던 왕(왕상 11:3)이었지만 한 여인(술람미)를 위해서 그토록 애간장을 태우며 자신의 신분과 체면과 관계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서 자신의 소유로 삼은 왕(2:16,6,3,8:6), 이제 여인을 사랑하되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왕, 스스로 찾아가고(5:2), 또 안보이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왕(6:3)의 모습을 적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다윗과 함께 하셔서 언약하시고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계승자인 왕이 그의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테마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랑의 결정체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계시자로 오실 것입니다.
(4) 말씀에로 초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허다한 우리들의 죄악을 덮었습니다. 십자가를 통 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로부터 우리들을 구원 하셨습니다. 그런 구원의 감격과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로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시다. 은혜의 영광은 오직 예수 보혈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욕망과 그 욕망의 보상심리들을 저주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장난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어떤 도움과 노력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들을 푸른 초장으로 안내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그 어떠한 이야기와 사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를 했는데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가슴아파하고 시험들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배신과 억울한 누명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간직한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경외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미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입니까? 이 땅에서 대가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은밀한 가운데서 일하므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들의 수고가 헛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아가 (설교자료) / -주제별 설교대전-
[1] 사랑과 투기에 대한 사실 [2] 그리스도의 은혜 [3]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 [4] 나의 사랑하는 자 [5] 그리스도의 사랑 [6] 섬김에 있어서의 협동 [7] 여호와의 동산
[1] 사랑과 투기에 대한 사실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8:6,7).
(사랑에 대한 사실)
1.죽음 같이 강함
2.많은 물이 꺼치지 못함
3.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함
4.온 가산을 다 주고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음
(투기에 대한 사실)
5.음부 같이 잔흑함
6. 불 같이 일어남
7.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음
[2] 그리스도의 은혜
8. 그늘의 은혜 -외부적 은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 2:3).
9.과실의 은혜 -내부적 은혜 아2:3 (8을 보라)
10.잔치의 은혜 -누리는 은혜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아2:4).
11. 사랑의 은혜 -보호와 안위의 은혜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아2:5).
[3]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
12.우리에게 오고 계심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아2:8).
13.우리의 벽(불신앙)뒤에 서심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2:9).
14.창으로 들여다 보심 아 2:9 (13을 보라)
15.우리를 초대하심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0).
16.우리를 격려하심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1-13)
[4]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2:16).
17.나의 사랑하는 자는-값진 소유 1)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외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73:25). 2)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2:7).
18.내게-개인적 소유 1)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1:47). 2)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19. 속하였고-현재의 소유 1)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5). 1)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 13:6).
20. 나는-귀중한 소유 1)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사43:4). 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5:25).
21.그에게 -값으로 산 소유 1)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2)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22.속하였구나-영원한 소유 1)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걸이니라 (요6:39). 2)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10:28).
[5]리스도의 사랑
23.죽음 같이 강함-능가할 수 없는 사랑 1)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특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8:6). 1)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24.많은 물이 꺼치지 못함-억누를 수 없는 사랑 1)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8:7). 2)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달지못하게 하소서 (시69:2,14,15).
25.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함-측량할 수 없는 사랑 1) 아8:7 (24. 1)을 보라) 2)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9).
26. 온 가산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음 -살 수 없는 사랑 아 8:7 (24. 1)을 보라)
[6]섬김에 있어서의 협동
27.함께 들로 가자-복음 전도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아7:ll).
28.동네에서 유숙하자-성도의 순례 아7:11 (27을 보라)
29.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자-목회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7:12).
30.귀한 실과를 구비하자-섬김의 결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아7:13).
[7] 여호와의 동산
31.친교의 동산 창3장
32. 교회의 동산-잠근 동산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4:12).
33.갈등의 동산-겟세마네 동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요18:1).
34. 정복의 동산-그리스도 십자가의 동산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19:41).
35.완성의 동산-하나님의 낙원의 동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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