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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향상을 위하여,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이란 고통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체가 고통 덩어리라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고통이 없으려면 "나"라는 오온, 물질과 정신이 존재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과 정신이 존재한다면 고통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어떤 다른 좋은 것들이 있더라도 완벽한 행복은 아닙니다.
세간의 행복은 고통이 섞여 있고 한계가 있는 행복이고 언젠가는 다시 고통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이란 닙바나(열반)뿐입니다.
닙바나는 다시 생기지 않는 오온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오온이 소멸되어야 완전한 소멸이고 완벽한 행복이 됩니다.
오온의 완전한 소멸이 닙바나라고 해서 "닙바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면 안 됩니다.
닙바나는 궁극적 실제입니다.
닙바나를 성취하려면 우리는 선업을 할 때마다 “닙바나사 빠짜요 호뚜(열반의 밑거름이 되기를).”정신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닙바나사 빠짜요 호뚜”로 출세간을 목표로 두고 살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는 것이 넥캄마(nekkhamma,출가)입니다.
출가가 쉬운 일은 아니죠.
출가란, 머리 깎고 가사 입고 비구 수계, 비구니 수계를 받아야 되는 것만이 아니라
욕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다 넥캄마(nekkhamma) 입니다.
넥캄마란 로바(lobha, 탐욕)에서 아로바(alobha, 무탐)으로 가는 것입니다.
넥캄마, 출리, 출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따라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칸띠khanti(인내)와 우삐까upekkhā(평정) 입니다.
넥캄마는 자기가 가진 것을 놓아버리는 것인데 그러면서 따라오는 것이 칸띠입니다.
칸띠가 있으면 넥캄마로 인한 부족함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넥캄마는 칸띠가 있어야 완성됩니다.
넥캄마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지만 욕심을 버리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참을 수 있는 것이 칸띠 입니다.
그리고 우삐까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즉,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항상 한결같이 세상을 대하는 것이 우삐까 입니다.
잘 살아도 못 살아도 유명해도 유명하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도 전혀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우삐까입니다.
잘 되기를 바라면서 자애로 대하지만 내 뜻대로 안될 때도 욕심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상태이건 아니건 좋은 사람이건 아니건 좋은 것을 얻게 되든 나쁜 것을 얻게 되든 변함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우삐까입니다.
네캄마(출리), 칸띠(인내), 우삐까(평정)은 다 빠라미(바라밀)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수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기본이기 때문에 열심히 훈련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와 함께 계·정·혜를 많이 훈련시키면 아상(我相)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기적인 마음과 분별심이 줄어들고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모두가 하나 즉, 정신과 물질뿐이라고 알게 됩니다.
누구의 행복과 누구의 고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과 고통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이 고맙고 은혜롭다고 여겨집니다.
생각이 바르고 지혜가 깊으면 모든 것이 다 고맙습니다.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은혜를 잘 압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은혜가 많아도 모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사리불이 가장 지혜로운 분입니다.
어떤 노인이 너무 가난해서 먹고살기 힘들어 사찰에 왔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 두 번 오다가 나중에는 아예 사찰에서 스님들을 시봉하면서 살게 됩니다.
스님들은 탁발하여 남은 음식을 노인에게 주면서 계율에 맞게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노인은 청정한 스님들과 함께 사니 마음도 편하고 잘 드셔서 피부색도 좋아지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부처님께서 흐뭇하게 보셨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청정한 스님들의 생활을 보니까 자기도 출가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을 아무도 제자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실망하여 그때부터 야위어갔습니다.
한참 지나고 부처님께서 다시 그 사찰에 오셔서 노인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왜 그러는지 물었습니다.
노인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스님들을 불렀습니다.
" 라다가 출가하고 싶어 하는데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까? "
" 라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스님이 한 분도 없습니까? "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라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베풀었지 은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또 늦게 출가하는 자를 가르치기 힘들기 때문에 모두 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 사리불이 나왔습니다.
" 라다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저에게 밥 한 숟갈을 보시하였습니다.
그 은혜로 제가 라다를 출가 시키겠습니다." 그러자
사두 사두 사두하고
부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라다는 사리불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라다에게 특별히 부탁합니다.
" 라다여 늦게 출가하는 자를 가르치기 힘이 드니 부디 『가르치기 쉬운 사람』이 되세요. "
라다는 그 말씀을 새겨듣고 열심히 수행해서 드디어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물어봅니다.
