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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적지
다산유적지(남양주)
다산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다산(多産)으로 생각될 만큼 많은 책을 생산하였다. 이곳저곳에 흔적을 많이 남긴 데다, 여러 형제가 함께 이름이 나 언덕 위의 높은 봉우리가 되었으므로 다산(多山) 같기도 하다. 유교에의 천착과 함께 천주교의 머리로서의 역할도 작지 않아, 종교를 두고 수많은 논란을 야기해서 보는 이에게는 다사(多思)를 요구한다. 다사(多思) 덕분에 미뤄둔 원고를 이제야 쓰는 것이 게으름의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조안면 능내리?)
방문일 : 2020.4.23.
1. 마현 유적지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유적지에는 여유당생가, 사당과 전시관, 문화관, 실학박물관 등등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져 있다.
천진암(天眞庵)은 여주 주어사(走魚寺)와 더불어 남인계 학자들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와,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등이 유교경전을 연구하다가 서학으로, 천주교 신앙으로 이행해갔던 초창기 천주교 발상의 사적지로 알려져 있다. 이벽(李檗)이 내려와 중국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서적과 〈천주실의 天主實義〉 등을 소개하여 학문에서 신앙으로 전환한 곳이다.
이후 폐허가 된 천진암을 1962년 확인하였고, 1979∼1981년 사이에는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의 묘소를 이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신유사옥 때 희생되었다. 1984년 이후에는 대대적 성역화 작업을 하고 천주교 성지를 조성하였다.
다산은 죽어서도 평생 화두였던 천주교의 성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신유사옥 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 형 약종의 묘소까지 함께 내려다보고 있으니 죽어서도 천주교를 놓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다산은 1762년(영조38)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고 서울로 옮긴 후에도 수시로 왕래했다. 1818(준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이곳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내다, 1836년(현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다산이 태어난 이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진호(1792-?)라는 선비가 1823년(순조 23)에 과거에 낙방한 벗들과 함께 서울에서 단양 도담까지 배를 타고 한강을 오르내린 내력을 기록한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는 마현(馬峴)을 지나는 길에 유배가 풀려 돌아온 정약용(丁若鏞)을 찾아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생가
2. 생애
그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로 진주목사를 지냈으나, 고조 이후 삼세(三世)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한 시기이다.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이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다산도 근기학파의 중심 인물인 이익의 유서(類書)를 공부하게 되었다.
2)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체포되던 때까지.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의 경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 화성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3) 1801년 이후 1818년까지의 유배기간.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는 강진 유배기간을 학문 완성의 시기로 활용하였다.
4) 1818년 57세에 해배 이후 1836년 생을 마칠 때까지. 이 시기에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 저술작업을 계속했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다산 동상
4. 정약용 가족ㆍ친인척
* 정재원(丁載遠) : 3처 5남 5녀(未詳), 의령 남씨(1남), 해남윤씨(3남), 장성김씨(1남)
정약용 : 부친 정재원(丁載遠), 모친 해남윤씨, 5남 5녀? 중 4남(3처 김씨의 아들 약황을 보통 거론하지 않는 듯). 윤두서가 다산 외증조부다.
1) 정약현(丁若鉉) : 이복 맏형. 첫 부인이 이벽의 누이. 딸 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하여 나중 제주도에 관노로 가게 된다. 황사영 사건으로 부인 이씨 거제도 유배,
이벽 : 정약현 처남. 『성교요지(聖敎要旨)』 저술. 천주교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
정명련(丁命連, 1773년생), : 정난주. 황사영의 부인. 세례명 마리아. 37년간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았다. 난주(蘭珠)는 관노 시절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2018년 정명련의 제주에서의 삶을 그린 소설이 나왔다.(김소윤, <난주>, 은행나무, 2018)
황사영 : 정약현의 사위, 정명련의 남편. . 신동으로 소문났던 그는 열여섯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승훈과 정약종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알렉시오. 신해사옥 후 충청도 제천 토굴에서 백서를 써서 이 사실을 중국에 전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형당했다아들 황경한의 묘소가 추자도에 있다.
