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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륙사
역사를 바로 알아야 조선족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족은 정말 구한말 코리아반도에서 대륙으로 넘어 간 사람들일까? 이는 사실이 아니리라 본다. 현재로서는 현대중국에 조선족 사회가 형성된 시기를 1860년대로 잡고 있는데, 그 인구가 1870년대 7만명이며 이후 차츰 증가하여 1900년대에는 22만명, 일제강점기 이후엔 170만명 가량 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듯 하다.
그리고 이렇게 동북3성 일대에 조선족이 집중된 이유를 코리아반도에 있던 조선-대한제국의 국권이 흔들림에 따라 생활고가 힘들어진 조선인들이 대거 반도에서 (현)만주로 국경선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위의 보편적 인식대로라면 식민지로 사로잡힌 코리아반도의 조선-대한제국 인구는 크게 감소되어야 했겠지만, 오히려 당시 코리아반도의 인구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시점에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옛 자료에 의하면 1900년대에 코리아반도의 인구는 500만명 가량 되었는데, 1910년대에는 1300만명을 상회하였다. 그 중 특정 2년간 그 인구가 500만명 이상 급증했는데, 이는 인구의 자연적 증감률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으며 외부에서의 인구 유입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북3성의 조선족이 코리아반도의 난민이란 것은 거짓이 된다. 조선족은 사실 대륙의 조선인이었으며, 특히 1900년대 특정 2년간 총인구의 2배에 달하는 500만명 이상 인구가 급증한 대목은, 당시의 불안정한 정세에 따라 대륙의 조선인이 반도로 급속도로 피난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를 보다 매끄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긴 흐름의 역사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의 북인이며 엄밀하게 말하면 고려인이라고 해야 한다. 구한말 이전 코리아반도의 토착 조선인들도 넓게 보면 조선의 북인이었겠지만, 사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부여, 고구려, 고려의 후손들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연해주의 조선인이 괜히 고려인으로 불린 것이 아닐 테다.
고려에 귀화한 여진계 가문 출신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허물고 조선을 세운 후, 여말선초의 문신 권근으로 하여금 조선지도이자 사실상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를 제작케 했다. 이 지도의 특징은 코리아반도의 비현실적 확대와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과감한 축소인데, 이는 당시 조선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이성계가 근세조선을 창건하며 새로운 세계의 천자(황제)로 등극한 후 - 이는 우리가 오늘날 ‘조선천지’란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 고려대륙에 (실제의)만주 중앙아시아로부터 여진인(돌궐, 달단, 몽고)들이 천산을 넘어와 섬서성 이서인 신강성, 감숙성 등에 서인으로 자리잡으니, 기존의 고려인들은 보다 더 동쪽으로 밀려 난 후 산서성,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등지에서 북인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근세조선의 최대 기득권 세력은 분명 서인이었고 그들의 최대 정적은 북인이었는데 이는 새로운 ‘조선 세력’과 기존의 ‘고려 세력’간의 정치적 대결인 것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영흥(우즈벡 케쉬) 출생의 이성계가 고향인 영흥 주변의 대도시 함흥(우즈벡 사마르칸트)으로 돌아간 것이 ‘중앙아시아의 명’과 ‘동아시아의 조선’으로 분열된 것이며, 이것이 조선이 명을 사대한 이유이며 동시에 서인이 국정을 주도하는 기반이다.
서인은 같은 북방계인 북인을 견제하는 만큼 남인을 무시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남인 중에서도 특히 양자강 이남의 남인은 사실 왜에 가까웠기에,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두 열등했는데, 이러한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들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선조에게 허위(?)보고를 하며 조선이 ‘임진왜란’을 방비하지 못했던 이유를 제공한 것이 사실 남인이었으며, 왜란 당시에도 가장 무기력한 세력이 남인이었는데 이는 남인의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인 반해,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경하게 대응한 세력이 북인이며 이 역시 북인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
남인은 고려-조선의 주도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본래 백제의 피지배층이었고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사실상 복속되었던 족속이었고, 지역적으로도 동남아시아의 왜와 어느정도 문화와 혈통을 공유하고 있었으니 이는 북방계 서인, 북인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의 정통후예인 북인이 왜에 대해서 가장 강경한 것은 오랜기간의 그 문화적, 역사적 우월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 조선은 재주있는 이들을 ‘산서 사람’이라곤 했다. 이 ‘산서 사람’이란 조선의 산서성 사람 즉 북인을 말하는 것일 테다.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북인은 광해군을 옹립하여 국정을 주도하지만 그것도 잠시인 것이, '임진왜란'에서 서인 세력의 정치적 모국인 '중앙아시아 명'이 조선에 지원병을 보낸 여파로 국력이 쇠잔해진 사이 명의 북쪽에서 후금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명의 위기이자 조선 서인 세력의 정치 기반의 위기이도 했다.