" 사리불이여 라다를 가르치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 부처님 라다는 정말 가르치기 쉬웠습니다. 지금까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
그 후 부처님께서는 라다를 가르치기 쉬운 사람 중에 최고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리불은 지혜롭기 때문에 조그마한 은혜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세상이 고마워 은혜를 갚고 싶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고, 봉사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빠라미 선업을 할 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희생은, 너를 위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잘해주고 있다.
너희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가겠다. 』라고 하는 것인데
빠라미를 하는 사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고맙게 생각하기 때문에 빠라미를 하는 것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갚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해준다는 생각이 없고 당연히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스님들은 자기들이 라다에게 은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리불과 다른 스님들을 비교해보면 그 마음의 바탕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빠라미를 하는 마음은 윤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귀한 마음입니다.
세상을 도와주고 있다고 뻐기는 것이 아니라 고맙기 때문에 은혜로운 세상에 보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때는 바람이 불어도 고맙고 해가 뜨는 것도 고맙고 해가 지는 것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이런 식이든 저런 식이든 다 서로서로 관계를 가지며 돕습니다.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면서 네캄마 · 칸띠 · 우삐까를 가지고 세상을 대하다 보면 빠라미가 되는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게 되지요
열 가지 복 짓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세상을 자비희사로 대한다는 것은 수행 중에 마음으로만『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도 많이 하고 입으로도 많이 해야 하고 실제 몸으로도 많이 해야 합니다.
어떻게?
십바라밀 즉, 다나(보시) 실라(계율) 바와나(수행) 압빠짜야나(공경) 웨이야와짜(봉사) 빳띠다나(회향) 빳타누모다나(타인의공덕을 같이 기뻐함) 담마사와나(청법) 담마데사나(설법) 띠티주깜마(견해)를 바로잡는 일 이 열 가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불자로서 마지막에서는 빠라미를 하게 되는데 빠라미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慈· 비悲 ·희喜· 사捨로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희사를 실천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 넥캄마 · 칸띠 · 우삐까 입니다.
자비희사는 이 세 가지로 시작해야 합니다.
넥캄마 칸띠 우삐까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계 정 혜로 마음을 닦아 번뇌를 씻어내어 아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네캄마 칸띠 우삐까의 마음을 가지기가 쉬워지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세상을 자慈· 비悲 ·희喜· 사捨로 대하면서 열 가지 복 짓는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것이 십바라밀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십바라밀이 완성되는 날이 우리가 깨닫는 날이 되고 생로 병 사 삼 세 윤 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나를 성취하는 날입니다. 처음 수행하다 보면 언제까지 해야 되는가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결과부터 욕심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일할 맛을 느끼고 그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결과를 먼저 생각하니까 본인이 하고 일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로 도와 과를 성취해야 수행이 끝난다고 하면서 도와 과만 생각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일이라는 것은 시작 중간 끝이 있는데 일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돌아서서 성과를 찾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중간단계들을 충실히 이행해야 끝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를 묻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이고 중간이고 끝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또 이것이 수행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작년에도 수행했고 올해도 하고 내년에도 할 것인데 수행이 언제 끝나는가만 생각하고 있으면 수행을 안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수행은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고 또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아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알고 수행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고 있는 것 자체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뿌듯한 일을 없을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자들만 따라하는 법이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은 관계없는 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고 진리와 법칙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적과 인종 성별과 나이 시대를 불문하고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나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진리 입니다.
우리가 핑계를 대거나 하기 싫어서 안 하던가 안 해도 된다고 착각하고 산다면 진짜로 손해입니다.
이 길은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꼭 가야 하는 길입니다.
늦게 갈수록 시작이 늦을수록 고생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알면 무조건 가게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내 삶에 일부분일 뿐이다" 혹은
"나에게는 이 정도만 있으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리와 법칙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른 종교처럼 종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숨 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 쉬지 않고 못 살지요.
그래서 숨을 쉬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닌 꼭 해야 하는 일이듯 부처님의 가르침도 우리가 꼭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 수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사실 쉬운 일이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을 단순화 시키면 선업과 불선업 두 가지인데 선업을 하는 것도 매우 어렵지만 불선업을 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불선업을 하려는 마음도 힘들고 불선 업을 하는 중 몸도 힘들고 불선업을 하고 나면 그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대도 불선업을 하는 이유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선업인지 불선 업인지도 모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고 자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여기서 보면 선업을 할 때는 똑같이 힘들지만 결과는 힘들지 않습니다.
