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징(權徵, 1538년 ~ 159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약하였다.
본관은 안동, 자는 이원, 호는 송암, 시호는 충정으로 찬성사 권근의 후손이고 사직 권광의 아들이다. 156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고 1567년에 주서, 1568년 병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고 《명종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여러 청환직을 거쳐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이르고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전주 부윤 때 경내에 정여립이 살았으나 사람됨이 꺼려 만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안변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586년 형조참판, 1588년 충청도와 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쳐 1589년 병조판서로 승진하였으나 정철의 실각으로 평안도관찰사에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경기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임진강 전투에서 왜군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으나 패배했고 광해군의 분조에서 경기도순찰사로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후 권율과 함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 의병들을 규합해 왜군과 싸웠고 1593년 한양 탈환에 참가하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를 주장하자 왜군을 끝까지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공조판서로 전란 중 훼손당한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보수하였고 1594년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주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다음 글은 권징의 묘갈명 입니다.
묘갈명[墓碣銘] 우암 송시열 씀 :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에 새기는 글
한강(漢江)의 남쪽 월천리(月川里)에 고(故) 송암(松庵) 권공(權公) 휘(諱) 징(徵) 자(字) 이원(而遠)의 묘소가 있다. 처음에 공이 약관(弱冠)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권력을 쥔 간신(奸臣)이 사위를 삼으려고 하자 거짓으로 앉은뱅이처럼 꾸며 회피하였고,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이 되자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악(惡)을 봐주지 않았는가 하면, 대비(大妃)의 병환이 위독하여 불공(佛供)을 들이라는 하교(下敎)가 있어도 받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벼슬길이 조금 순탄하지 않았으나 높은 명망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의 낭관(郎官) 등은 모두 일시 최고의 선발이었다. 일찍이 조대(漕臺)에 있을 때 큰 고을 목사(牧使)를 퇴출하여 조정의 명을 엄숙히 한 공로로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고 재차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 다스린 바가 신명(神明)하다고 일컬어졌으며, 정여립(鄭汝立)이 전주의 경내에 살고 있었으나 공이 전혀 친근히 하지 않았다. 그때 요로(要路)에 정여립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조정으로 들어갔다가 또다시 지방으로 나갔는데,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임명되었다가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전직되었다. 공이 먼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혼자 도성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공에게 하교하여 도성으로 올라와 어머니에게 문안하고 임소(任所)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돌아왔다. 상복(喪服)을 벗자 특별히 병조 참판(兵曹參判),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남쪽과 북쪽의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었는데, 임금이 공의 재능을 중히 여겼으므로 선후로 공에게 궁시(弓矢)를 내려 충청도(忠淸道)와 함경도(咸慶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임금이 공을 불러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하고 말하기를, “지금 병조는 권징이 아니면 맡길 수 없다.”고 하였다. 정여립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자 간관(諫官)이 당시 정승(政丞)이 밀고(密告)한 자를 죽여 옥사(獄事)를 뒤집으려고 한 일을 논하였는데, 나중에 그 일이 발각되었을 때 총애를 받은 신하가 은총을 믿고 당류를 비호하느라 사실대로 아뢰지 않은 바람에 간관이 축출되었다.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언론의 관원이 견책(譴責)을 받는다면 조정에 비록 말을 사슴이라고 가리키는 간신(奸臣)이 있더라도 그 누가 말하겠습니까? 지난번에 간당(奸黨)들이 정여립을 추대하여 충현(忠賢)을 공격하였으니, 만일 정여립이 역모로 죽지 않았더라면 조정이 거의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의 조정이 되었을 것입니다.”고 하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그때 공을 구제한 사람이 있어서 임금의 노여움이 풀렸으나 결국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고 말았다. 