반면 조선의 광해군 북인 정권이 명과 후금의 싸움을 관망하며 중립 실리적 태도로 일관하자, 명에 대한 지원군 증원을 소리 높이던 서인은 더욱 다급해진 나머지 남인을 직접 꼬드겨 ‘인조반정’을 일으키고서는 광해군과 북인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해 버린 뒤 정계를 장악하지만, 서인 정권의 조선은 곧 명을 이겨낸 후금에게 ‘정묘호란’을 맞고 이어서 후금에서 국호를 바꾼 청에게 ‘병자호란’을 맞는다.
연속된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한 충격의 여파는 적지 않았듯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은 건재하였고 명을 함락시킨 청의 주요 강역은 여전히 중앙아시아였던 것 같다. 이후 청은 차츰 영향력을 확대해 조선의 북부지역인 외몽골 이북의 시베리아 지역과 남으로는 무굴(북인도) 지역에도 그 세를 뻗쳐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단코 청은 동아시아대륙에 중화민국의 전신국가를 세웠던 나라는 아니다.
청의 상징적 복식은 영화 ‘황비홍식 변발’인데, 청을 묘사한 듯한 옛 그림에는 이러한 ‘황비홍식 변발’을 한 청인으로 황인과 백인, 아시아 흑인, 아랍인 등 매우 다양한 인종이 등장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고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니, 청의 위치는 조선의 서북방인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 지역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특히 그 중에서도 카자흐스탄 지역이 그 본영일 테다.
그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시베리아로 강역을 넓혀 조선의 북부지역까지 위치했던 전성기의 청을 조선에서는 아마 북청이라고 일렀을 것이다. ‘북청 물장수’, ‘북청 사자놀음’, ‘북학’ 등의 용어와 문화가 생겨난 것은 이 지점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조선대륙의 서북방인 투르키스탄 지역과 북방의 시베리아 지역에 있었던 청이 언제 조선으로 침투해 왔을까? 이는 아마도 19세기 조선의 멸망을 전후한 시점에 이뤄진 일일 것이다.
청은 오랜기간 러시아를 두려워했다. 17세기에도 청은 러시아의 침공에 비틀거린 적이 있고 이를 조선이 구원해준 것을 ‘나선정벌’이라고 하는데, 19세기의 러시아는 당시 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동진해 오니 청은 독자적으로 살아남기가 힘들어졌을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 조선의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 등의 해양 제국주의로부터 불거졌는데, 이러한 문제를 초래한 내부의 조선인들은 임진왜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남인이었다. 초기의 조선 기독교도들은 대부분 남인이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병인양요가 발생했으며, 현재 청의 역사(중국사)로 편입된 아편전쟁 역시 조선의 남인 지역에서 발생한 같은 맥락의 사건이다.
조선의 남인, 특히 양자강 이남의 남인들은 국적은 조선인이었지만 사실 족속적으로 보면 왜에 가까웠기에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렇고 임진왜란의 제2라운드라고 볼 수 있는 19세기 서세동점기에도 지속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키며, 왜에게 무기력하거나 심지어 왜와 내통하기도 한 것이리라.
그러한 맥락에서 19세기 중엽 영국과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등의 침공을 받은 복건성, 광동성 등의 족속적으로 왜에 가깝던 ‘일본 강호막부’가 ‘동남아시아 왜’와 그에 의해 식민 경영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일본열도 왜’가 서세와 합세하여 조선으로 총구를 돌린 것이 명치유신이며, 그 결과가 ‘운양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이니 조선은 1876년 이 때에 사실상 자주권을 상실했다.
청이 조선으로 침투해 들어온 시점도 아마 이러한 이러한 혼란기를 지날 시점인 19세기 중엽일 것이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흥선대원군은 수 많은 백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는 아마 단순한 왕궁의 재건축을 의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19세기 중엽은 조선이 제국주의의 침공에 가장 극심하게 노출된 상태였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국난의 상황에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한가하게 왕궁 재건 공사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는 아마 조선이 해양 제국주의에 침공을 받고 혼란한 틈을 노려, 밀고 들어오는 북방의 러시아는 물론 그와 함께 밀려오는 청을 방어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급히 천도하니 마땅한 황궁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 황도를 옮겨온 장소는 아마 오늘날의 북경 자금성일 확률이 높다.