선업은 행복을 가져오지만 불선업은 결과까지 힘들어 고통을 고통뿐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누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얻기 위해서 불선업을 했다면 지금도 힘들고 앞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선업을 하게 되면 불선업을 한 것보다는 훨씬 좋고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선업도 빠라미 공덕이 아니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선업으로 사람으로 태어나도 죽고 신으로 태어나도 죽고 범천으로 태어나도 죽습니다.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죽어서 윤회하지 않는 중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업을 하더라도 빠라미가 되는 선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사(生死)는 지독한 고통(둑카, dukkha)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원리를 알고 고통을 끝내고 행복하려면 이 길은 꼭 가야 하는 길이고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아셔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완전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알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즐겁게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길을 찾습니다.
사람 따라 가치관이 달라 행복의 기준이 다양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궁극적인 것은 하나뿐입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고통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계가 없는 완벽한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바쁘게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하며 고생 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지만 지혜가 있고 삶의 태도가 좋으면 그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투자는 똑같이 했지만 선택하는 상품에 따라 이익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선업을 하더라도 빠라미가 되는 선업을 해야 합니다.
선업의 종류에 일반선업과 빠라미가 되는 선업이 있다고 했지요
이 두 가지는 몸으로 하는 일은 똑같은데 일하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 선업으로는 윤회를 빙빙 돌기만 하는데 빠라마가 되는 선업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행복인 닙바나로 가게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만나 법을 공부하고 실천 수행을 할 때 똑같은 투자로 최상의 효과를 보고 싶다면 빠라미가 되는 선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이 앞서 처음부터 완성된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먼저 빠라미가 되는 선업이 무엇인지 알고 빠라미가 되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다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처님도 무수한 겁 네 번과 십만 겁을 지나서야 바라미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집중이 안 된다고 화를 내는데 집중이 잘 된다면 사실 수행할 필요가 없지요.
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수행하는 것입니다.
반복 훈련하는 수행으로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라미를 하겠다고 해도 빠라미가 바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계속 마음을 반복적으로 훈련 시켜야 합니다. 반복하는 것이 능숙함을 만듭니다.
한번 연습하는 사람과 백번 연습하는 사람은 그 능숙함 정도가 다릅니다.
백번 하는 사람과 천 번 하는 사람은 그 능숙함의 정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훈련입니다.
지계(持戒)도 훈련이고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력을 키우는 것도 훈련이고
위빳사나 수행으로 지혜를 계발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란 몸과 마음을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것입니다.
만약 1초에 한 번 보는 속도로 1시간을 수행한다면 3천 6백 번을 보게 되고
하루에 열 시간 수행한다면 3만 6천 번을 관찰하게 됩니다.
열흘 수행했다면 3십 6만 번 관찰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함으로써 능숙함을 만들어 내는 아주 단순한 일입니다.
체육계에서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려면 최소한 십 년 이상 훈련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는 운동도 십 년 이상씩 하면서 그것도 백 명 중에 한 명, 혹은 천 명 중에 겨우 한두 명 정도가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어려운데 하물며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수행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대표 선수가 되는 일로 가치로 따진다면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는 것과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최소한 십 년 이상은 수행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한 시간 해 보고 하루 해 보고 일주일 해보고 안 된다고 짜증 내지 말고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작심삼일로 끝내지 말고 반복해서 꾸준히 하면 성공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빠라미에 대해서도, "선업하기도 어려운데 빠라미가 되는 선업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일반 선업은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씨가 착하면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착하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위빳사나 지혜나 빠라미 공덕이 되는 지혜는 부처님을 만나야 가질 수 있습니다.
중력이 우리를 이 지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번뇌가 중생들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꽉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일반 선업이 아닙니다. 일반 선업은 아무리 많이 해도 윤회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고 윤회하는 중생은 몸과 마음의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고통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도 고통이 있습니다.
완전 열반이 되어야 고통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집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윤회에서 벗어나야 하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빠라미 선업 공덕이 필요합니다.
윤회 속에서 고통 없는 행복이라는 것은 착각밖에 없습니다.
어떤 착각이냐 하면, 개가 똥 먹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개는 똥을 먹으면서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잘 먹는다고 뻐깁니다.
그것을 보고 인간은 웃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아는 행복이 그런 것입니다.