홍재영 : 약현의 둘째 사위, 순교
2) 정약전(丁若銓 1758~1816) : 호는 천전(天全), 손암(巽庵), 아들은 학초. 1816년 흑산도에서 사망, 약전은 유배 시절 다산과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아 이것이 단행본으로 많이 간행되어 있다.
신유사옥 때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사건 때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16년만에 죽었다.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저서 『자산어보(玆山魚譜)』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3) 정약종(丁若鍾, 1760~1801) : 셋째. 신해사옥 때 참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 저술, 아들은 철상, 하상, 딸 정혜.
정철상(丁哲祥) : 신유사옥 때 부친과 같이 순교
정하상(丁夏祥, 1795년(정조 19)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순교. 부친 사후 북경에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로마 교황에게 청원문을 올려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1831년 로마 교황청은 조선교구 설정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썼다.
정정혜 : 엘리사벳, 순교
4) 정약용 : 넷째, 풍산 홍씨와 결혼. 아들은 학연, 학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정약용은 채제공을 이을 남인의 영수로 주목되었으나, 정조 사후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사건으로 경상도 경주 장기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정학연(丁學淵) : 추제시(秋題詩)와 추사(秋士) 등의 시가 알려져 있다.
정학유(丁學遊, 1786~1855) : 정약용의 둘째 아들.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한 해 동안 힘써야 할 농사일과 철마다 알아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범절을 운문으로 적었다. 평생 문인으로 살았다. 흑산도 한문 기행문 「부해기(浮海記)」도 썼다. 정학유는 부친의 당부로 둘째 큰아버지 정약전을 만나기 위해 1809년 2월 3일부터 3월 24일까지 52일간 흑산도를 다녀와서 여정을 기록하였다. 이것을 최근 신안군의 도움으로 번역하였다.
5) 정약황 : 부친 정재원의 3처 김씨의 아들. 농업 종사
6) 누나 : 1775년 이승훈(1756∼1801)과 결혼. 이승훈은 1783년 북경에 가서 영세를 받은 한국인 최초 영세자다. 정약현 처남인 이벽과 교류하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이승훈은 외조부 이용휴(李用休)와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의 영향을 받았고,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젊은 재사인 권일신(權日身)·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이기경(李基慶)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 20대 중반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대신 학문 연구에 몰두. 여러 차례 배교 의사를 밝혔으나, 결국 신유박해 때 사형당했다.
남인의 영수격인 이가환은 신유사옥 때 자신은 천주교도가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7) 서매 나주정씨(羅州丁氏) : 채제공의 서자 채홍근과 결혼, 시아버지가 정승으로 활약하면서 사도세자와 정조 편에 서서 애쓴 내력을 정리하여 <상덕총록>(相德總錄)을 썼다. 둘째권만 전해서 전모는 알 수 없으나, 신분이 서출이지만 친정에서 익힌 견식과 시집에서 쌓은 수련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하게 이해하고 거침없이 서술하여 내용이나 수법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문학통사>
* 정약용의 가족 형제에 관해서는 역사연구자 이덕일의 저서가 있다.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다산초당, 2012)
*다산 사당
3. 정약용선생묘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7호(1972.05.04 지정)
부인 풍산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단분이며 남향하고 있고, 묘 앞에는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비가 있다. 비신에는 2열로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 淑夫人豊山洪氏 之墓)’라고 씌어 있다. 이외에 상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 낮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가까이 흐르는 한강이 내려다 보인다. 묘 앞에는 비석상과 되어 있다.