자금성은 본래 고구려의 성곽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계속 성곽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대중국이 수십 년간 남방식으로 개조해 놓고서 황궁이라 잡아떼는 이유는, 그 곳이 조선의 마지막 황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이란 도시 이름은 19세기 이후 경복궁 중건 후인 근대에 붙여졌을 확률이 높고, 본래의 북경 이름은 천안이었을듯 하다.
아무튼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어마어마하게 혼란한 시대였을 것이, 양자강 이남의 남인 지역은 아편과 기독교로 물들고 태평천국운동의 혼란, 서세의 침공과 명치유신 일본의 분리와 침공 등으로 아비규환 상태에 빠졌을 것이고, 이들 중 일부 세력은 서세에 투항하여 정치 세력을 키워 나갔을 것인데, 이것이 조선과 왜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남인들의 분리·독립인 것일 테다.
같은 시기 그 북쪽인 조선의 중심지역 황하강 부근의 서인과 북인 지역에서는 러시아의 동진과 남하, 청의 침투로 인해 경복궁 중건과 함께 어마어마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기운으로 인해 이러한 민족 대이동의 움직임은 아마도 전인종적, 전유라시아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는 본래 대대로 동이족의 종교지역 혹은 피난지였기에 일반 백성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1870년대부터 동북3성 지역에 조선족 인구가 급증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기운과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북성, 산서성 등의 조선인들이 전통적인 피난지인 동북3성 일대로 이동한 것이며 후에 더 안전하게 코리아반도로 피난한 것이다.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이 대륙보다 더 안전했던 이유는 초기 명치유신의 일본제국은 대륙의 동남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일본은 대륙에서 북진한 이후 코리아반도를 점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본래 대륙의 주인이었던 조선인 특히 북인들이 하남성에서 하북성 등지로 하북성에서 동북3성으로, 동북3성에서 코리아반도 등으로 순차적으로 민족 대이동을 했을 것이다. 이러하기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의 인구가 동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리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할 즈음의 조선 영토는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을 제외하면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강소성과 하남성의 일부, 절강성의 일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빠져나간 감숙성, 청해성, 섬서성 등에는 청인들이 터줏대감 행세를 하였을 것이며, 대륙의 나머지는 대부분은 북진해온 일본이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일본이 코리아반도와 동북3성 일대만을 점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북으로는 청과 러시아가 찍어 누르는 것이며, 남으로는 일본을 사냥개로 앞세운 서세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수천년간 지구를 호령하다가 쓰러진 늙은 호랑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 할 수 밖에 없는 이치였으며, 그 주요 전장은 실제로는 동북3성 일대가 아닌 섬서성이나 하북성 등이었을 확률이 높다.
‘청·일전쟁’ 이후 ‘을미사변’이 발생한 뒤 친일내각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일본과 적대적인 러시아에 의지하며 ‘아관파천’ 했으나, 일본에 의해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경운궁으로 환궁했다는 것은 단순히 황궁 혹은 왕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일본에 의한 강제 천도를 말한 것이다.
고종이 일본에 의해 강제 천도된 경운궁은 아마도 당시 대한제국의 영토 최남단인 강소성의 남경이었을 것이다. 역사 내내 북방계 민족인 조선의 군주는 대륙의 북부지역에 위치했었지만, 일본이 고종의 러시아로의 아관파천을 목격하고서는 조선과 러시아와의 밀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등의 일본 본거지와 가장 가까운 곳인 강소성 남단에 고종을 가두어 놓고 감시한 것일 테다.
경운궁 환궁 즉 대한제국 이후의 신식군대 사진자료를 보면 대한제국 군인의 얼굴이 전통적인 조선인의 얼굴과 달리 대륙 남방계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훗날 상해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이유 역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도에서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고.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부 서인계가 포함된 대부분의 북인계열일 것이며 동북3성과 코리아반도로 이주해온 이들도 대부분 전통적인 고려계 조선인인 북인계열이다. 양자강 이남의 왜와 가까운 남인들은 훗날 대부분 일본이나 중화민국에 가담하여 대륙의 주인들인 북방계 조선인들을 도륙하는 역할을 했겠지만, 강소성의 남경이나 상해 등의 남인계 대한제국인은 일부 예외였던 것이다.
