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댁의 겨울 일상 / 정선례
이른 아침부터 축사 일을 마치고 화목보일러에 나무토막 몇 개 집어 넣고 부리나케 들어와 아침을 차린다, 보리와 제철인 굴을 몇 알 넣고 된장풀어 보리국을 끓였다. 남편은 친구 어머님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듣고 밥숟갈 빼자마자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신랑과 둘이 신혼처럼 살며 나를 힘들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지 않는데도 없을 때 편안해지는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도 잠을 자고 산새도 숨죽이는 아침 시간이다. 오늘 하루 일을 메모하며 아메리카노 커피의 향과 맛을 즐긴다. 집안일이나 산에 나무하는 일, 농사일, 이웃들과의 잡다한 얽힘도 이 시간에는 날려 버리고 고즈넉한 마음에 집중한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를 누리는 이 시간을 얻기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다. 스물세 살에 결혼하고 보니 시외할머님 초등학생인 막내 시동생, 우리 아이들 세 명까지 낳아 기르며 사대가 한집에 살았다. 농사일에 직장까지 신혼의 단꿈을 꾸거나 나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어머님이 위암으로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신 후 집안일은 다 내 차지가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서 아침 첫 차를 타는 시동생를 학교 보내고 냇가로 가서 차디 찬 얼음물에 빨래를 해 오면 손은 꽁꽁 얼어서 아팠다. 나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지내온 지난 날이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서 가스비를 아끼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보리차를 끓이기도 했다. 그나마 할머니께서 아침 저녁으로 가마솥 가득 물을 데워 놓아서 따뜻한 물을 설거지도 하고 세수도 할 수 있었다.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느라 밤에 밀린 집안일을 하고 주말에는 농사일을 도우며 세아이를 키웠다. 평범한 여성들이 누리며 살아온 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해서인지 내 안에는 겨울 삭풍이 불어오곤 했었다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시동생들은 다들 제 짝을 만나 떠나고 아이들도 밥벌이하느라 도회지에 나가 산다.
일상에서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니 자유로워졌다. 매사 완벽을 추구하며 맘에 날이 서 있어 예민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아이들을 향한 기대도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마음을 고쳐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움켜쥐고 놓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면 독서가 취미생활로 연결된 글쓰기이다. 다. 깊은 어두움 뒤에 밝은 해가 떠오르듯이 시련을 준 만큼 를 주는 것 같다. 계절은 봄부터 겨울까지 돋아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나뭇잎을 떨궈 쉼을 갖는다. 살아온 날들이 자연의 사계절을 닮아 변화가 많았다.
높은 산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새하얗게 보이는데 여린 새싹들은 꽁꽁 언 땅을 뚫고 나오느라 혼신의 힘을 다 한다. 내 젊은 날과 같다. 가뭄을 만나 타는 목마름을 견디느라 몸에 가시가 돋기도 했다. 때론 차디찬 비바람에 젖어 무너지기도 했었다. 집 뒤꼍 어두운 데서 쪼그려 앉아 울다가 휘청거리는 몸 추스르니 어느새 퍼렇던 마음 자락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계절이 서른 번 바뀐 후 일어난 변화이니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얼마나 선명하겠는가. 서리가 내리고 날이 추워지면 겨울살이 준비하느라 시골 아낙의 손길은 분주하다. 집도 없이 이리저리 쏘다니다 먹이를 모으고 겨울잠 자는 동물들처럼 농촌 아낙도 방아 찧어 창고에 쌓아 두고 땔감 헛청에 차곡 차곡 쟁여 두고서 메주를 쑨다. 무청 시래기 처마 밑에 매달아 놓고 김장까지 마치고 드디어 동굴로 들어가 나만의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마음이 통하는 이웃에 사는 동생과 일부러 먼 길을 택해 걸었다.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겨울 바람에 잘 마른 떡갈나무 낙엽 밟는 소리만 귀에 감긴다. 침묵하며 무턱대고 걷는 길은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눈의 요정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날이면 짐승의 발자국 하나 없는 길을 택한다. 저수지 둘레길을 지나 사람 흔적이 거의 없는 굽이진 오솔길로 접어드니 새들도 풀숲에서 낮잠을 자는지 사방이 고요하다. 산길에서 청미래덩굴 빨간 열매를 따서 입에 넣으니 새콤달콤하여 먹을만하다 다시 열매에 손이 가는데 한 줄기 생각에 이른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로서니 산속에 사는 동물들의 먹이를 훔쳐야 하겠는가.
쉼 없이 걷다 오르막길에 이른다. 이 길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처럼 숨이 가쁘다. 들숨 날숨 걸음의 속도를 조절하며 오르니 산 정상이 눈앞이다. 능선은 평지를 걷는 것처럼 완만한데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어 모자를 고쳐 쓰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걷는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며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일이다.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다. 겨울은 자연이 내게 주는 연인과 낮은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는 감각적인 언어이다. 아무 이유없이 발길 닿는대로 구름이 이끄는대로 바람결에 몸을 내 맡기고 걷고 또 걷는다. 부드러운 햇볕이 봄을 머리에 이고 저만치 달려 오고 있다.
첫댓글 선례씨의 일상은 늘 한편의 동화처럼 아름답습니다. 전에 초당슾길 걸어 본 적이 있는데 그 예쁜 숲 길을 정원으로 누리는
선례씨 부럽습니다. 늘 씩씩하게 건강하기 바랍니다.
순희 언니, 초당림 있는 동네가 제가 사는 명주 마을입니다. 근처 오시면 꼭 연락하세요. 우리 집에서 차 한잔 나누셔요. 천관산 동백숲도 근처에 있는데 자연분포 자생지로는 전국 제일 규모랍니다. 4월에서 5월 초 절정으로 붉게 피었다 뚝 떨어져 땅에서 또 한 번 피어나지요.
동백은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한 번
내 마음에서 한 번
세 번 핀다 하지요.
초당림 부근에 놀러가면 저도 연락할게요.
이름이 같은 특권으로 저도 차 한 잔 주시겠지요?
아궁이 가마솥, 화목보일러, 굴 넣은 된장보리국...깊어가는 겨울밤의 동화 한 편을 읽는 듯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집니다.
축사, 농사, 직장, 집안일까지 여장부시네요. 대단하셔요.
네. 연락 주십시요. 환영입니다.
현재는 어디 좀 와 있어요. 오월 초에
집에 갈 예정입니다.
정선례 010 8733 7764
제가 안내할게요.
멋진 곳에 사시네요. 저도 동백 보러 가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재래종 동백, 군락지입니다.
내비게이션 : 천관산 동백림
휴양림 들어가는 도로 좌측 전망대 두 곳
첫 번째 길 따라 아래로 내려가서 골짜기 따라
위로 가는 길로 나오면 또 다른 풍경 감상
천관산 동백숲도 좋고, 초당림 백합나무숲도 멋지죠. 망중한의 겨우살이가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네요.
다녀 가셨군요. 초당림 백합나무숲도 울창해서
보기 좋습니다. 시원하고요. 천관산 자연휴양림
도착. 오른 쪽으로 난 생태 숲 탐방 산 길도 걷기 좋아요. 발 편한 신발 신어야 오래 걸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