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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1
단연 한국 최고의 절이 아닌가 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절답게 기품있고 단순하다. 덕지덕지 당우를 새로 지어 붙이지 않고 역사적 당우만을 그대로 지킨다. 길고 긴 진입로도 속세의 때를 다 벗어난 해인사의 품격을 보여준다. 옛날 최치원도 속세의 진애를 떨쳐가며 이 먼길을 왔을까. 길은 멀지만 최치원은 닿을 듯 있고, 팔만대장경은 눈앞에 있다. 짧은 혀로 말해 무엇하겠는가.
1.방문지 대강
명칭 : 해인사
위치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입장료 :
방문일 : 2023.10.22.
2. 둘러보기
세번째 방문인 듯하다. 올 때마다 사찰의 기운이 더 깊어지고, 마음에 내는 자죽도 더 깊어진다. 단청이 퇴락하는 것과 반대로 절의 품격도 운치도 더 높아진다. 올해 단풍은 선명하지 않으나 해인사의 고고함은 선명하다.
1) 소개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 귀의(歸依)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사찰 소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 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의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해인사 홈피)
성보박물관
입구 선재카페
비석거리
길상탑
원경왕사비
*일주문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마지막 중건은 1940년에 있었다.
일주문 정면에 있는 현판의 글씨 "가야산 해인사"는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서 산문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해인사 홈피)
일주문 다시 뒤돌아보며
해인총림. 봉황문
천왕문이라고도 불린다.
큰 절은 으레 천왕문이나 사천왕문 또는 금강문 따위로도 불리는 문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본디 욕계 육천 가운데 사왕천에 머물면서 천상으로 들어오는 여러 착한 사람을 보호하는 선신으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악한 것을 멸하고 불법을 옹호하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산문 입구에 봉안하여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신중들은 대부분 힌두교의 영향이며, 불교가 대중화하는 가운데 인도의 민간 신앙과 함께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다.(홈피)
봉황문. 사천왕문에 이곳에서는 '봉황문' 편액이 걸려 있다.
사천왕이 그림으로 되어 있다. 보통 나무조각상인데 여기는 그림이다. 일본 사찰에서도 그림 사천왕을 종종 볼 수 있다.
국사단
가야산 수호신인 정견모주를 모신 전각, 정성들여 기도하면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는 신이다. 지금의 대비로전 자리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여신이다. 정견은 깨달음이란 뜻이다. 정견모주는 걔달음의 어머님이니 당연히 여신이다. 해인사는 비로자나불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에게 가야산을 빌려 만든 불국토다.
정견모주가천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대가야국을 건설한 임금 죄질주일과 가락국을 건국하여 수로왕이 된 뇌질청예를 낳았다.
국사단. 재미있는 것은 해인사 홈피에는 국사단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해동원종대가람. 해탈문의 편액
해탈문
중문에 속하는 문으로써 일반 사찰의 불이문에 해당한다.
해탈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는 주·객, 세간과 출세간, 선과 악, 옳고 그름, 나고 죽음 등 대립하는 상대적인 것들을 초탈한 불이법문의 세계로써 삼존불을 모신 건물 앞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일주문에서 해탈문에 들어설 때 까지 33계단을 거치는데, 도리천 곧 33천의 궁을 상징한다.
구광루.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데,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노전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만이 법당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누각은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이 모여 예불하고 설법을 듣는 곳으로서 지은 것이다.(홈피)
구광루. 해인사 한 가운데 있는 당우다.
범종각
대적광전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 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이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홈피)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넓은 뜰에 자리잡고 있어 정중탑(庭中塔)이라 한다.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나타나 있고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이 있고 정상에 상륜부(相輪部)가 있는데, 원래는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隅柱)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옥개받침은 모두 5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전각에는 후대에 설치한 풍경(風磬)이 달려 있다. 처마 끝의 반전은 심하지 않으며 탑의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九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1926년 6월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石函) 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중수가 끝난 뒤 다시 석탑 안에 봉안했다.
석탑 앞에 놓여 있던 안상과 연화무늬가 새겨진 직사각형의 봉로석(奉爐石)은 석등(경남유형문화재 255) 앞으로 옮겨놓았다.(홈피)
해인사 창건 당시 세운 탑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926년 6월 탑을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9점의 불상이 발견되었으며 수리 후 불상을 그대로 넣어 모시고 있다.(안내문)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에 들어서 보면, 왼쪽부터 철조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있고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안치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다. 이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를 거쳐,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홈피)
대적광전
여기까지 보고 2부로 이동한다. 최치원상과 학사대, 독성각, 팔만대장경판전과 대장경 등을 2부에서 보기로 한다.