4. 저서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에 전념, 「목민심서 」48권, 「경세유표」49권, 「흠흠신서」30권(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을 써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일표이서라 불리는 이 책들은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다산은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회갑을 맞아서는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다산의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는 다산 사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집대성되었다. 여유당(與猶堂)은 당호(堂號)이다. "여유당전서는 154권 76책 활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7집으로, 제1집은 25권 12책으로 시문집(詩文集), 제2집은 48권 24책으로 경집(經集), 제3집은 24권 12책으로 예집(禮集), 제4집은 4권 2책으로 악집(樂集), 제5집은 39권 19책으로 정법집(政法集), 제6집은 8권 4책으로 지리집(地理集), 제7집은 6권 3책으로 의학집(醫學集)이다.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목적으로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수집하여 내놓았는데 편자는 1934년 정약용 5대손 정향진이 비매품으로 초판을 발행하였다.그 후 외현손 김성진(金誠鎭)이며, 정인보(鄭寅普)와 안재홍(安在鴻)이 함께 교열에 참여하였다. 이후 몇 차례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가, 2012년 다산 탄신 250주년 맞이하여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총 37권의 정본 여유당전서(이하 정본)를 펴냈다."(위키백과 인용)
*묘소에서 바라본 유적지
5. 사상
1) 유교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하고자 했다.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인 관료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였다.
선진 시대 이래 유학의 기본적 가르침이었던 민본(民本)의 의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제, 토지제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광업, 상업, 화폐제도 분야에서도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거의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자신이 직접 추진할 수 없었고, 관직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현장성의 결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수확기였다. 이때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민본의식을 주장했지만,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횡포한 짓을 일삼는 나쁜 무리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면서 떠돌이놀이패를 넣어 민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약용 등 남인들은 성리학의 절대적인 권위를 비판하는 방법을 원시유학 재흥에서 찾으려 했다. 김매순(1776-1840)은 정약용에게 편지를 보내 주자의 학설을 의심하는 오만한 태도를 경계하면서 정통을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2) 문학론과 창작
다산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곳 농민의 고난과 하소연을 민요에 접근하는 한시로 나타냈다. 국문문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한문학을 민족문학으로 재정립하는 방향을 찾는 데서는 성과를 보였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고 하고, “시대에 대해서 상심하고 풍속에 대해서 분개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고 했다. 사회비판의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깊은 자각을 보여주었다.
다산은 한시가 우리 노래이게 하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한시에 ‘조선시’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시경>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을 즐겨 사용하면서 민요를 옮긴 것이다. 한시의 개조에 기대를 걸고, 우리말로 시를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興到卽運意흥이 나면 뜻을 움직이고,
意到卽寫之뜻이 나타나자 바로 쓴다.
我是朝鮮人나는 조선 사람이어서
甘作朝鮮詩조선시를 즐겨 짓는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젊은 시절의 정약용은 그 방침을 지지하는 <문체책>(文體策)을 지어, 패관잡서(稗官雜書)라고 일컬은 소설은 살별(혜성)이나 흙비, 가뭄이나 산사태에 비할 수 있는 재앙이라 했다. 소설이 음란한 말과 추한 이야기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간사한 감정과 도깨비 같은 내용으로 지식을 미혹하게 하고 허황되고 괴상한 말로 풍속을 교만하게 한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런 소설을 탐독하느라고 재상이 나라 일을 잊고 부녀자는 길쌈을 폐하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조신선전>(曺神仙傳)에서는 선도를 깨쳤다는 이가 책 거간꾼 노릇을 하며 이익을 거두니 말세가 되자 풍속이 변해 신선도 속태를 면하지 못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횡포한 짓을 일삼는 나쁜 무리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면서 떠돌이놀이패도 넣었다. (이상 문학론 : 한국문학통사)
* 우리말 작품을 쓰지 않고, 소설을 비하하고, 떠돌이놀이패를 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정약용의 개혁사상은 일정한 한계가 있는 셈이다.
다산은 <조신선전>에서 신선과 선비와 상인에 대한 인식의 충돌을 보이는데, “혁신을 부르짖은 대석학이라도 의식을 존재의 실상만큼 넓히기는 어려웠”던 셈이다. (본카폐 ‘옛글명문 다시읽기’) 신유박해 때 결국 배교를 하게 되는 다산의 천주교 실천과 연계되어 있는 인식이라고 보면 무리일까. 일찍이 이러한 다산의 방황을 알아챈 김매순(1776-1840)이 ‘주자의 학설을 의심하는 오만한 태도를 경계하면서 정통을 수호해야’ 한다고 한 것도 다 같은 맥락에 있는 셈이다.