그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관서(關西)의 경내에 안치(安置)되어 여러 사람의 노기가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았는데, 공이 그와 가까운 사이를 신속히 끊지 않는 데 좌죄되어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倭賊)이 침범하자 조정에서 특히 근본을 걱정한 나머지 특별히 공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서용(敍用)하였는데, 공이 맨 먼저 왜적을 방어하는 대책을 개진하였으나 공을 기탄하는 자들이 저지하였다. 왜적이 깊이 들어오자 공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漢江)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갑자기 서쪽으로 피난가면서 호위하라고 명하였으므로 병력을 원수(元帥)에게 넘겨 주고 뒤따라갔다. 왜적이 한강을 건너자 임금이 공에게 말하기를, “임진강(臨津江)을 수비하라.”고 명하였으므로 공이 도망쳐 돌아온 장수들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고 같이 임진강을 사수(死守)하자고 권하였다. 공이 왜적과 맞서서 형세에 따라 물리칠 수 있는 대책을 세웠으나 여러 장수들이 이행하지 못하였다. 관군(官軍)이 불리하자 공이 앞장서서 정예병(精銳兵)을 선발하여 왜적과 접전(接戰)하자 왜적이 감히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병환이 나 군사를 지휘하지 못하자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져 버렸다. 공이 통곡하고 삭녕(朔寧)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력을 불러 모았는데,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군기(軍紀)를 잃지 않았으므로 어사(御史)가 이르러 군문(軍門)을 들어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평양성 안에 우물이 없었는데 공이 전에 열 길의 우물을 파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놓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수만의 병력이 힘입었다. 명(明)나라 병력이 나오자 공이 듣고 곧바로 이를 알리어 사기(士氣)를 고무시켰다.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진 뒤로 길이 막혀 대소(大小)의 병기(兵器)가 조달되지 않아 조정에서 견책(譴責)을 내렸는데, 이윽고 분조(分朝)에서 관직을 박탈하자고 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또다시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서용되어 강도(江都, 강화)로 들어가 서남쪽의 군사와 대응하고 명나라 군사의 식량을 조달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의 적을 격파하고 이어 진군(進軍)하니, 공이 힘을 다하여 군량을 공급하고 혹은 스스로 짐을 지기도 하자 아랫사람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군량이 부족하지 않았다. 왜적이 선왕(先王)의 능(陵)을 훼손하자 공이 산릉(山陵)의 제조(提調)가 되어 복원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진휼사(賑恤使)에 임명되어 여러 재상들과 같이 제독 이여송에게 왜적과 화친(和親)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임금이 도성(都城)으로 돌아왔으나 왜적이 여전히 해안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을 뵙고 ‘백성을 양성하고 교육시켜 자강(自强)을 도모해야지 명나라의 병력에게만 요청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병환이 갑자기 심해져 다시금 일을 맡지 않았으나 상소를 올려 대계(大計)를 개진하였는데, 전후 상소가 정성스러웠다. 공은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에 태어나 무술년(1598년 선조 3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공의 관향은 안동(安東)이고 선조는 신라(新羅)의 왕족 김씨(金氏)인데,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지금의 성을 하사하였다. 그 뒤 대대로 유명한 사람이 났고 공의 아버지 권굉(權硡)에 이르러 매우 훌륭한 학문과 덕행이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 달랐다. 일찍이 도적을 만났을 때 동요하지 않고 행동이 차분하자 도적들이 놀라 감복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고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고 녹봉을 항상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는 임금의 비위를 건드리면서도 간사한 자를 물리침에 있어 정성스럽게 분변하고 확고하게 저지하였으며, 지방과 변방의 장관으로 나갔을 때 형벌과 은덕을 아울러 사용하였으므로 떠난 뒤에 사람들이 반드시 눈물을 흘리고 사모하였다. 조정의 녹을 먹는 사람은 하찮은 닭이나 돼지를 살펴서는 안 된다고 여겨 항상 공의자(公儀子, 노 목공(魯穆公) 때 청렴 결백했던 정승)의 소행을 사모하였으며, 또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 말하기를, “효우(孝友)와 청백(淸白)만 물려주면 된다.”고 하였다. 화평(和平)한 덕이 안에 쌓이고 충신(忠信)의 행실이 밖으로 드러났으니, 많은 미덕을 겸비한 군자(君子)라고 이를 만하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정숙하고 명철하며 유순하고 아름다워 지어미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하였고 또 어진 자손을 많이 두었으니, 또한 공의 덕이 가정에 행해져 무궁하게 전래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너무나 훌륭한 그 대부(大夫) 천부적으로 순수했도다. 효성으로 자식 노릇 하고 충성으로 신하 노릇 했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니 몸에 도덕이 구비됐도다. 이미 지니고 또 찬란하여 길이 후인(後人)까지 미쳤도다. 힘을 쏟아 무예로 지키니 실로 중흥(中興)을 협찬했는데, 어찌 태상(太常)에 기록하여 공 재능 보답치 않는가? 용틀임 비석 마련하여 박사(博士)가 명(銘) 새기려 하니, 내 임시 개략만 뽑아서 그 묘소에 표시하노라.
▼ 묘갈명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