현대중국의 주요 인물들을 보면 손문은 광동성 출신이고 장개석 절강성 출신이며 모택동은 호남성, 등소평은 사천성 출신이다. 이들 모두 양자강 이남이나 그 언저리의 남방계 족속이다. 이들이 한족 혹은 화하족 등으로 스스로를 칭한 짱깨들인데 이들의 출신 지역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이들은 본래 황하강 이북에는 거주한 적이 없는 족속들이다.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에도 황하강 이북에는 조선인과 청의 유민만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3·1운동도 코리아반도의 천안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대륙의 천안인 북경에서 발생하여 조선인이 거주하던 온 대륙과 동북3성, 코리아반도까지 퍼져 나갔던 구국운동일 확률이 높다. - 북경 천안문에서 시위하는 현대중국의 시위 기저는 족속은 대거 교체되었지만 그 문화적 전통은 일부 남아있는 현상이라 본다.
일제강점기에 대륙에서 조선/한국독립군이 활동한 지역은 모두 본래 조선의 땅이지 현대중국의 땅이 아니었다. 장개석 등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이 옛 백제의 땅이요, 대륙전체가 조선인의 역사무대라고 설명했음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엄청난 민족이동과 일본의 폭압적인 통치로 인해 그 첫 세대의 조선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동성 출신의 손문도 그렇지만 절강성 출신의 장개석은 출신 성분이 매우 불분명한 짱깨다. 장개석은 열도일본이 아닌 자신의 고향 부근에 있었을 대륙의 일본사관학교를 나왔을 것이며 오히려 모택동 세력 보다 일본에 대해 더욱 유화적이었는데, 이는 정치적 노림수는 물론이며 장개석의 개인적 혈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하니 화하족 혹은 한족은 실체가 없는 민족이다.
장개석의 절강성이나 모택동의 호남성, 등소평의 사천성 등의 족속은 동일한 민족이라 보기에는 그 문화의 공유 정도가 미개했던 것이며, 과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모두가 국난시의 골칫덩어리 남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역사 내내 조선과 동남아의 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족속들이며, 이러한 사실들을 잘 꿰고 있던 서세가 결국 이들을 매개로 조선을 도륙한 것이다.
이러한 미개한 일본 쪽바리와 중화민국 짱깨들이 번갈아 황하강 이북을 점령하고서 양자강 이남의 남방계를 집단 이주시켜, 미처 동북3성이나 코리아반도로 피난하지 못했던 조선인을 학살 또는 동화시켰을 것이며, 청의 유민을 끌어안음으로써 대륙의 역사를 청의 역사로 날조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세는 보다 손쉽게 통제 가능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세력다툼을 관망하였고, 의외로 자신들에게 거칠게 저항한 절강성과 복건성, 광동성 등지의 일본과 왜는 오키나와를 지난 왜의 다른 근거지인 열도일본으로 쫓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현대중국은 코리아전쟁 당시 대륙 내에 남은 조선인을 위주로 지원병이란 명분으로 총알받이화 한 것이니, 일본과 현대중국의 근본은 다른 것이 없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보편적 역사대로라면 동북3성은 청의 뿌리인 만주족의 터전이어야 하는데, 왜 그 곳에 청인 혹은 만주인은 없고 조선인만 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동북3성은 본래 만주가 아닌 조선의 종교지역이었으므로 승려나 피난민을 제외하고는 주민이 거의 없는 곳이었고, 본래의 만주는 카자흐스탄과 남러시아 등의 중앙아시아 북부 초원지대이므로 만주족과 청인은 그 곳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남북 간의 평화, 통일 문제를 그냥 남북 간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은 400년 전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 물결이 밀려오면서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에 아주 긴박한 대결구도가 형성되어왔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냉전의 대치선으로 바뀌기는 했습니다만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사적인 대결구도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지금도 그 대결적 질서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 공백으로 인한 과는 차치하더라도 긴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혜안은 아주 정확했다. 물론 진실된 대륙조선사를 인지하고 발언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해양세력’을 ‘왜양일체’로 바꾸고 ‘대륙세력’을 ‘대륙조선’으로 바꿔 읽어보면 발언의 요지는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조선족 동포들을 포함한 우리 민족의 모든 아픔은 이러한 긴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