3) 천주교와의 인연
다산은 23세 때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두 형과 함께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자로 쓴 『천주실의』 등 각종 서책도 열심히 읽었다. 세례명은 요한(Johane)이었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세례를 받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가 10일 만에 용서되어 풀려났다. 1789년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사건 때마다 천주교와 무관하다고 변호해왔는데, 1797년에는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배교를 분명히 하였다. 정조 승하 후 일어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셋째형 정약종과 매형 이승훈(李承薰) 등은 참수되었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버리고 가족들을 고발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천주교 배격은 정조 때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조가 이가환을 위시한 남인 소장학자들을 가까이하자, 반대파에서는 천주교를 공격하면서 반격을 했다. 천주교는 충효를 부정하며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이단이므로 가담한 무리를 그냥 둘 수 없다고 했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쪽에서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것이 신유사옥이다.
같은 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 형 정약전과 함께 다시 끌려와 국청을 받게 되었다.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 약현의 사위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이복형 정약현의 딸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사영은 백서(帛書)에 신유박해를 고발하는 편지를 써서 중국에 보내려 했다.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키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대역죄로 처리되어 그는 사형당했다.
정약용은 이때도 이미 천주교를 떠났음을 진술하였다. 배교로 목숨을 구한 그는 10월 이번에는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전은 신기도에서 흑산도로 갔다. 1818년까지 17년간을 강진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 1836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정약용은 신유사옥은 물론 그 이전부터 여러번 배교하였고, 1797년에는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배교'가 본심이 아니어서 해배된 후 다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서 방황한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본인의 배교에 그치지 않고 매형인 이승훈을 매도까지 한 일이다.
이승훈은 정약용 형 약현의 사위가 된 이후에, 약현의 처남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고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갔을 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와 혼인 후에 천주교를 접했으므로 약용과 무관한 것이 아닌 셈이다. 이벽도 황사영처럼 정씨가와의 혼인 이후에 입교한 것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은 "황사영은 제 조카사위이지만 원수입니다. 그자는 죽어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백다록(李伯多祿, 이 베드로)은 이승훈입니다.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라고 했다는 심문 기록이 있다. (윤춘호(2019),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참조) 정약용의 이러한 공격과 배신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승훈도 여러 번 배교의사를 밝혔었다. 이벽은 효와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천주교의 순교자로 숭앙받지만, 모두 유교와 천주교의 거리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준다.
이승훈도 이벽도 결국 천주교로 인해 요절을 했지만, 다산만은 수를 누리고 75세까지 살았다. 다산은 배교를 하고 가족을 배신하고, 이로 인해 확보한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저술을 하고, 그 공적으로 오늘날 다산유적지까지 만들어 기릴 정도로 숭상을 받게 되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이곳 마재로 돌아온 후에는 다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천주교 복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있는 걸로 보아 적어도 천주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배교와 배신과 귀의를 끝까지 반복하며 산 셈이다. 이것은 천주교에도 유교에도 모두 맞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또한 다산이 존경받는 이유는 실학과 유학에 관한 저술 덕분인데, 이처럼 일생을 관통하는 천주교적인 배경은 당시로서는 유학과 양립되기 어려운 사상이었다. 해배 후에는 칩거하면서 적어도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던 것은 시대 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모순적인 사상 궤적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었던가 한다. 오늘날 다산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숭상은 그의 이런 모습에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인다.
그의 천주교 사상 궤적에는 의문이 많지만, 작품에는 의외로 세계관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정약용은 <沙村書室記>(사촌서실기)에서 “누에를 돌보는 현부인(賢婦人)이 좋은 뽕잎으로 잘 먹이면 크고 작은 채반 어느 곳의 누에든지 같은 혜택을 누린다고 했다. 이것은 하늘이 사람들을 크고 작은 곳에 살도록 한다는 말과 연결시켜보며, 절대자인 신의 은총은 편벽되지 않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신명나라카페 옛글 다시읽기 부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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