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장천 먼저 간 선학들이여, 자네들의 행동이 돋보이네 그려!
과거 외교 관이란 직업을 갖다 보니, 서울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만날 수 있던 시간이란 하느님이 나에게 부여해 준 가장 값비싸고 소중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직업상 국내에서 잠시 머물다가 낯선 이국 땅으로 떠나야 하던 나로서는 남달리 그립고 보고 싶었던 것이 친구 들였다. 여러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생각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동기 모임이었다.
「까까중」머리의 50여 년 전,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난히도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의 모임으로 「미르 뫼」라는 모교 이름을 딴 회합이 있다. 15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사회 각 분야에서 개미들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등교 길 근처의 여학교 담장을 지날 때면 의례히 소변을 보던 유별난 개구쟁이 출신의 방송국(사) 이OO 국장, 교실 책상은 도맡아 손질하던 과학자 출신의 이 OO 서울공대 교수, 남의 교모는 보이는 대로 찢어놓던 「악동」(?) 추OO 변호사, 여학교 담 너머로 남의 책가방을 던지기 좋아하던 김OO 장군, 기침만 해도 병원에 가라는 돌팔이 의사 김OO 박사, 남의 도시락이라면 몽땅 훔쳐 먹던 욕심쟁이 대영㈜의 윤OO 회장, 머리가 빤짝빤짝하고 웃기는 것이 직업인 아이디어 맨 이OO 회장, 경제정책이라면 남에게 발언권조차 주지 않는 재무부 출신의 한OO 차관, 등등 모두가 색다른 사람들이기에 서로 정에 주린 것처럼 좋아들 한다.
한 달에 한번 만나던 이 모임을 누구나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 때는 항상 웃음바다를 이루는 축제와도 같았다. 「사랑방」같이 푸근하고 오순도순하기도 한 이 글방 모임에선 서로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 회원 모두가 선생이기도 하고, 또한 학생이기도 하였다.
舊 소련의 붕괴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고, 2015년쯤 통일된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떠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부터 고혈압 치료법은 물론이고 상속 법까지 폭 넓게 다룬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탤런트 최진실 씨의 20년 후, 웃는 모습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로 비약하기도 했다. 모두가 평범하고 보통 수준의 화제이지만,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여기서는 출세가 어떻고 하는 골치 아픈 이야기들은 피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그 동안 푼푼이 모은 장학금으로3명의 학생들을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였고 그 중의 한 명이 17년 전, 그리고 나머지 2명은 94년도와 그 다음 해에 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묻지 않기로 우리들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당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구좌에 일단 선정되면 장학금이 정기적으로 나갔다. 우연히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이들은 의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클럽을 함께 만든 친구들이 하나 둘씩 선학(仙鶴)이 되어 구 만리 장천을 향해 떠난다. 벌써 말이다. 그런데 엊그제 연평 도에 북한군이 또 무차별로 포를 쏴, 요즈음 이 나라는 시끄럽다. 그리고 북한은 이번 사건으로 그 동안 요란하게 말로만 떠들던 남북한문제가 분단국 한국의 민족문제가 아니고 김일성 체지 유지를 위한 일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생각해보니 정말 나로서는 소중한 시간에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귀중한 친구들로서 다시 내가 외교관으로 해외로 나가기 전에 모든 정을 듬뿍 주고 싶은 사람 들였다. 특히 그 동안 이 세상을 하직한 친구들이 연평 도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더더욱 보고 싶어졌다.
“아~ 친구들이여, 지금쯤 자네들이 장학금을 준 사람들이 의사로서 이 나라의 아픈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다네” 나는 하얀 구름이 피어나는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끝.
(권영민: 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주 독일 대사/저서: 자네 출세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