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을 가진 신앙
2015. 9. 13(주일낮예배) 역대하 24:1-2, 26:4-5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은 4대 비극 중에 하나인 작품이다. 12세기 네덜란드의 왕이 갑자기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 왕의 자리에 오르고, 또 선왕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보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선와의 아들 햄릿이다. 햄릿은 삼촌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또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여 삼촌을 죽일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햄릿은 삼촌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햄릿은 삼촌을 죽이지 못한다.
왜 죽이지 못했겠는가? 그 부분의 대사를 읽어드리겠다.
햄릿 기도중이니 해치우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구나. 해치우자. (칼을 뺀다) 가만, 지금 죽이면 저자는 천당에 가고 나는? 아냐 아버지를 죽인 악당을 천당으로 보낸다? 그러면 복수라고 할 수 없지. 저 악당이 스스로의 영혼을 깨끗이 씻으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해치우는 일은 복수가 아니다. 저자에게 나의 아버님이 살해당하셨을 땐 아버지의 죄악이 5월의 봄꽃처럼 활짝 폈을 때다. (칼을 칼집에 도로 넣는다) 칼이여, 제자리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거라. 저 악당이 쾌락을 탐닉할 때, 혹은 도박을 하거나 욕설을 퍼부을 때, 그 밖에 무엇이든 구제받을 수 없는 못된 짓에 빠져 있을 때 복수를 하리라. 어머니가 기다리시겠다. 너를 지금 살려 두는 것은 네 고통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다.(퇴장)
생각이 많았던 햄릿은 삼촌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햄릿에 나오는 명대사 중에 하나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다. 햄릿은 고통의 순간 속에서 자신의 재앙과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왕이 쏘는 화살에 맞아서 그냥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해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햄릿과 같이 선택과 결정을 잘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햄릿의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약간 바꾸어서 사느냐? 안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 고민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한 대 사려고 하면 천차만별의 가격대와 기능들이 있어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 하는 현대인의 현상을 가리켜 햄릿증후군
이다고 하였다.
그러면 여러분은 선택과 결정을 잘하는가? 아마 우리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식당에서는 메뉴판에 이런 메뉴를 적어 두었다. 한번 보시기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현대인들이 햄릿증후군에 빠져 있겠는가? 저는 22년 전에 아내와 결혼을 하였다. 제가 27살, 아내는 26살의 청춘으로 만나 결혼하기 전날 밤에 아내는 일기를 적었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멋있고 좋은 사람과 단 둘이 살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밀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인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이렇게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아내는 이렇게 쓰지 않았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대충 내용이 이런 것이었다.
지금 내가 선택을 잘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겁이 난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다.
제 아내는 결혼을 위하여 중학교 때부터 기도로 준비한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신앙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학교 수업을 마친 후 교회당에서 기도하던 아내가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선배였던 저는 시골에서 올라온 아내에게 우리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 가자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는 수업이 마치면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집에 갔기 때문에 저는 같이 버스를 탔던 아내에게 우리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가라고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같이 교회에서 기도하고 헤어지는데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아내에게 우리교회에 등록하게 하고, 또 봉사할 자리를 챙겨서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응답으로 여겼다. 아내는 자신이 기도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저와 결혼을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결혼 전날에 감격하고 감사해야하는데, 감사와 감격은 없고 두려움에 빠져서 도망가고 싶다는 일기를 쓴 것이다. 그리고 22년의 결혼생활을 통하여 아마 정말 좋은 결정을 했다고 행복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혼할 당시에는 이런 행복이 사라지고 있었다.
왜 아내는 결혼의 행복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세례요한도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 두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하고 묻도록 하였다. 대제사장의 아들이었던 세례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선포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나는 내 뒤에 오시는 이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겠노라고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다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이야기 하여서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모습이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는 편안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생활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대함을 선포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무리 작아지고 초라해져도 그것으로 마음 상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 세례요한이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확인하고 있는가? 총신대학교 신학박사인 유상섭교수님은 이에 대하여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것이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는 심판과 구원이었다. 그래서 도끼가 나무에 놓였으니 열매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버리겠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였는데, 예수님은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4:16-7:17까지 예수님의 행적에는 가난한 자, 귀신들린 자, 각종 병자들을 구원하시고, 세리와 죄인을 용서하는 모습만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자신이 증거한 것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정말 예수님이 맞는가? 회의를 느끼면서 제자들을 보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한동안 우리나라 아파트 이름을 굉장히 어렵고 길게 지었다. 그래서 합정메세나 폴리스 합정자이아파트, 위례숲 벨트라움 이라고 지었다. 이렇게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짓는 이유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파트는 다시 이름을 쉽게 짓고 있다. 왜냐하면 며느리 집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시누를 데리고 오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혼자 올 수 있도록 아파트 이름이 쉬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들이 지혜롭지 않는가?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생각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생각될 때 혼자서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맞는지를 확인하여 이전에 가진 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흔들리지는 않는 신앙의 바른 모습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앙이 흔들릴 때 어떻게 하는가? 오늘 성경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에는 7살에 왕위에 올라서 40년동안 유다를 통치한 요아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어릴 때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아스가 나라를 다스릴 때 도와준 사람이 고모부였던 대제사장 여호야다였다. 여호야다가 곁에 있을 때 요아스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위하여 훼파된 성전을 청결케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아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하 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요아스의 왕의 바른 모습을 가진 것은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이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시야는 여호야다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와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여호야다가 있을 때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김으로 인하여 훼파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헌금함을 설치하여서 백성들이 헌금하게 하고, 그것을 곧바로 여호와의 전 감독자에게 주어서 목수와 석공으로 성전재건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자신이 아세라 신상 앞에 가서 절을 할 만큼 그는 타락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하여서 유다의 죄악을 선포할 때에 요아스는 스가랴를 돌로 쳐서 죽였다. 스가랴의 아버지로 인하여 요아는 선한 왕이 될 수 있었는데, 그는 그의 아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요아스만 가진 것이 아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먼저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대하 26:4-5)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따라 선한 일을 행하였던 웃시야는 형통의 복을 받았다. 그래서 52년동안 유다를 통치하는 동안 웃시야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하여서 애굽근처까지 넓어졌고, 또 건축과 농업과 군사등 다방면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웃시야가 이 복을 받는 시기는 스가랴가 살아있는 날 동안이었다. 스가랴가 죽은 후 웃시야는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나병에 걸려 죽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려 죽은 웃시야는 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왕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요아스와 웃시야왕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유다는 20명의 왕이 있었다. 그런데 이 20명의 왕중에 선한 왕은 절반이 되지 않는데, 이들은 선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끝까지 선한왕으로서의 모습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요아스는 자기 곁에 여호야다라고 하는 대제사장이 있을 때, 또 웃시야는 스가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있을 때 선한 왕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여 고민할 때 함께 의논하고 바르게 지도해 줄 사람이 곁에 있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길을 바로 갈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 곁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
<동영상 5' 38" 땡큐 장애인 국가대표 수영선수 세진이>
의사 선생님은 세진이는 걸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세진이가 어떻게 걸을 수 있게 되었는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또 영생을 소유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과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열어 그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의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첫 번째 요소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또 다른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요아스에게 여호야다가 있었고, 또 웃시야에게 선지자 스가랴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곁에는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또 나에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 이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체의 연약함을 보고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며, 또 그 사람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격려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자여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도, 또 그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시켜주는 동역자가 많은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