3. 둘러본 후
*정견모주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 후기 가야의 수도인 고령 땅에는 「가야산신감생설(伽倻山神感生說)」, 일명 「정견모주설(正見母主說)」이라 불리는 신화가 전해 오고 있다. 대가야를 지켜 주는 신성한 가야산에는 산신(山神)이 있었고, 그 산신이 정견모주였다. 정견모주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9의 고령현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857~ ?] 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 실려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이다[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가야 지역에서 가장 성산인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라는 여신과 천신(天神) 이비가(夷毘訶)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머리가 해와 같이 빛난다 하여 뇌질주일(腦窒朱日)이라 하고, 둘째 아들은 얼굴이 하늘색과 같이 푸르다 하여 뇌질청예(腦窒靑裔)라 하였다. 후에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뇌질청예는 김해로 가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 이처럼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으로, 대가야와 금관가야 건국 왕의 어머니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정견모주는 대가야국 왕의 어머니로, 죽어 산신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합천 가야산에 정견모주 신당 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정견모주 신화」는 가야산과 대가야국과 관련하여 고령 지방에서 전하는 대가야국의 독특한 건국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에 실려 있는 ‘가락국 고기(古記) 육란지설(六卵之說)’도 대가야 건국 신화의 하나이지만, 「정견모주 신화」는 고령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대가야 건국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지방색을 근거로 한 건국 신화이다.
[설화로 재탄생한 정견모주 신화]
『옛날 옛적 고령에서』에 수록된 「정견모주 신화」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전설이 덧붙여져 있다. 「상아덤[가마바위] 전설」과 「알터 전설」이다. 「정견모주 신화」가 전설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설화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1. 인간화된 아름다운 여신, 정견모주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혼인하기 위해 인간의 혼인 풍습처럼 꽃가마를 탔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아덤, 일명 가마바위 전설을 만들어 내었다.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에는 가마바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마을 뒷산이 가야산 기슭이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산 속으로 200m쯤 들어서자 잣나무 두 그루가 받치고 있는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길이 15m 높이 7m의 거대한 이 바위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았단다. 이 마을 터줏대감 신덕수[72]씨는 “정월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목욕재계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른바 대가야의 첫 왕을 잉태한 가야산 여신을 기렸던 정견모주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시간 남짓 더 오른 가야산 중턱, 서장대 주변에는 가야산성을 쌓는데 이용됐던 수천수만 개의 돌이 허물어져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성벽으로 남기엔 기나긴 세월을 감당하기가 버거웠으리라. 동남쪽 능선을 100m쯤 오르자 큼지막한 돌들을 받침대로 삼은 길이 5m의 바위가 산 정상을 향해 누워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마바위’ 또는 ‘상아덤’으로도 불린다. 정견모주가 하늘인 ‘이비가(夷毘訶)’를 맞을 때 탔던 꽃가마였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이 길목이 출입통제 지역으로 묶여 사람의 발길이 끊겨 있었다. 역사와는 상관없이 길이 통제된 것이 자못 아쉽기만 하다.” 이 글에 나오는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30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보름날에는 사람들이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의 산신제를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마바위는 정견모주가 혼인하기 위해 탔던 꽃가마라고 했다. 꽃가마를 탄 수줍은 새색시 정견모주의 모습이 연상된다. 여신에게 인간의 풍습을 덧입혀 아름답게 채색한 것은 산신 정견모주를 사람들이 얼마나 가깝게 여겼는가를 말해 준다.