지혜의 수준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고통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은 윤회하는 삶 속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는 즐겁고 행복한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미나게 놀고 여행을 다니고 가족 친지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 등, 선남선녀가 즐기는 것이 많은데 부처님께서 고통뿐이라고 하시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정적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행복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도 행복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행복은 고통이 조금도 섞이지 않는 깨끗한 행복이다 예를 들면 진수성찬에 똥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고통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의 행복이 진수성찬이고 생로병사가 똥물입니다.
생로병사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지 않는 중생이 없고 또 태어나서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중생이 없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지요.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은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생사도 없겠지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신은 개념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중생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하고 만물도 생기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태어남과 죽음이 있다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그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모든 중생들의 소원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을 자기 수준대로 정합니다.
부자 대통령 장관 장군 학자 미인 유명한 철학자나 예술가 등등이 되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루 세 끼를 먹지 여섯 끼를 먹지는 않습니다.
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습니다. 하루아침에 몰락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이 정의하는 행복이 청정함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청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이란 없습니다.
갑부도 청정한 사람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산이 부처님의 발바닥에 묻은 먼지보다 하찮은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왕도 장군도 장관도 모두 부처님께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이 사자 앞에 개처럼 무력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진짜 청정하게 깨달은 성자들을 만나면 왕이나 재벌들이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지혜로운 학자라 해도 스스로 잘났다고 하늘을 찌르던 사람도 위대한 부처님을 만나서는 다 겸손하게 절하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인생에는 청정함이 가장 가치가 있다는 말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매번 잘난 척하고 행복한 척하고 지혜로운척하며 잘 살았다고 착각하며 죽어갑니다.
다 착각이었지 진짜 잘 산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워질 때는 사실을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흐름 속에서 빠져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것을 비유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천문학을 공부한 장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며칠 뒤에 비가 많이 올 것인데 그 빗물을 마시면 사람들이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사실을 고하고 자기들만 살기위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빗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국민들은 그 빗물을 마시고 모두 다 미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왕과 장관은 자기들이 미치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모두가 미친 가운데 둘만 정상으로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미친 사람들이 정상인 두 사람을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그 두 사람도 모두 빗물을 마시고 미쳐버렸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이 살다 보면 어리석음의 흐름 속에서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이 미치지 않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니 나도 같이 미쳐버리자고 하듯이 나도 잊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수행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잊고 산다고 해도 아예 모르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한 번씩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들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껴 질 때가 있습니다.
무의미하다는 느낌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지 못한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우울해합니다.
세간에서 행복하다고 해도 진짜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못 찾을 때 괴롭습니다. 싯달타 태자가 왜 출가합니까? 괴롭기 때문입니다.
다 갖추었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그것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괴롭습니다.
우리가 권세가나 재벌을 보고 대단하다고 부러워할 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이 텅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심입니다.
욕심 있는 자가 행복하다면 거짓말 이거나 착각입니다 거짓으로 행복한척하거나 어리석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욕심 있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이 말은 진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 해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진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위야 합니다.
지혜롭다고 해도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알 때는 조금 행복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 청정할 수 있는 길도 모르고 행복하다면 자기수준에 맞는 행복이지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오십 년을 살든 백 년을 살든 그동안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혜롭고 고귀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다 같이 힘들고 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이런 어려운 일은 피하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피하는 것인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지고 태도와 방향을 올바르게 잘 설정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가는 백 년 인생은 똑같이 힘들지만 백 년 후 일의 끝남은 다릅니다.
일이란 완전한 행복 닙바나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일은 지혜로워지면 누구라도 언젠가는 꼭 하게 되는 일입니다.
어리석을 때는 모르고 살겠지요.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이라고 착각하고 이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할 필요 없다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필요하다고 알지만 이일은 숨 쉬는 것처럼 꼭 해야 한다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알게 되면 무조건 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가야 하는 길이라면 빨리 가는 것이 낫겠지요.
그래서 만약 백 년 인생을 살면서 닙바나까지 1000 킬로미터를 가야 한다고 할 때,
방향을 바로잡고 100 킬로미터를 갔다면 남은 길은 9백 킬로미터이고 방향을 모른다면 열심히 가도 1000 킬로미터가 늘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즉, 길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은 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
물리학에서 여기서 저기까지 움직임이 없다면 에너지 소멸이 있어도 일이 성립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몇 생을 살아도 여기서 윤회, 저기까지 닙바나 라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면 헛된 인생입니다.
얼마 정도라도 움직임이 있어야 일, 윤회에서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빠라미입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 살면서 빠라미가 되는 일을 몇 가지나 했는가 그것을 체크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십바라밀 공덕이 있어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이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완벽한 지혜로 알 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고 다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착각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출세간적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항상 빠라미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빠라미를 실천하는 삶이 닙바나를 위해 움직이는 삶입니다.
