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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이렇게 아름답고 기품있고 위엄 있는 왕궁 관련 건축물을 본 적이 없다. 지나친 면적이나 크기로 사람을 압도하려 하지 않고, 지나친 담장의 높이로 백성을 배격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존엄을 격조높게 보여주는 사당, 종묘, 조선왕조 품격의 핵심이 이곳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조선의 후예여서 한류를 이루지 않았을까.
1. 방문지 대강
명칭 : 종묘
위치 : 서울 종로구 종로 157
입장료 : 1,000원, 65세 이상 무료
방문일 : 2026.6.29.
2. 둘러보기
'광대하고 화려하고, 위압적인' 모습이 그간 둘러본 외국 궁전의 공통점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 파리 외곽의 베르사이유궁이 그렇고, 북경의 자금성이 그렇고, 일본의 히메지성이 그렇다. 백성에게, 이웃 나라에게 압도적인 권위과 금력의 힘을 보여 마음으로부터의 굴복을 의도하는 궁전에서 백성은 단지 세금 바치는 수단일 뿐이다.
궁이 아닌 지방 영주의 성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백성을 내려다 보고 군림하며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은 작은 궁전, 작은 왕의 모습이다. 유럽 어디서나 성주는 제일 높은 곳에 높은 담장에 화려한 궁을 짓고 살았다. 백성은 모두 발아래 있다.
도쿄 황궁도 지역 다이묘의 성도 다를 바 없다. 깊은 해자로도 부족해 제일 높은 곳에다 다시 또 높은 성벽까지 쌓고 스스로 가두고 사는 모습은 권력이 자유가 아닌 속박을 사고, 백성들에게서 스스로를 유리하는 고독을 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해자도 없고 담장도 낮은 우리 경복궁, 창경궁은 다르다. 이곳 종묘도 다르다. 오늘 본 종묘는 특히 존귀함과 엄숙함과 품격을 갖춘 모습이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고려 공민왕의 신당까지 더해진 종묘, 조선은 고려의 계승자인 것이다.
왕조가 바뀔 때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여 백성들이 무참히 도륙되던 중국과 달리 우리는 평화적인 왕조 교체를 해왔다. 백성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이어와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전통문화가 그대로 계승되어 민요가 설화가 살아 숨쉬는 문학이 되도록 한 배경이다.
그런 전통이 아니었으면 어찌 신명풀이가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어찌 인류의 신명을 깨우는 한류의 근원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 애민의 일단을 오늘 종묘에서 다시 감동적으로 확인한다.
2.1. 관람지 소개
(아래 소개는 왕릉 홈피인 국가유산청 근능유적본부에서 전재했음을 밝힌다.)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렀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五廟制)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조·부)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別廟)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이후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世室, 대대로 정전에 신주를 모심)’과 ‘조천(祧遷,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김)’의 예로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祔廟禮,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때 정전에 처음 신주가 모셔지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하여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되어 현재의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그 밖에 종묘 경내에는 망묘루(望廟樓, 종묘서(宗廟署)의 관원들이 제례에 관한 업무를 보던 곳), 향대청(香大廳,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재궁(齋宮, 왕과 세자가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 전사청(典祀廳, 제사의 음식을 마련하는 곳) 등의 건물이 있다.
외대문(外大門)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외대문은 정면 3칸의 구조로,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유산으로 지정된 어정(御井, 우물)이 있다.
망묘루(望廟樓)
망묘루(望廟樓)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종묘제례 전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옆면 2칸의 구조로 건물 중 두 칸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
공민왕 신당(恭愍王 神堂)은 고려 31대 왕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종묘를 창건할 때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날아와 종묘 경내로 떨어졌는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영정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향대청(香大廳)
향대청(香大廳)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또 종묘제례 시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기도 하다.
향대청 안에서는 종묘를 소개하는 전시품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오른쪽 끝으로 공민왕 신당이 보인다.
재궁(齋宮)
재궁(齋宮)은 왕이 머물면서 왕세자와 함께 제례를 준비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 세자재실(世子齋室), 어목욕청(御沐浴廳)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왕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각 실에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전사청(典祀廳)
전사청(典祀廳)은 종묘제례에 올리는 제수(祭需, 제례음식)를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례에 사용하는 제기 등의 집기들을 보관하였다. 1395년(태조 4) 종묘를 창건할 때 함께 지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에 다시 지었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 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전사청 앞에는 제상에 올리기 전 제례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찬막단(饌幕壇)과 제수할 희생(犧牲, 소·양·돼지)을 검사하는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는데, 그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전사청 서쪽에는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머물렀던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정전(正殿)
정전(正殿)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27개월)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은 ‘세실’과 ‘조천’의 예에 따라 ‘세실’로 지정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魂魄)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 때 왕과 제관들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 등이 출입한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깔려있다. 정전은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전남신문
정전은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목조건물이다. 가로가 104m
공신당(功臣堂)
공신당(功臣堂)은 배향공신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정전 월대 아래 남동쪽에 위치한다. 창건 당시에는 5칸의 규모였으나 몇 차례 증축되어 현재는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공신들은 왕과 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정해지는데, 이 건물에 모신 배향공신은 총 83명이다.