2.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대가야를 부각시키는 정견모주설 경상북도 대가야읍 장기리 알터마을[구 개진면 양전리]의 지명 유래 전설도 정견모주와 연관이 있다.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에서 향토 사학가 김도윤[80]에 따르면, “가야산 산신과 하늘 신이 감응해 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가야산 줄기를 타고 하천으로 흘러 내렸다. 그 중 하나는 이곳 회천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와 대가야의 1대 이진아시왕이 됐고, 다른 하나는 회천을 지나 낙동강을 타고 경상남도 김해까지 흘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됐다.”고 한다. 「알터 전설」을 정리하면 정견모주가 커다란 알을 두 개 낳았고, 큰 알 즉 뇌질주일이 껍질을 깨고 나온 곳을 알 터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신화에 흔하게 나타나는 난생설(卵生說)이 정견모주설에도 덧붙여진 것이다. 정견모주설에 덧붙여진 「알터 전설」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 신화를 의식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 가운데 가장 큰 알에서 먼저 태어난 동자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동자들은 5가야국의 건국주(建國主)가 되었다는 것이 가락국 건국 신화이다. 가락국 건국 신화가 금관가야를 부각시키고 있다면, 정견모주설은 이에 대응하여 대가야를 부각시키고 있다.
[대가야와 함께 성장한 정견모주 신화]
건국 신화는 건국 초부터 형성되기 보다는 소국(小國)으로 출발해 여러 나라를 병합하면서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닦는 단계에서 만들어진다. 여러 나라를 통합하는 시기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지배층은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하여 정신적 통합을 이룰 필요가 있었으며, 자신들의 신성함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정견모주설도 대가야 건국 초부터 이뤄진 것은 아니다. 4세기 중엽 이후 가야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대가야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정견모주설도 5세기 경 고령 지방의 대가야가 가야문화권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면서 전승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견모주설은 대가야 건국왕의 신성한 혈통과 신이한 탄생을 이야기 하여 이진아시왕이 대가야의 건국왕이 될 수밖에 없었고, 대가야가 후기 가야의 맹주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건국왕의 탄생담만 전하고 탄생 이후의 영웅적 면모가 등장하지 않아 서사적 흥밋거리가 부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자, 그녀가 이 땅의 주인이다]
「정견모주 신화」는 한국의 고대 건국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천부지모형(天父地母型)’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이 태어나며,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으로 주몽이 태어난다. 한 나라의 건국 시조가 천신과 지모신의 결합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천부지모의 신성한 혈통은 천지를 아우르는 사람만이 건국 시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정견모주 신화」는 우리 고대국가 건국 신화의 전범(典範)을 따르면서 대가야의 성산 가야산 산신에게서 건국왕이 탄생한다는 독자적 지역성을 가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옛적 고령에서』에 기술된 ‘정견모주 신화의 특성’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가야산신 즉 여신을 강조했다. 정견모주설에서 천신인 이비가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야기의 초점은 산신인 정견모주에게 맞추어져 있다. 이비가는 정견모주가 감응하는 객체적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석순응전(釋順應傳)」에서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를 하늘 신, 혹은 남성 신인 이비가의 10세손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산신이며 여성 신인 ‘정견’의 10세손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왕실의 계보를 따질 때 정견모주를 기준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성 시조의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동시에 정착의 의미가 강한 산신의 권위가 강조된 부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신의 강조는 신화 제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견모주 신화」는 대가야 건국 신화로 통한다. 대가야를 건국한 사람은 이진아시왕이기 때문에 고조선 건국을 이야기한 「단군 신화」, 고구려 건국을 이야기한 「주몽 신화」처럼 「정견모주 신화」가 아닌 「이진아시왕 신화」로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고령 사람들은 「정견모주 신화」로 지칭한다. 가야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고령 사람들의 뿌리 깊은 숭배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가야산은 대가야에게는 국토를 지켜 주는 산신이 사는 곳이고, 그 산신 정견모주는 바로 국조를 낳은 신모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가야를 금관가야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정견모주 이야기는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뿐만 아니라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한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을 함께 언급하며 그 둘이 형제라고 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대가야를 건국했다고 함으로써 대가야가 금관가야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가야연맹의 맹주국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것은 종래 금관국 중심의 6란 설화의 논리를 허물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이를 통해 맹주로서의 합리성과 신성성의 이념을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대가야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정견모주 신화」는 고령 지방 특유의 전승으로 공간적으로 협소하게 그 위상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 대가야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가 정치적 의도로 후대에 재구성되었다 할지라도 그 신화적 고유성은 별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견모주 이야기는 수로 전승까지 포함하고 있어 그 구조가 복잡하면서도 서사 형태는 온전하지 않다. 오로지 건국주의 탄생담만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야국이 고대 국가로 체계화되지 못하고 망했다는 특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디지털 고령문화대전 전재)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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