우리는 윤회의 시작을 매우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철학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시작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윤회의 시작과 끝은 움직이지 않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윤회에서 제아무리 날고뛰면서 잘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움직임이 조금도 없는 제자리걸음입니다.
제자리걸음에 무슨 시작과 끝이 있습니까? 제자리걸음에서 시종을 논한다는 것은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만든 개념이기 때문에 몇 시간 몇 날 몇 년이 지났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늘 한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시작과 끝이 무의미합니다.
누구는 시작과 끝을 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끝낼 수 있게 합니다.
윤회를 끝냄이 닙바나(열반) 입니다.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어야 고통이 소멸되고 고통의 소멸이 윤회의 끝남입니다.
번뇌의 소멸이 집성제의 소멸이지요.
집성제의 소멸이란 고통의 원인의 소멸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소멸되면 더 이상의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윤회는 번뇌 덩어리이고 번뇌의 완전 소멸이 닙바나 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윤회의 시작과 끝을 논하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윤회는 말 그대로 윤회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시작도 끝도 없이 제자리에서 계속 그냥 빙빙 돌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런 윤회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어야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출세간이라는 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차원입니다. 하나의 차원에서만 보고 있으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중생의 시작과 윤회의 시작을 질문합니다.
그 질문은 일단은 자아를 먼저 세우고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즉, 나를 먼저 세워야 나의 시작을 질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니 그 사람은 중생과 윤회의 시작을 모른다고 오해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임환자인 여자에게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를 물으면 그 여자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와 같이 "나"가 없는데 나의 시작을 어떻게 질문 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체가 어리석음이고 아상이고 착각입니다.
없는 "나"를 만들어 두고 내가 어디서 시작했는지 물어보는 어리석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합니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한 사람은 아들을 낳았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딸을 낳았다고 하며 서로 싸울 때, 그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질문부터 잘못되었다고 하시고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무아(anattā)를 모르는 사람의 우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고 또, 그런 사람은 말을 해줘도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그 당시 많은 외도들이 부처님을 공격하려고 논리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 부처님이 세상의 진리를 모른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시작이고 사실인데 부처님이 그 시작을 모르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사실, 인간의 시작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계란과 닭이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사람과 같습니다.
닭이 계란을 낳고, 닭은 계란에서 부화되어 나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대답할 수 가없지요.
윤회의 시작은 없습니다.
윤회는 원인과 결과로 굴러갑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윤회는 인과의 흐름일 뿐 윤회의 시작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시작이라면 시작의 원인이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원인의 원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차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면만 보고 있으면 다른 면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다고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윤회란 움직임이 없어서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법당을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하면 처음에는 그대로 하겠죠.
한 바퀴, 두 바퀴 몇 바퀴를 돌았는데도 아무런 설명이 없으면 화나겠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돌 때는 시키는 대로 돌았는데 단지 돌기만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알면 더 이상 돌지 않습니다.
강요해도 돌지 않습니다. 윤회도 마찬가지로 모르기 때문에 계속 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 필요가 없다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돌고 있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아는 사람은 돌지 않습니다. 누가 말해도 돌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자마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 내가 몰라서 윤회하였다. 이제 알았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오도송입니다.
【 한량없는 삶 Aneka Jāti 】
한량없는 세월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집 짓는 자를 찾아 헤매었으나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고통이었다.
집을 짓는 자여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다.
나의 마음은 조건 지어진 것들에서 벗어났고
모든 갈애는 파괴되었도다.
Anekajātisaṁsāraṁ, 아네까자-띠상사-랑
sandhāvissaṁ, anibbisaṁ 산다-윗상 아닙비상
Gahakārakaṁ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ṁ. 둑카-자띠 뿌납뿌낭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ṁ na kāhasi 뿌나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떼 파-수까-박가-
gahakūṭaṁ visaṅkhataṁ; 가하꾸-땅 위상카땅
Visaṅkhāragataṁ cittaṁ, 위상카-라가땅 찟땅
taṇhānaṁ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이와 같이 윤회를 모르기 때문에 빙빙 돌고 있습니다.
모습만 바꾸어 거듭 생멸하면서 의미 있는 새로운 삶을 산다고 착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이 안 되려면 열반을 향하여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열반을 향한 움직임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끝에 도착해보니까 제자리라면 우리는 많이 실망하겠지요.