칠사당(七祀堂)
칠사당(七祀堂)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져 일곱의 신을 모시고 사계절마다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일곱 신이란 국행(國行, 길을 관장하는 신), 공려(公厲, 자식이 없는 제후의 신), 국문(國門之神, 문을 관장하는 신), 중류(中霤, 방을 관장하는 신), 사조(司竈, 음식을 관장하는 신), 사호(司戶, 출입을 관장하는 신), 사명(司命, 사람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을 의미한다.
정전 악공청(正殿 樂工廳)
정전 악공청(正殿 樂工廳)은 종묘제례(정전) 때 악공과 일무원들이 대기하는 건물이다. 정면 6칸, 옆면 2칸의 구조로 소박하고 간결한 모습이다.
영녕전(永寧殿)
영녕전(永寧殿)은 ‘세실’과 ‘조천’의 예에 따라 정전에서 ‘조천(신주를 옮김)’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1421년(세종 3)에 새로 지은 별묘(別廟)이다.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祧廟)라고도 한다. 전체적으로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영녕전의 구조는 가운데 4칸이 태조의 4대 조상인 추존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의 협실 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녕전 악공청(永寧殿 樂工廳)
영녕전 악공청(永寧殿 樂工廳)은 종묘제례(영녕전) 때 악공과 일무원들이 대기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옆면 1칸의 구조로 정전 악공청에 비해 규모가 작다.
종묘제례(宗廟祭禮)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조선시대 유교 예법에 따라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오례의(五禮儀) 중 길례(吉禮)에 속한다. 종묘제례는 왕이 직접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 왕을 비롯한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 등 제관이 참가하였다. 정전에서는 4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납일(臘日,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을 합쳐 1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에 두 번 제례를 행했다. 이외에도 홍수, 가뭄, 질병, 전쟁, 자연재해 등이 발생했을때와 책봉(冊封), 관례(冠禮), 혼례(婚禮), 흉례(凶禮), 천신(薦新,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당에 올려 조상에게 감사를 전하는 예), 천금(薦禽,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먼저 올리는 예) 등이 있을 때도 종묘에서 제례를 지냈다. 종묘제례의 제기는 변(邊), 두(豆), 보(簠), 궤(簋), 작(爵) 등이 있고, 제수(음식)는 희생(소, 양, 돼지고기), 곡물(쌀, 수수, 찰기장 등), 떡, 젓갈, 과실 등이 있다. 종묘제례는 현재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과 매년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 지내고 있다.
⊙ 종묘제례 순서
① 신관례(晨祼禮) : 향을 피우고 울창주를 부어 신을 맞이한 후 폐백을 올리는 의식
② 궤식례(饋食禮) : 제수(제물)를 올리는 의식
③ 초헌례(初獻禮) : 신에게 첫 번째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의식
④ 아헌례(亞獻禮) : 신에게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
⑤ 종헌례(終獻禮) : 신에게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
⑥ 음복례(飮福禮) : 제사에 쓴 술과 음식을 먹는 의식
⑦ 철변두(撤籩豆) : 제사에 쓴 제기를 거두는 의식
⑧ 망료(望燎) :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는 의식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종묘제례악은 악기(樂), 노래(歌), 춤(舞)을 갖추고 종묘제례에 맞추어 행하는 것으로,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을 말한다. 제례악은 처음 세종대에 아악을 정비한 후 <보태평>과 <정대업>을 창작하였고, 1463년(세조 9)에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악기편성은 아악기와 당악기, 향악기 등이 고루 사용되는데 편종, 편경, 축, 어, 박, 아쟁, 장구, 절고 등이 있으며, 노래(악장樂章)는 보대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이 있다. 춤(일무佾舞)은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문무(文舞)와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무무(武舞)로 구분되는데, 문무는 정적이면서도 부드럽고 무무는 강하고 힘차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5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옛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정전 동쪽 입구
정전의 동쪽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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