한생을 열심히 살고는 만족하고 있는데 사실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태어나서 부지런히 열심히 많은 일을 하고 살지만 아무 보람도 없는 헛된 인생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삶에서 헛되지 않은 것이 바로 빠라미 입니다.
빠라미가 되는 선업이 나의 인생을 닙바나로 갈 수 있게끔 조금이라도 움직여 준다고 알아야 합니다.
빠라미란 고귀한 분들이 하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번뇌가 없는 청정한 분이시기에 가진 것이 전혀 없어도 최고로 고귀합니다.
우리도 번뇌가 없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때 고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빠라미가 고귀한 자의 일이라고 하면서 대단히 어려워서 하기 힘든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고귀할 때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귀해집니다.
잠에서 깰 때 오늘도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나면 그 마음은 고귀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모든 중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아침에 일어난다면 그것도 빠라미가 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욕심 애착 집착을 버리면서 하는 일은 다 빠라미가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윤회에서 빠라미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친지나 가족들을 대할 때도 그들을 어쩌다 한 번씩 집에 찾아오는 귀한 손님 대하듯이 한다면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빠라미가 됩니다.
긴 윤회를 한 생으로 보면서 이번 생을 그중 하루로 본다면 우리는 하루살이 인생에서 만난 가족을 귀한 손님 대접하듯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데 욕하고 상처 주는 마음이 날까요?
더 잘해주고 싶지요 욕심으로 애착 집착하지 않고 지혜롭게 잘 해 주면 다 빠라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완전히 뒤집기는 힘듭니다. 생은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고 나의 가치관만 바꾸어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 똑같은 삶이라도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고 말과 행동도 아주 아름답게 달라집니다.
지금 모두 삭발하고 일주일, 한 달, 삼 개월간 수행하라고 하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 현실 속에서 지혜롭게 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불선업을 쉽게 하지만 사실 불선업을 할 때도 힘이 듭니다.
살생도 도둑질도 사음도 거짓말도 실제로 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선업 빠라미를 할 때도 어렵고 힘들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갑니다.
그런 식으로 꾸준히 해가면 진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공덕들이 차차 많아지게 됩니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1000 킬로미터 가야 닙바나에 도착할 수 있다면 내가 1 미터만 가도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철학 없이 십바라밀을 시작하지 않으면 항상 제자리에 있게 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윤회에서 살아온 수많은 인생이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바라밀을 완성해야 사성제를 깨닫고 닙바나를 성취할 수 있음을 알고 십바라밀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십바라밀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고귀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가? 고귀한 마음은 공짜로는 안 생기지요.
고귀한 마음은 지금처럼 끊임없이 계 정 혜를 닦고 닦아 번뇌에 찌든 우리 마음을 씻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계속 계 정 혜를 훈련하면 아상이 없어집니다.
아상을 내려놓게 되면 세상을 하나로 보게 되고 너 와 나라는 분별심이 없어집니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세상을 대할 때 자慈· 비悲 ·희喜· 사捨로 대하게 됩니다.
아상을 내려놓는 것이 빠라미의 기본입니다.
아상을 내려놓고 고귀한 마음으로 하는 말고 생각과 행동들이 다 빠라미가 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남을 해치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말해야, 어떻게 행동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이익이 될까?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삶 자체가 빠라미가 되는 것입니다.
빠라미를 잘 실천하려면 먼저 닙바나사 빠짜요 호뚜(nibbanassa paccayo hotu, 열반의 원인이 되기를) 이라는 마음의 씨앗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씨앗에서 뿌리가 제대로 내리려면 물을 주고 햇볕을 잘 들게 하고 영양분을 주어야 하듯이
우리는 계 정 혜를 닦는 것입니다.
계 정 혜를 닦음으로써 아상을 내려놓게 되고 아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만큼 넥캄마(nekkhamma, 출가), 칸띠(khanti, 인내) 우삐까(upekkhā, 평정)의 기본적인 나뭇가지 세 개가 생기고 그 가지에서 잎들이 무성하게 나오듯 자慈· 비悲 ·희喜· 사捨로 세상을 대하는 힘들이 생깁니다.
마침내 꽃이 피듯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이 빠라미 공덕이 됩니다.
빠라미 공덕이라는 꽃이 필 때 그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닙바나로 갈 때까지 이 공덕이 계속 우리를 뒷받침해주면서 따라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신 빤딧짜 스님께서 보내주신 카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